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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1

 

 

“자자, 다들 듣고 있어? 특별히 내가 동화 읽어줄 테니까, 들어줄 거지? ♪”

 

히토미가 들뜬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동화...? 무슨 동화인데, 밋쨩...? ♪, ‘백설 공주’! 릿쨩도 알지? 이 동화, 엄청 유명 하다구 ♪, 리츠의 물음에 히토미가 신난 표정으로 답했다. 나, 사실 동화 읽어주는 건 처음이야! 에이치 선배, 고마워요? ♪, 여전히 들뜬 표정. 히토미가 제 손에 들려 있는 동화책을 들어 보였다. 백설 공주란 제목과 표지에 그려져 있는 어여쁜 공주. 눈을 감은 채 유리관에 누워 있는 것이 마치 자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표지를 모두에게 보여주던 히토미는 책을 펼쳐 천천히 읽어 나갔다. 옛날 옛날에 한 공주님이 살았어요, 로 시작한 아주 뻔하다 못해 누구나 알 법한 이야기. 하지만 히토미는 정말 신난 표정으로 그것을 열심히 읽어 나가고 있었다. 리츠와 하지메, 그리고 에이치 또한 별말 없이 들어줄 뿐, 다른 말은 없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렇게 공주님과 왕자님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히토미가 마지막 구절을 읽어내고는 책을 덮었다. 에이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다 무언가 떠오른 마냥 살짝 웃어보이곤 입을 열었다.

 

“이 이야기, 어째선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떠오르는 걸. 좋은 이야기야, 히토미 쨩. 잘 들었어... ♪ 『홍차부』 의 분위기를 위해서, 종종 읽어주는 것도 좋을 거라 생각해 ♪”

그 말에 리츠가 조용히 에이치를 향해 시선을 보냈다. 분명 이것은 리츠와 하지메, 그리고 히토미를 향한 말이 분명했다. 백설 공주의 이야기라면, 버림받은 백설 공주와 함께 해준 난쟁이들. 난쟁이들은 독 사과를 먹고 죽었을 때도 함께 해주었지만 결국 공주님은 왕자님께로 떠나버렸다. 그것도 평생, 쭉. 그러니까... 난쟁이는 하지메, 공주님은 히토미, 왕자님은 리츠 라는 결론이 날 수 밖에 없었다. 아마 하지메도 눈치 챈 모양인지 그저 웃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의도인거지, 리츠가 에이치를 조용히 쳐다볼 뿐, 그 외엔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정적이 조금 길어질 때 즈음, 잠시 조용해 진 주위를 둘러보다 히토미가 고개를 갸웃하며 입을 열었다.

 

“...? 뭔진 모르겠지만, 고마워요. 에이치 선배.....♪ 읽은 보람이 있네요! 기뻐라......♪ 부디 그 사람들에게도, 이 동화가 닿으면 좋겠어요 ♬ 에이치 선배의 주변, 재밌나 봐요! 보고 싶어질지도......♪”

 

정말 모른다는 말투. 그 누가 들어도 나는 몰라요, 라는 말투였다. 히토미는 눈치가 그닥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저 분위기를 읽고 행동할 뿐, 눈치 챌만한 계기도, 일도 없다면 영영 못 알아차릴 정도로. 정말 눈치가 없었다. 에이치의 말도 분명 자신과는 전혀 관련 없는, 남의 이야기로 알아듣고 있겠지.

 

“...정말, 밋쨩도 어쩔 수 없네.....♪ 정말로 눈치, 못 채고 있는 거야~?”

“응? 릿쨩, 무슨 일 있어? ♪ 나는 확실하게 듣고 있는 걸?”

“하아......? 밋~쨩. 바보네.”

“내가...? 잘 모르겠는 걸, 릿쨩......♪ 어려워, 문제 같아! ♪”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웃는 얼굴. 리츠가 잠시 히토미를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쇼파에 누웠다. 난 잘 테니까... 잘 자, 밋~쨩. 그리고... 하~군...... ♪”

 

그대로 잠에 든 것인지 그 뒤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치가 없다니, 무슨 뜻이지?, 히토미가 골똘히 생각하는 것인지 표정이 부쩍 어두워져 있었다. 뭐 시노 군한테 어떤 일이라도 있는건가? 히토미가 하지메를 뚫어져라 쳐다보자 하지메는 히토미를 보곤 갸웃하다, 살짝 웃어보였다. ...아닌데, 평소와 같은 시노 군인걸. 하지메의 웃음에 히토미도 따라 웃어보였다. 그렇다면 에이치 선배의 말 때문 인건가. ...대체 무엇이?

 

“...히토미 쨩, 표정이 어둡네. 아까 말 때문 이라면, 신경 쓸 필요 없어. 조금 짓궂은 장난일 뿐일테니까 말이야...... ♪”

“그럼 다행이지만... 조금 걱정돼서요. 화난건가 싶어져서... 조금 안심이에요, 에이치 선배. 감사합니다..... ♪”

 

여전히 조금 어두운 얼굴. 하지만 애써 웃어 보이는 것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역시 리츠의 말이 많이 걸리는 모양인지 자는 리츠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물론 고민한다고 해결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히토미가 한참 고민하다 일어나 에이치와 하지메에게 인사 하곤 부실을 나섰다. 내일쯤이면, 그때쯤이면 분명 릿쨩도 말해줄 거야. 그럼 그때 듣고 앞으로 눈치를 빠르게 하면... ...아무리 그래도 바보, 란 말은 또 듣겠지만. 하아, 히토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에이치 선배의 말, 무슨 뜻이 길래 그러는 걸까. 히토미가 도저히 모르겠는지 생각하다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향했다. 부실을 이리 빨리 나선 것은 처음이었다. 항상 릿쨩이랑 오래 머무르는 게 일상이었으니까, 히토미는 적어도 리츠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는, 쭉 그곳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생각해보니 그때 항상 시노 군도 함께 였었네. ...왜?, 히토미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것에 발걸음을 멈췄다. 생각해보니 하지메는 항상 곁에 있었다. ...그럼 에이치 선배가 말한 그 사람들은...?

 

“...아...”

 

히토미가 잠시 짧게 탄식을 내뱉다 발걸음을 다시 재촉했다. 오늘 저녁은 오므라이스로 할까. 조금 걸리는 것을 뒤로 하곤 발걸음을 더 재촉했다. 더 이상은, 알아채고 싶지 않았다.

앵커 2

 

 

  "상대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노출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랍니다. 특히나 그 상대를 대면하고 있을 때는 말이죠!"

  여전히 어린아이를 달래듯 하는 말투다. 시가라키 슈아는 대답 대신 히비키 와타루를 향해 혀를 슬쩍 내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비주얼의 흑발 소녀가 삽화로 넣어진 얇은 동화책이 들려 있었고, 그의 손에도 비슷한 이미지가 표지로 쓰인 동화책이 들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는 연극부실 무대에 걸터앉은 두 사람의 뒤로는, 하나하나 다른 출판사의 '백설공주' 수십 권이 낭자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동화책이야?"
  "이런, 무슨 바람이라뇨! 동화는 언제나 로맨틱하고 사랑스럽답니다. 마치 당신처럼 말이에요. 관객들에게 가장 쉽게 감동을 전달해 줄 수 있는 소재라는 걸 모르나요, 슈아?"

  마치 당신처럼 말이에요. 와타루는 눈을 찡긋이며, 덧붙였다. 여타 소녀들이 듣는다면 누구라도 설렐 법한 멘트다. 소녀나 소년이나.


  어쨌건 시가라키 슈아를 제외한 모두가 히비키 와타루와 사랑에 빠질 법한, 그런.

  "......유치하잖아? 아무리 그래도. 겨우 며칠 전까지 햄릿을 중얼거렸으면서, 와타루."
  "그것은 개인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 뿐입니다. 호쿠토군이랑 토모야군은 햄릿의 햄 자도 꺼내지 않았잖아요? 우리 연극부의 진짜 다음 공연은, 바로 백설 공주랍니다!"

  그가 한껏 감정이 고조된 듯 과장되게 팔을 벌리고 외친다. 슈아는 눈마저 감아 버린 그 얼굴의 환희를 향해 눈썹을 까닥했다. 백설 공주, 마지막으로 읽었던 적이 정확히 십이 년 전이다. 새왕비의 음모로 죽을 뻔 한 백설공주가 도망쳐 열두 난쟁이와 살다가, 사과를 먹고 정말 죽은 다음 왕자의 키스로 깨어나는, 그런 클래식한 권선징악의 스토리.
  슈아는 흑발의 미소녀가 색색깔 난쟁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림을 말끄러미 내려다 보았다. 한 장, 두 장, 큼지막한 글씨가 길어 봤자 겨우 서너 줄씩 박힌 페이지는 금세 넘어간다.

  "재미있나요? 간만에 읽는 백설공주의 소감은 어떤가요, 슈아?"

  음성이 아까보다 더 가까이서 들렸다. 히비키 와타루가 고개를 제 쪽으로 기울였는지 동화책 가장자리에 옅은 은빛이 도는 머리카락이 언듯 비쳤다.

  "특별히 재미랄 것까지야......있나. 엔딩은 해피엔딩?"

  슈아의 손끝이 한 페이지를 넘기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 앞쪽에는 왕자와 백설공주가 입을 맞추는 장면이 그려져 있었고, 페이지를 넘기면 왕비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쇠구두를 신고 춤을 추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왜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죠?"
  "그야 네가 쓴 요 사이 것들은 대부분 배드 엔딩이었으니까. 햄릿 각색본이라던지 말이야."
  "오?"

  와타루의 놀란, 혹은 당황한 표정은 지나치게 솔직했다. 물론 일부러 과장되게 짓는 것일 수도 있지만, 슈아는 어찌되었건 그 표정을 좋아했다. 특별히 이기고 질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히 이긴 느낌이었다. 그 보랏빛 눈동자로 어떻게 알았냐, 하고 묻기에 히다카 호쿠토, 라고 대답했다. 와타루의 저 들으라는 듯한 고의적인 한숨 소리를 들으며 슈아는 슬그머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Amazing! 그나저나 슈아가 제 각본에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군요? 제목과 엔딩까지 기억해주다니, 저는 진심으로 놀랐답니다?"
  "아아니..., 그냥 심심해서 읽었을 뿐이고."

  기인이 쓴 스토리는 어떤가 싶었다. 부분적으로라도 텍스트를 다루는 이는 그 오기인이라는 그룹 사이에 그가 유일하지 않은가.

  "그렇군요. 아, 갑자기 긴장되네요......!"
  "긴장까지나? 거짓말."
  "후후후, 감상이 궁금합니다. 물어도 될까요, 슈아?"

  화사한 미소가 진한 분홍색 홍채 위에 곱게 비쳤다. 퍽 가까운 거리의 아이 컨택이었으나 연인 특유의 묘한 기류라던가, 하다못해 마땅히 볼에 띄워져야 할 홍조조차도 어쩐지 둘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나쁘지 않았어. 클라이맥스에서 둘의 전투 장면을 그렇게 연출시킬 줄은 몰랐지만...... 놀랐답니다. 히비키 주연배우 겸 감독님. Suprise."

  무미건조한 말투 사이에서 서프라이즈의 끝이 애매하게 올라갔다.

  "흠, 발화자가 다름 아닌 당신이므로, 극찬으로 여겨도 되는 걸까요? 피네의 무대 연출에 합격점을 주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기쁘군요! 후후, 과장해서 말하자면 이 히비키 와타루, 그야말로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랍니다!"
  "부담스러워. 내 평가의 가치가 어느 정도이길래 히비키 와타루가 그런 말씀을 하는 거야."
  "궁금한가요? 후후, 물론 약혼자에 대한 예우이자 레이디를 위한 매너죠. 또한 시가라키 슈아를 향한 제 사랑과 경애의 증거랍니다!"

  무언가 대답을 하려던 슈아는 괜스레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화를 갈무리했다. 약혼자에 대한 예우이자 레이디를 위한 매너, 그리고 시가라키 슈아를 향한 사랑. 사랑이라니, 턱없이 가볍고 헤픈 단어다. 특별히 기대한 것이 없는 만큼, 그저 그렇고 그런 경애다.

  *

 

  "히로인인 백설공주 역은 누구로 생각하고 있어?"
  "역시 토모야군이겠죠? 유감스럽게도 사랑스러운 마이 레이디는 무대에 절대 서지 않으시겠다고 했으니까요. 아아, 가엾지만 오필리어에 이어 또다시 여장을 하게 되었군요, 그는!"
  "꼭 캐서린이 아니더라도 여장은 종종 시켰다며?"
  "......이런, 이 진술의 근원지도 호쿠토군인가요?"
  "아, 악취미 변태 가면."

  대답은 않고 괜스레 능청을 떤다. 슈아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던 별칭인지 와타루는 눈을 두어 번 깜박였다.

  "저런, 그래도 미래의 부인에게서 그런 부끄러운 호칭은 듣지 않고 싶었는걸요."
  "히비키 와타루는 변태야. 인정할 것은 인정해."
  "당신도 그래요, 슈아."
  "네가 더 그래."
  "웬일로 유치하게 구는 건가요?"

  "와중에도 어쩐지 부정은 하지 않는 모양이군요," 하며 와타루가 중얼거린다.
  슈아는 듣는 체 마는 체 하다가도 유치하다는 말에 입술을 꼭 다물어 버렸다. 나름의 토라진 척이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 듯 싶다. 이런 것으로 기분 상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다. 잔꾀가 통하지 않을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솔직함을 보일 생각도 없었다.

 

  *

 

  슈아는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창문 밖을 곁눈질하듯 보더니 그대로 손을 뻗어 와타루의 허벅지를 서툴게 더듬는다. 창문 밖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포르르 날아가 버렸다. 히비키 와타루는 작은 손이 제 허벅지께에서 노는 제스처가 이제 무엇인지 안다. 그는 장난스레 미소지으며 기꺼이 제 무릎을 내어 준다. 시가라키 슈아를 안아 자신의 허벅지를 베도록 조심스레 뉘어 주는 사이 그의 왼손 약지에서 얇은 테의 반지 하나가 햇빛을 받아 부드럽게 빛났다.
  검은 머리카락이 까슬까슬한 바지 천 위에 흩어졌다. 둘 다 비슷하게 어두운 색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와타루는 그녀의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을 골라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슈아는 잠들듯이 눈꺼풀을 내려닫고, 옆에 있던 백설공주 한 권을 집어들었다. 방금까지 손에 들고 있던 그 책이었다.

 

  "읽어 봐."

 

  와타루는 군말 없이 동화책을 받아들었다. 이어 목소리가 부실 안에 울리기 시작했다. 히비키 와타루는 세상 그 어떤 것도 결코 어설프게 하지 않는다, 그 명제를 새삼 다시 느끼는 기분이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성량 풍부한 미성에 텍스트를 읽는 것이 아닌 상황을 그대로 전달하는 말투, 간간히 잘 듣고 있나요, 따위를 묻는 것까지 지나친 상냥함이 그녀의 귓가를 간질였다. 특유의 과장된 큰 소리도 없이 노래를 부르듯이 부드럽게 이야기의 다음장이 넘어갔다.

 

  "......왕자는 관에 누운 백설공주의 입술에 키스했습니다. 공주의 입에서 사과가 튀어 나오자 그녀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고, 둘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해피엔딩이군요, 끝! 해피엔딩이란 사람을 흐뭇하게, 또는 실망하게 만들고 지루함에 빠지게 하는 단어다. 와타루는 속으로 그 정의에 대해 매우 긍정하는 편이었다.
  슈아는 대답이 없었다.

 

  "......"
  "슈아?"

 

  저런, 그새 잠든 걸까요. 와타루가 작은 허밍을 덧붙였다.

 

  "아마 마지막 한 페이지가 더 남아 있을걸, 그 책."

 

  짧은 문장이 그의 옷깃을 붙잡는다.

 

  "영리한 아가씨, 슬쩍 넘어가려고 했는데 당신에게는 못 당하겠군요."
  "새왕비가 불에 달군 쇠구두를 신는 장면은 왜 생략하고 멋대로 끝내 버리는 거야?"
  "잔인하지 않나요? 저의 레이디가 접하기에는 꽤나 충격일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래봬도, 그건 고문이라고요?"
  "어른들이 그랬는데에, 악당은 벌을 받아야 정말로 이야기가 끝나는 거랬어."
  "이럴 때만 아직 어린 척 굴지 말아요."

 

  특별한 논리가 붙지 않은, 스스로에게 어울리지 않는 예쁘지 않은 대사로 억지로 대화를 길게 늘여 보인다. 와타루는 그에 기꺼이 응해 주었고, 조곤조곤하니 속삭이듯 나지막한 담소가 이어졌다. 어느 새 눈을 가늘게 뜬 슈아는 와타루의 긴 머리카락을 제 손가락에 감으며 장난을 쳤다.

  "왕자와 공주는 이미 행복하답니다, 슈아. 그 뒤의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통쾌함보다는 불쾌함을 선사할 뿐이에요."
  "하지만 그 장면이 없으면 너무 유치해질지도. 연출로 단조로운 스토리 라인을 보충해야 하는 건 인정하잖아. 최소 고등학생들이 관람할 거라고?"
  "그도 그렇군요...... 흐음, 그렇다면 당신에게 수수께끼라도 하나 내어 볼까요?"

  검지를 들어 제 코를 톡 건드리는 행동에 슈아가 그를 빤히 올려다 본다.

  "'백설공주'에서는 어떤 장면에 하이라이트를 줘야 유치하거나 지루하지 않을까요?"
  "쇠구두 신."
  "...... 쇠구두를 정말 좋아하는군요, 당신은? 유리구두나 꽃신도 아니고 말이에요. 틀렸답니다. 그것은 빼고, 다시 생각해 보세요."

  웃음을 터뜨리는 와타루와 다르게 한번 오답 처리를 받은 슈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미미하게, 하지만 제 약혼자가 충분히 눈치챌 수 있게.

  "힌트를 드려도 될까요?"

  그렇게 말한 히비키 와타루는 그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검지로 슈아의 입술을 살짝 눌렀다.

  "키스신."

  눌린 입술을 억지로 달싹거리며 하는 발음이 퍽도 어눌했다. 와타루는 여전히 능글맞은 미소만 지은 채 슈아를 내려다 본다. 곧 슈아에게 손목이 잡혀 떨어질 때까지 그랬다.

  "......토모야군이 질겁할 거야. 진심으로. 각본 받자마자 퇴부서 제출하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걸."
  "잠깐만요. 이런, 어째서 초점이 토모야군에게 맞춰져 있죠......? 당신의 피앙세가 다른 사람과 키스하겠다는데 토모야군이 중요한가요?"

  그에게서 서운하다는 눈치가 보였다. 슈아는 혀를 살짝 빼어물며 반문했다.

  "어차피 연기라는 걸 아는데, 왜 거기에 질투해주기 바라?"
  "연기라서요? 저, 히비키 와타루의 연기는 감쪽같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요, 슈아."
  "그래서 진심으로 하겠다는 거야?"
  "진심을 연기하는 것도 제게는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니지요."
  "......연기와 본심을 구분할 수만 있으면 오케이."
  "어쩌죠. 가끔씩 도취가 되어버릴 때는, 저는 그 둘을 잘 구분할 수가 없어요."
  "아, 정말......,"

  이래서 배우라는 사람들은 귀찮아. 보기 드물게 미간을 찡그린 슈아가 몸을 일으켰다. 널려 있는 책 한 권을 들어 책등으로 그의 등을 내리친다. 가벼운 탁음과 함께 와타루의 짧은 신음이 났다.

*

  ".....자꾸 귀찮게 굴지."
  "이런? 생각하는 것을 귀찮아 해서는 안 돼요, 레이디. 우리 인류에게서 그 알량한 사고력마저 배제시키면 무엇이 남나요!"
  "어차피 사람 속은 다 하얗고 빨간 것으로 가득해. 때로는 새까만 것도 말이야."
  "역시 바보같은 구석이 있어요, 나의 피앙세는 말이죠. 물론 그 구석은 제가 무척이나 귀여워하는 부분이랍니다."
  "히비키 와타루에게서 받는 귀여움 따위,"
  "엄청난 가치가 있지요!"

  그렇죠? 말을 가로챈 것도 모자라 빙그레한 미소가 그를 대신해 재차 묻는다. 그도 확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는지, 대신 슈아의 머리를 가볍게 받쳐 맨 무대 바닥 위에 내려놓는다. 딱딱한 나무 바닥의 차가운 질감이 뒤통수에 닿자 슈아가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와타루를 흘겼다. 그러면서도 특별히 몸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지, 와타루의 귓가에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바닥 딱딱해."
  "당신의 심장만큼이나요?"
  "말 돌리지 말고. 뭐 하는 거야."


  "그렇게 평서문으로 질문해 봤자 대답해 줄 기분은 전혀 들지 않는답니다. 말끝을 올려 보세요! '뭐 하는 거야?'"

  와타루의 가성은 여타 여자아이만큼이나, 상당히 높았다. 그리고 슈아의 것과도 닮아 있었다. 특히 퉁명스럽다거나, 미묘하게 느릿한 어투가. 난데없는 익숙함에 깜짝 놀란듯 슈아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그거 내 목소리? 이츠키도 아니고."
  "후후, 슈가 하는 것은 단순한 가성을 이용한 복화술이지요. 제가 방금 한 것은 성대모사랍니다. 놀랐나 보군요, 슈아!"

  와타루가 남편의 특기 정도는 알아 두라며 덧붙이고는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슈아는 그 대꾸로 미간을 찡그리며 눈을 감아 버렸다.

  "어라, 자는 건가요?"

  대꾸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자신의 잠든 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으나,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아무런 기척이 없자 슈아의 눈꺼풀이 살살 간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문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나간 것은 아닐 테고, 살며시 눈을 뜨려는 찰나 와타루의 외침이 머릿속까지 풍성하게 울려퍼졌다.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공주님일까! 그 누가 이 아름다움을 잠들게 해 버렸나요!"

  나쁜 새 왕비가 그녀에게 사과를 먹였어요. 사과가 공주님의 목에 걸린 거예요. 어느 새 나타난 초록 난쟁이가 그렇게 외치며 울먹인다. 백마에서 내린 왕자는 잠시 통탄한다. 그리고 유리관 안에 '죽은 듯 잠든' 백설공주를 무릎 꿇어 내려다 본다. 또한 잠든 듯 죽은 그녀에게 키스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그리고 왕자는 공주에게, 따라서 히비키 와타루는 시가라키 슈아에게 입을 맞추었다.

  *

  "......네크로필리아라는 단어 알아?"
  "백설공주님이 할 대사로 적절하지 못해요."
  "시체에게 성욕을 느끼는 성적 취향을 뜻하는데."
  "화 내지 말고요, 슈아."

  고저 없는 목소리의 의중은 제아무리 히비키 와타루라도 간파해내기 까다로웠다. 다만 진심으로 내는 화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혐오나 분노를 표출할 때의 그녀는 의외로 손이 먼저 올라가는 타입이니까. 와타루는 반들거리는 여자아이의 입술을 그의 엄지로 가볍게 훔쳐준다. 미안하다는 사람치고 퍽 해맑은 얼굴에 슈아가 느릿하게 손을 뻗어 와타루의 뺨을 꼬집었다.

  "아아...... 정말이지, 어차피 연기 따위인 키스에 당신이 왜 그렇게 토라지는지 모르겠군요. 알쏭달쏭하군요. 의문이에요."

  꼬집힌 뺨을 소녀마냥 양 손으로 감싼 와타루가 답지않게 작은 목소리로 항의한다.

  "미안해, 와타루. 연기치고는 너무 진심 같아서......"

  양 손으로 입을 가린다. 눈을 내려깔아서 수줍고 미안한 여자아이를 흉내낸다. 다만 성의 없는 발음은 입술 새에서 곧잘 뭉개져 버렸다. 길게 표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다시금 가늘게 눈을 뜬 슈아가 본 목소리를 내었다.

  "아, 토모야군에게는 좀더 서툴게 해 주도록 해. 왕자 주제에 너무 능숙해도 위화감이 드니까."

  와타루가 떨떠름하게 미소짓는다.

  "여전히 이 히비키 와타루의 스노우 화이트가 되어 줄 생각은 없고요?"
  "음......, 반드시 여자애가 필요하다면 다른 프로듀스과 아이에게 부탁해 보는 건? 그 히비키 와타루가 왕자님인 공주 역할이라면 누구든 탐내지 않겠어?"

  슈아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와타루는 바닥에 눌린 그녀의 뒷머리를 손으로 빗어 정돈해 주었다. 그는 굽슬굽슬한 굵은 웨이브가 진 검은 머리카락이 자신과는 전혀 다름을 새삼스레 느낀다고 생각했다.

  "아아, 잔인한 사람."

  웃음소리가 섞인 말에는 진중함이 없다. 적어도 시가라키 슈아에게는 그렇게 들렸고, 히비키 와타루도 그 명제를 인정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서로가 그러함을 안다.

  "......아무래도 말이지."
  "네? 뭐가, 말인가요?"
  "백설공주는 인형극으로 올리는 편이 나아."
  "네?"

  어질러진 책들을 무대 한켠에 정리해 두는 동안 나눈 대화였다.

  "그 편이 더 예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 이유인가요?"
  "어차피 연극부에서는 인형극도 종종 한다며. 상관 없잖아."
  "좀 더 솔직해져 봐요."
  "솔직은 무슨."
  "'연습 내내 네가 다른 사람과 입맞추는 걸 보면 정말 불쾌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라고는 말해 주지 않는 건가요?"

앵커 3

 

 

눈처럼 새하얀 피부, 장미꽃 같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 밤하늘 보다도 새까만 머리.

 

그녀는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다. 그녀의 미모에 걸맞게 모두가 '백설공주'라 불렀다.어떠한 번지르르한 말로도 그녀의 아름다움을 표현하지는 못할 것이다. 만약, 정말로 신이 존재하고, 인간들이 그의 피조물이라면..그녀는 그런 피조물들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일것이다. 아니, 그렇다. 감히 어떤 인간이 그녀의 아름다움 앞에서 무색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아름답더냐."

 

"눈 처럼 새하얀 피부, 장미꽃 같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 밤하늘 보다도 새까만 머리를 가진 성원, 백설공주 입니다. "

 

'아아, 그래..역시, 그렇겠지..맞아.' 가쿠호는 거울의 대답에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다. 정말 아름다워-.정말 아름답다니까.. 그는 그의 큰 손으로 자신의 앞머리칼을 쓸어넘겼다.

 

"오..그래,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워..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겠지. 하지만.."

 

그녀를 갖고싶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 사랑스러워, 아름다워. 하지만 그는 절대 그녀를 가질 수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매일매일 거울 앞에 서서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이 누구인지 묻고는 했다. 아니면 몰래, 멀찍히 서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그의 일상이었다. 갖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가쿠호에게 성원이란 그런 존재였다. 항상, 그는 고민해왔다. 가질 수 없는 존재를 굳이 내가 계속 사랑할 필요가 있는가?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가쿠호는 그녀를 너무나도 사랑했었고, 성원이 자신 이외의 다른 남자에게 안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단 하나, 그는 소름끼치는 미소를 띠우고서는 겉에 검은 망토를 걸치면서 성 밖으로 나갔다.

 

*

 

"아름다운 아가씨, 사과 하나 드시지 않겠어요?"

 

"이거 어째.. 정말 먹고는 싶지만 집안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해서요."

 

얼굴이 보이지 않게끔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이가 먹음직스럽게 윤을 내는 사과를 한 손으로 건네며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쉬운 듯한 모습으로 거절하였다. 거절하는 모습도 어찌 예쁜지, 휘어지는 눈꼬리, 탐스러운 붉은빛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아름다운 미소를 자아내었다. 순간 성원의 아찔한 미소에 가쿠호는 휘청했지만, 이내 다시 제 정신을 차리면서 사과가 매우 맛있다며 제발 베어먹어 달라고 사정했다. 그녀는 그의 유혹에 결국 넘어가버리고 말았으며, 사과를 한입 베어먹자 '아..'하는 신음소리를 엷게 내뱉고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져버렸다.

그는 그녀의 쓰러진 모습을 보고서는 씩 미소 지으며 유유히 성으로 돌아갔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죽여버리는 방법밖에 없잖아.

 

*

 

"아, 세상에. 이렇게 아름답다니."

 

백설공주, 성원은 죽었다. 독사과를 베어먹고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난쟁이들은 일을 마치고 돌아와 갑작스러운 그녀의 죽음과 마주하고 바닥에 주저앉아서 오열했다. 이럴수가, 이럴수가. 아침까지만 해도 웃으면서 배웅해줬는데.

그들은 죽어서도 아름다운 그녀를 유리관에 넣었다. 시체지만 창백하지 않은, 볼이 약간 붉으스름한것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녀는 죽어서도 아름다웠다. 그 누가 유리관 속에 곤히 누워있는 그녀가 죽었다고 할 수 있을까.

 

때는 어느날, 이웃나라의 왕자인 가쿠슈가 난쟁이들과 성원이 있는 길로 지나갈 때였다. 난쟁이들의 구슬피 우는 소리를 듣고 그 쪽으로 다가가자, 유리관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보자 넋을 잃고선 말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 수 있을까. 그는 난쟁이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서는 무릎을 꿇고 그녀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 처럼 새하얀 피부, 장미꽃 같이 붉고 탐스러운 입술, 밤하늘 보다도 새까만 머리.

죽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녀였다. 그녀의 미모는 분명히 죽어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쿠슈는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며, 밤하늘처럼 새까만 그녀의 머릿칼부터 시작해서 붉으스름한 볼을 몇 번 어루만졌다. 그 뒤로는 장미꽃처럼 붉고 탐스러운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다 자신의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좋을텐데, 그는 입을 맞추면서 간절히 빌었다.

 

이윽고 그는 입을 살며시 떼었다. 아, 아름다운 사람. 그대가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나 기쁠까. 그는 그녀의 손을 잡고서는 손등에도 살짝 입을 맞추었다.

 

"으음.."

 

그 순간이었다. 그가 성원에게 입을 맞추고 나서 얼마 뒤에, 그녀는 작게 신음을 내며 눈을 살며시 떴다. 마치 자다 깬 사람처럼. 기적이 일어난 것처럼. 그녀는 푹 자다 일어난 것처럼 기지개를 피며 하품을 했다.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떤 이는 놀란듯한 표정이었고 또, 어떤 이는 벙찐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그들은 백설공주가 깨어났다며 일제히 환호했다.

 

그녀는 일어나자마자 시선이 가쿠슈에게 향했고 순간 얼굴을 붉혔다. 그 또한 성원을 바라보다가 살짝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그녀의 손등에 다시금 입을 맞추었다. 그가 입을 떼자, 그녀도 미소를 지으며 양팔을 벌려 수줍게 그에게 안겼다.

난쟁이들은 계속해서 환호했고, 가쿠슈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계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를 가볍게 안아들고서는 자신의 말에 태우고서는 그의 성으로 향했다.

 

그렇게 백설공주 성원과 이웃나라 왕자 아사노 가쿠슈는 오래오래 잘 살았다는 행복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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