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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 무리는 하지 마렴.

  길을 잃어버릴 수 있으니까!

  그래,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자,

  어때 원하는 것은 찾았니?

 

 

 

+++

 

 

 

  바람이 불어오는 정원은 사락사락. 옷깃에 풀들이 스치는 소리로 가득했다. 그러다 곧 그 소리는 정원을 지키며 서있는 큰 나무 앞에서 멈추었다. 언제나 같은 시간에 나오는 소녀는 늘 그렇듯 책을 펼쳤다. 늘 읽던 책 이여서 그 내용을 전부 알고 있지만 소녀는 그 책 이상의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 말고 다른 책을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녀에게 그 책은 또 다른 새로운 세상과도 같았다.

  바람이 소녀의 머리를 자꾸만 흩트려 놓았기에, 소녀는 계속해서 오른손으로 머리를 뒤로 넘기어야만 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부네……. 라고 생각하며 머리를 넘기던 손을 내려놓고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 소녀의 시선이 닿는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은 아니었다. 연분홍색을 띠고 있는 ‘그것’의 정체는,

  “토끼?”

  책을 읽던 것도 덮은 채, 소녀는 제 시선을 끄는 토끼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토끼는 평소 그녀가 알던 토끼와는 느낌이 많이 달라보였다. 토끼는 두발로 서있었고, 손에는 시계를 들고 있었다. 토끼라면 네발로 다니지 않아? 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릴 때 쯤,

  “너! 뭐야!”

  “으응? 말을 하는구나? 안녕하세요, 토끼 씨!”

  말을 하는 것에 대한 궁금증은 금세 바람에 날려가듯 사라져버렸고 소녀는 토끼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토끼는 그렇게 작지는 않았지만, 사람인 소녀보다는 당연히 작았다. 소녀를 보는 토끼의 표정은 불편한 듯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뭘 그렇게 신기하게 보는 거야?! 토끼 처음 봐?!”

  “음……. 말하는 토끼는 처음 봐요! 그런데 토끼 씨는 어디 가는 중이었나요?”

  “그거야 당연히 황……. 앗,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잖아?! 너랑 말하다가 벌써 이렇게 되어버렸잖아! 어쩔 거야 인간!!!”

  날을 세운채로 말하는 토끼는 제 발을 땅에 탕탕! 치며 불평을 늘여놓았다. 늦게 가면 혼난단 말이야!!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야 유즈루지!! 아무튼 난 갈 거니까!”

  “앗, 토끼 씨 잠시 만요!”

  토끼가 사라진 길로 소녀도 함께 사라졌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평소와 같던 숲은 위화감이 잔뜩 느껴지기 시작했다. 눈에 보이던 나무와, 풀들도 그 모습이 점점 바뀌는 것 같았다. 토끼 씨는 어디로 갔을까요? 소녀는, 길을 모르는 소녀는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 갈 뿐이었다. 어느 정도 걸었을까? 소녀의 눈에 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으로 다가가니 그분을 엄청 커서 하늘 위로 계속 커지고 있는 듯 보였다.

  소녀는 그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일도 없어서 한 번 더 소녀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때 문이 열렸다.

  “넌, 누구지? 초대 받은 사람인가?”

  “초, 초대는 모르겠고 길을 잃었어요!”

  “하? …쓸데없이 당당한 자세군. 뭐 됐다. 또 길을 잘 못 들어 온 것 같으니 내 뒤를 지나가라. 대신 뒤를 돌아봐선 안 돼.”

  문의 뒤에 있는 사람은 이런 일이 익숙하기라도 한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동쪽으로 계속 걸어가라.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 뒤의 사람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소녀는 그 말을 그대로 믿어 앞으로 걸어 나갔다.

  “여기로 가면 되는 걸까요?”

  소녀는 자신을 믿으며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하지만 왜인지 길은 계속, 계속 이어져갔고 도저히 끝은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힘들다고 생각 할 때 쯤 그녀의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봐선 안 돼.’ 그 소리가 소녀의 귓가를 타고 흘러 내렸다. 하지만 뒤의 소리는 누군가 우는 소리와도 같았다.

  “…….”

  “흑, 흐흑……. 누귯 없어?”

  “…뭐, 괜찮을 거예요!”

  소녀는 그대로 뒤를 돌았다. 뒤에는 작은 토끼가 있었다. 여기에 오기 전에 봤던 토끼와는 다른 토끼인 것 같았다. 무슨 일인가요 귀여운 토끼 씨?

  “…이, 인간 이쟎앗!”

  “헤, 헤치지 않아요!!”

  “… 나……. 나, 친규들을 잃어버렸어. 그리고 길도 모루겠어…….”

  “음… 앞으로 계속 가면 되지 않을까요?!”

  토끼는 못 믿겠다는 표정을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기에, 소녀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토끼는 말하지 않았지만, 토끼는 넘어지기라도 한 듯 다쳐있었다. 소녀는 그런 토끼를 제 품에 앉았다.

  “호, 혼자서도 걸어갈슈있어!”

  “상처가 더 심해지면 안 되니까요♪”

 

  어느 정도 걸었을까, 안개가 서서히 걷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안개가 걷힌 앞에는 다른 토끼들이 있었다. 소녀의 품에 있던 토끼와 아는 사이 같아 보였다. 그도 그럴게 소녀의 품에 있던 토끼가 바로 그들에게로 달려 나갔으니까.

  “니ㅡ짱!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잖아요!”

  “미, 미안햇!! 안개 때문에 길을 잃어버려셧…….”

  “그래두 이렇게 다시 만나서 다행이라구~!!”

  “그런데 저 사람은...?”

  “…길을 잃었냣봐! 날 도와줬으니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음, 길을 잃으신 거라면 저쪽 길을 따라서 가보세요. 길을 안내 해주는 분이 계실 테니까요!”

  가만히 서있는 소녀를 향해서 토끼들은 그렇게 말했다. 소녀는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다시 길을 옮겼다. 이번엔 제대로 찾아 가야할 텐데! 소녀는 주위도 열심히 둘러보며 길을 걸어갔다. 소녀는 당연 여기가 무섭기도 했지만, 어딘가 포근하기도 해서 싫지만은 않았다.

  “갈림길… 어디로 가야하지? 음……. 어느 쪽… 으로 갈.. 까…….”

  “어라? 왜 이런 곳에 계시는 걸까요?”

  “네네네네네?!”

  소녀가 뒤를 돌아보자, 머리에는 모자를 쓴 남자가 서있었다. 소녀는 너무 놀라 딸꾹질이 나오는 듯 했다. 딸꾹. 딸꾹. 남자는 이내 소녀를 안심 시키듯 미소를 지어보았다.

  “너무 놀라게 해드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아아니요! 저야 말로 멋대로 와서 죄송해요!! 시계를 들고 있는 토끼를 따라 왔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곳이여서… 그게…….”

  “시계를 들고 있는 토끼..요? …뭐 아무튼 길, 잃으셨죠? 저를 따라오세요.”

  소녀는 남자의 말을 따라 그를 따라갔다. 그를 따라간 곳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다. 그 정원은 마치 소녀 집의 정원과도 모습이 비슷해 보였다. 길잡이님께서는 지금 자리를 비우신 것 같으니 여기서 잠시 기다리도록 할까요?

  “그래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소녀는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서는 향긋한 홍차 냄새가 나는 듯 했다. 차가 있지도 않건 만 냄새가 은은하게 퍼져 나왔다. 그 냄새가 포근하고, 부드럽게 느껴져 소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아마 지금까지 걸어오느라 많이 지쳐 있는 듯 했다.

  “어라, 역시 잠 드셨네요…♪”

  “유즈루우~~~~”

  “또, 늦으셨네요, 도련님?”

  유즈루. 라고 불린 남자의 시선이 닿는 곳엔 분홍색 머리를 한 키 작은 소년이 시계를 들고 서 있었다.

  “아, 아니! 오, 오늘 유난히 안개가 깊어서 그래!!”

  “뭐, 상관없어요. 시간이 넉넉하니까요. 사실 그 시계 평소 시간보다 더 빠르게 흐르게 해뒀거든요♪”

  “뭐, 뭐?!”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련님은 또 지각 하실 테니까요.”

  유즈루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년은 잔뜩 화를 내며 바닥을 탕탕! 쳤다. 소년은 불만이 많아 보였다. 급하게 오느라 넘어 질 뻔 했다느니, 이상한 곳에 떨어졌다느니, 여기서 더 작아질 뻔도 했고!! 또 커지기도 했어!

  “네네, 많은 일이 있으셨네요♪”

  “마음에 안 들어 그 반응… 그것보다… 어떻게 할 거야?”

  “어쩌긴요. 다시 밖으로 돌려보내 드려야죠. 전혀 다른 세상이잖아요?”

  “…뭐, 그렇지. 으아아! 아무튼 저 시계만 아니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

  “하아,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좀 더 ‘하나’랑 제대로 이야기 하고 싶었다구!”

  “그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랍니다. 아무튼 이젠 진짜 헤어져야할 시간이네요. 그래도 약속대로 다시 만났잖아요?”

 

 

 

 

+++

 

 

 

  “…? 어, 나 잠들었었구나!”

  “후후, 깨셨나요? 이제 나가시면 된답니다. 제가 길 안내를 해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소녀는 그대로 길을 따라 걸어 나갔다. 길이 가까워질수록 위화감이 감돌던 풍경 등은 이내 소녀에게 익숙한 모습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이제 정말로 끝에 다가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소녀의 앞에는 문이 나왔다.

  “이제 여기로 나가시면 된답니다.”

  “감사해요!”

  “…저기, 이름을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이름이요?”

  하나! 꽃의 그 하나(花)예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부디 다시 또 만날 수 있기를.

  두 사람 사이의 문은 그렇게 다시 닫혀 버리고 말았다. 이 둘의 사이엔 아마 더 오래된 이야기가 있을 것이었다.

엘레니아

 

 

  길치는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보기에도 길치에 가까운 소녀가 어스름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어스름 속이었답니다. 한치 앞 정도야 보이지만 그 이외의 것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는 그런 암흑을 소녀는 걷고, 걷고 또 걸었습니다. 요 근래 제 공간인지능력이 말도 안 될 만큼 쇠퇴하고 있단 걸 인지했으면서도 구태여 고쳐볼 의향은 없었거든요. 왜냐하면, 발 닿는 곳은 모두 즐거웠으니까.

 

  소녀는 그 헤맴 속에서 가끔 시간을 거스르기도 하고, 있을 리 없는 환상의 세계에 다녀오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만나기도 했답니다. 늘 용케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 이상 나돌아다녔다간 정말로 위험에 빠질지 모른다 경고하는 현실을 뒤로 한 채 오늘도 소녀는 기약없이 어둠을 헤맸습니다.

 

  한참을 걸었을까요. 어두컴컴하기만 하던 공간의 끝에 빛이 드리우기 시작했습니다. 하얀 빛, 아니……, 금빛이었습니다. 이제껏 보아왔던 그 어떤 빛깔보다도 선명하고 맑았지요. 그리고 오늘 그녀가 도달하게 될 곳은 아무래도 저 틈새인 것 같았기에, 그녀는 망설임없이 달려나갔습니다.

 

 

 

 

 

 

 

*        *        *        *        *

 

 

 

 

 

 

 

  우와아. 소녀는 마음 속 깊이 감탄했습니다.

 

  그 시야엔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배경으로, 건물 하나가 우뚝 서 있었습니다. 건물이라 지칭하기엔 퍽 원시적이면서도 고상하고 위엄 있었지요. 그것의 외벽은 모조리 황금이었거든요. 도대체 누구의 취향인지. 하여간 끊임없이 몰아치는 모래 바람 속에서도 그 위용을 뽐내며 위풍당당한……, 그래요. 건물. 그냥 건물이라고 말하는 편이 좋을 것 같네요. 여튼, 그런 건물이었습니다.

 

  소녀는 그 건물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인기척도 없고 어쩐지 조금 스산하기까지 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아무 것도 보지 않고 돌아가기엔 아쉬웠거든요.

 

  구두 굽이 자꾸만 모래 사이로 끌려들어가 허우적대긴 했지만 결국 그녀는 그 건물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멈추어 서 바람에 마구 흩날리는 바람에 주름진 치마를 팡팡 펴내고, 구두에 들어간 모래도 툭툭 털어냈지요. 누군지는 알 수 없지만 건물의 주인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라는 나름대로의 예의였답니다. 수많은 계단을 올라가는 걸음걸이도 그 때문인지 제법 조신했습니다.

 

  하지만 그 계단의 끄트머리엔, 소녀가 기대했던 문은 없었습니다. 노크 같은 건 할 수 없었지요. 대신 발돋움 해 슬쩍 안을 들여다보면 그 내부도 대개 황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아마 주인은 이런 것을 만들어 두고도 보안엔 그 어떤 신경도 쓰지 않는 모양이었습니다. 아니면, 그 누구도 손대지 못할 거라 자만이라도 한 걸까요? 조금 어이없는 기분까지 느끼며 소녀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더 기가 찬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잘 정돈된 창고, 혹은 보물고. 그렇게 밖엔 부를 수 없는 공간엔 말 그대로 보물이 가득했습니다. 금은보화에 국한되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재보를 끌어모아둔 듯 광활했지요. 도저히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였답니다. 문명의 발달은 이미 까마득한 시대부터 이루어졌고 그래서 그 이기들을 누리는 것에 익숙해져 있던 시대의 소녀에게도 벅차고, 무서우리만큼 진보된 것들이 놓여진 것을 보고서는 급기야 까무러칠 뻔 했지 뭔가요. 하지만 비명은 지를 수 없었습니다. 어쩐지 경건함까지 맴도는 이 공간에서는 그것이 불경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 와중에도 소녀는 가장 눈에 띄는 하나의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왕좌처럼 보이기도 하고, 금방이라도 항해할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기묘한……, 황금 범선. 차근차근 다가서면 순식간에 제 시야를 잠식해 다른 것을 바라볼 여유 따위는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손을, 뻗어보아도 될까요?

 

  “손을 대면 죽이겠다.”

 

  일순 소녀는 등골이 오싹했답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 보물의 주인─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의 목소리엔 제 손길이 그 어떤 재보에도 닿기 전에 강제로 멈춰세우는 힘이 있었습니다. 놀란 눈동자로 돌아보면 그곳에는 이 보물창고, 무엇보다 찬란한 것이 가득한 세상에서도 가장 빛나는 사내가 서 있었답니다. 갑자기 나타났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지켜보았고, 그리고 때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소녀는 직감했습니다.

 

  사내는 차분히 소녀의 코 앞까지 다가왔습니다. 팔짱을 끼고 있는 모습은 그의 완고함을 형상화해둔 것만 같아서 소녀는 함부로 입을 열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일단 저 사람이 이 곳의 주인이라면 저는 거주지 무단 침입으로 고소당한다 해도 정말 할 말이 없었거든요. 함부로 가져다 댈 뻔한 손을 품에 모아 안고, 단지 사내의 선고를 기다릴 뿐.

 

  그런데 그가 돌연 미간을 찌푸렸습니다. 소녀를 내려다 보는 시선은 더욱 매서워져만 갔기에, 소녀는 어깨를 움찔거렸지요. 이어지는 말은 그녀를 가책하고 있었습니다.

 

  “네 놈, 어찌 감히 오만불손히 왕과 시선을 마주하느냐?”

 

  ……네, 그는 스스로를 왕이라 지칭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놀라움을 표하거나 황급히 무릎 꿇어 경의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첫째로, 이미 소녀는 많은 세계를 접하며 이런 저런 존재들을 만나 보았으며 그중엔 당연하게도 먼 옛날의 왕이나 황제 같은 존재도 있었답니다. 그랬기에 놀랄 필요는 없었지요. 둘째, 왕이라고 해도 결국 그들은 모두 한정된 시간과 한정된 공간을 다스렸던 존재일 뿐입니다. 다른 시공간에서 온 소녀가 그들에게 예를 갖추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없었습니다만…….

 

  방금 무언가, 그녀의 볼 언저리를 스쳐 지나가지 않았나요?

 

  사내는 소녀가 제 뺨을 더듬는 것을 고요히 바라보았습니다. 그녀의 손가락 끝엔 피가 묻어났고, 소녀가 아연한 얼굴이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습니다.

 

  그 피는 얕은 상처에서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볼 수 없겠지만 사내에게는 그 얼굴에 새겨진 가는 상처가 선명했답니다. 그야, 그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었으니까요. 그가 가진 재보로 하여금.

 

  “이게, 무슨……?”

 

  사실 그렇게 아픈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따끔거리는 정도였거든요. 그래서 소녀는 제가 말을 더듬은 이유는 분명 심리적인 이유에서 기인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틀린 짐작은 아니었지요.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저를 상처입힌 사내에 대한 공포도 있을 것이었고, 난생 처음 겪는 당혹스러운 상황에 대한 인지부조화 같은 것도 있을 테고……, 또는, 자기가 저지른 것이 분명한 주제에 소녀와 엇비슷하게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 때문이기도 할 테니까요.

 

  “……네 놈, 살아 있는 존재였느냐?”

 

  소녀는 제 아주 기초적인 존재 증명부터 해야 할 것만 같은 상황에서 문득 울고 싶어졌습니다.

 

 

 

 

 

 

 

*        *        *        *        *

 

 

 

 

 

 

 

  사내는 여전히 온 몸으로 그녀에게 불경스럽다 외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녀의 이야기를 끊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소녀는 무사히 제가 벌써 스무 해도 넘게 무탈하게 살아온 많고 많은 인간들 중 하나일 뿐이며, 그저 가끔 길을 잃을 때마다 이상한 세계에 휘말리곤 한다는 사실을 방해받지 않고 털어놓을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소녀의 말이 끝나면, 사내는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붙잡아 왔습니다. 으븝. 웃긴 소리가 났지만 별로 신경쓰는 기색은 아니었습니다. 소녀는 당혹스러웠지만요. 그리고 제 손으로 소녀의 고개를 홱 꺾어가며 그 면면을 찬찬히 바라보았습니다. 무언가를 찾는 듯이. 하지만 그 손길은 곧 느슨해졌습니다.

 

  “어느 겁 없는 원혼이 떠돌다 발을 들였다고 생각했건만……, 망자조차 아니었다고?”

 

  사내는 이런 불가사의같은 것은 난생 처음 겪어본다는 듯 소녀의 턱을 놓고, 노여움이 제법 사그라든 얼굴이 되었습니다. 소녀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두어 걸음을 더 물러섰지요. 눈이 부실 만큼 찬란한 황금 갑주를 직시하고 있다간 이대로 시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내가 알았다면 불호령을 내렸을 의구심과 함께요. 하지만 사내는 그것에도 괘념치 않아 했습니다. 그저 하려던 말을 할 뿐이었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살아 있는 잡종도, 이미 죽어 명계를 헤매는 잡종도 이 황금향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내를 보며 소녀는 불퉁히 생각했답니다. ‘간단하네요. 그럼 제가 잡종이 아닌 거겠죠.’ 하지만 어째서인지 직감이 그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어선 안 된다고 강하게 저를 붙들어 맸기 때문에, 다만 입술 속에서 속삭일 뿐이었지요.

 

  좌우간, 사내는 고심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처음엔 자신과 시선을 마주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길길이 날뛰며 저를 죽이려 들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모습이었지요. 소녀는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이내 흠, 흐흠, 큼, 어딜 보아도 인위적인 헛기침을 뱉어내며 사내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잡종?”

 

  또 잡종이래. 불쑥 욱 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소녀는 참아보기로 했습니다. 사실 그 행동 이외엔 택할 수 있는 지문도 없었구요.

 

  “저, 살아 있는 자도 죽은 자도 오지 못한다고 하셨잖아요. 그으, 그러니까……, 저기.”

 

  “……영웅왕.”

 

  “네에, 맞아요. 왕님. 그럼 영웅왕님께서는 어떻게 여기 계신 거예요?”

 

  사내는 별 한심한 질문을 다 듣겠다는 표정을 지음으로써 소녀가 기껏 끌어온 용기를 꺾어놓았습니다. 주인이 사유지에 있는 데에 이유가 필요하느냐. 그리고 소녀는 스스로의 멍청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질문을 꺼내기 전으로 돌아가서 입을 봉해버리고 싶을 정도로.

 

  불행 중 다행이었던 것은, 소녀에게서 눈에 띄는 불손한 기질이나 또는 이 황금향을 향한 사리사욕은 찾아낼 수 없었던 사내가 다시금 위협을 가할 의욕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던가요. 지금껏 지켜본 결과, 영령이니 영령의 좌니 하는 이야기는 소녀에게 별세계의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내는 훌쩍 몸을 돌렸습니다.

 

  “허락없이 발을 들인 것은 특별히 용서하마. 허나 이 이상의 배려를 바라지는 말거라.”

 

  그것은 돌아가라는 의미를 가진, 가장 확고한 선언이었습니다. 황금빛으로 바스러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소녀는 문득 제가 와서는 안 될 곳에 와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귀로를 서둘렀습니다. 이제껏 많은 이들이 건네었던 경고가 옳았음을 깨닫는 것과 함께.

 

 

 

 

 

 

 

*        *        *        *        *

 

 

 

 

 

 

 

  ……였을 텐데.

 

  관자놀이 언저리가 쨍하게 울리고 있었습니다. 손 끝으로 꾸욱 누르며 미간을 찌푸리지만 고통과 이명은 여전했답니다.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고통이었으니 물론 사라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요.

 

  소녀는 다시금 눈 앞에 펼쳐진 넓디 넓은 황금향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습니다. 이제는 취미가 되어버린 만유 속에서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인데, 그녀는 어느새 이곳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지만 나가는 길은 그 짧은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지요. 그건 정말 순식간이었답니다. 결국 소녀는 암담한 얼굴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 결연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들키기 전에만 나가면 되는 것 아니겠어요?

 

  “어떤 무례한 잡종 놈인가 했더니……, 또 네 놈이었느냐?”

 

  다짐하자마자 들켜버리긴 했지만요.

 

  그녀는 비명과 돌아섰습니다. 그곳엔 비딱하게 다리를 짚고 팔짱을 낀, 그때와는 달리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 사내가 서 있었답니다.

 

  “오, 오고 싶어서 온 건 아니에요!”

 

  숨 쉴 틈도 없이 내지르면 사내는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 것쯤은 표정만 봐도 알겠구나. 그 나름대로는 상냥한 대답이 돌아와, 소녀는 의아하긴 했지만 일단은 안도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사내에게 출구의 여부를 물었지요. 말마따나 이곳은 사내의 영역이니 이미 사라져버린 출구가 아니더라도, 사내라면 나가는 길을 알고 있을 테니까요.

 

  “그, 출구가 갑자기 사라져서……, 혹시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왕님은 알고 계시나요?”

 

  사내는 즉답했습니다.

 

  “모른다.”

 

  “네?”

 

  소녀가 저도 모르게 비명처럼 되묻지만 그는 번복하는 일 없이 같은 대답을 해올 뿐이었지요. 모른다고 했다만. 참으로 간결한 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습게도, 실제로 사내는 나가는 길을 몰랐답니다. 이곳은 제 자신에게 속한 장소이긴 하지만 그의 영토라고 부르기엔 어폐가 있었습니다. 사내는 이곳에 머물며 많은 것을 보고, 잡아채고, 재정하지만 이 너머로 나가는 것은 누군가의 부름이 있어야만 가능했으니까요.

 

  그렇지만 소녀의 황망한 얼굴을 보게 된 사내는 어느 정도 부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답지 않게도요.

 

  “애시당초 이 영역을 넘어든 건 네 놈이 처음이다. 나가는 길도 네가 알고 있어야 도리이지 않느냐?”

 

  어차피 부언하지 않느니만 못한 말이었긴 합니다만. 그 말에 얼굴을 찌푸린 소녀가 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걸까요, 사내에게 묻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에게 묻는 건지 모를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말을 건네면 사내는 문득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습니다. 성큼 걷는 걸음걸이는 보폭이 무척이나 넓어 두 사람의 거리를 쉽게 벌려놓았지요.

 

  사내는 또 어디에 가버리는 걸까요, 고민하는 순간 사내가 소녀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오거라.”

 

  어느 정도는 상냥한 것 같기도 하고, 어느 정도는 쌀쌀맞은 것 같기도 한 목소리였습니다. 어째서 사내는 제게 따라오라 말한 걸까요. 혹시 이 사막 어딘가에 저를 묻어버리려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그런 걱정 때문에 따라가지 않을 수도 없었습니다. 어차피 가만히 서 있어봤자, 객사 이외에는 제게 찾아올 손님이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벌써 한참 앞서가는 사내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가면 그곳은 먼젓번 방문했던 보물고와는 전혀 다른 장소였답니다. 현대의 단어로는 마땅히 치환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대강의 느낌만을 표현한다면 궁궐 같기도 했고 휴양지 같기도 했고, 뭉뚱그려 낙원 같기도 했습니다. 지칭을 망설이는 소녀의 심정을 엿보기라도 한 듯 사내는 나지막하게 황금향이라 부르거라, 그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소녀에게 있어 그곳은 그때부터 황금향이 되었습니다.

 

  사내는 황금향에서 감히 객사하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그녀를 가장 안전한 곳까지 데려왔습니다. 듣는 순간 헛웃음이 쿡 하고 튀어나올 뻔한 아량이었기에, 가까스로 웃음을 참아낸 소녀는 스스로를 대견하게 여겼습니다. 아마 웃었다면 이미 주었던 호의도 사내는 도로 거두어갔을 테니까요.

 

  그렇게 어색한 시간을 흘려보내고 나면, 첫 날 그러했던 것처럼 출구가 나타났습니다. 사내는 두 말 할 것 없이 즉각 소녀를 내쫓았답니다. 배웅이나 작별 인사 같은 것은 없었지만 사내에게서 그런 걸 바란다면 어쩐지 너무나 큰 불경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소녀도 아무런 불평 불만 없이 그 명령에 따랐을 뿐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며칠 뒤, 잠시 한 눈을 팔다 또 황금향에 발을 들이게 되었을 땐 소녀도 어이없어질 수 밖엔 없었습니다. 이제껏 한 번 다녀왔던 곳에는 두 번 다시 갈 수 없었는데, 어째서 이곳에는 몇 번이고 도달하게 되는 걸까요. 시야를 가리는 모래 바람에 눈을 감고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면 또 네 놈이냐, 이젠 체념에 가까운 목소리가 그녀의 곁에서 말을 걸어왔습니다. 소녀는 문득 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방금까지도 바로 곁에 있었던 출구가 다시금 사라졌다는 사실을,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었거든요.

 

  소녀는 이 황금향을 방문한 첫 번째, 그리고 두 번째, 또한 세 번째 손님이 되었습니다. 아마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그녀가 되겠지요. 그 이후에도 이어질 이 만남은 불보듯 뻔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눈을 뜨면 바로 앞엔 사내가 있었습니다. 새삼스럽지만 소녀는 인사를 건네보기로 했습니다. 안녕하세요, 또 뵙네요. 왕님.

 

  사내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하지만 소녀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어서 오라는 말은 바라지도 않았거든요. 대신 말없이 등을 돌려 걸어가는 사내의 뒤를 소녀는 따라 걸어갔습니다. 이 정도는 구태여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요.

 

 

 

 

 

 

 

*        *        *        *        *

 

 

 

 

 

 

 

  어느날, 소녀는 넓디 넓은 황금향 어딘가에서 서고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했답니다. 세월 같은 것은 쉽게 무시하는 땅임을 알고 있는 소녀가 놀랄 정도로, 그곳은 조금 낡아보이는 책장을 제외한다면 퍽 현대적인 양상을 띠고 있었습니다. 마치 어떤 것의 손길이 닿아 정돈해둔 듯이 말이에요. 설마, 왕님이 설치해두신 것은 아니겠지. 내심 단정지은 소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서보기로 했습니다.

 

  이리저리 기웃대다 한 권을 꺼내들면 마모된 것 하나 없는 새 책에는 기이하게도 제목이 없었습니다. 의아함에 휘리릭 펼쳐 훑어보던 소녀는 더욱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건, 무어라고 해야 할까요. 제본되어 있으니 분명 책이지만 책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간결했거든요. 사내가 제 취향대로 모아둔 소설인가 짐작했던 것은 어느새 기억 속 아득한 곳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그것은 기록이었습니다. 가장 냉철한 관찰자의 시점에서 내려다 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일말의 사견도 해석의 여지조차 없이 다만 기술되어 있을 뿐이었지요. 문단과 문단 사이를 짚으면 그 서늘함이 손 끝에 묻어나올 것만 같았습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종이 위를 쓸어내리면서 소녀는 머쓱한 얼굴을 해야만 했지요.

 

  “또 멋대로 돌아다니고 있군.”

 

  그녀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습니다. 삐걱대는 고개를 돌리면, 기분 나쁜 기색보단 체념에 가까운 감정으로 얼굴을 물들인 사내가 비뚜름히 서 있었습니다. 그래도 위압감은 여전했지만요. 황급히 책을 본래 있던 자리에 꽂아놓으려다 장렬히 실패한 소녀는 그냥 품 안에 그것을 끌어안아 버렸습니다.

 

  “신기한 게 많으니까요……?”

 

  급조한 변명이었지만 사내는 납득한 듯 고갤 끄덕였습니다. 몇 날 며칠이 지나더라도 다 둘러볼 수 없는 이곳엔 소녀에게 있어 신기한 것들 투성이었으니까요. 얄궂게 구는 일이 잦지만, 이러니 저러니 해도 미욱한 여식에게 그 정도의 아량은 보여줄 수 있는 사내였습니다. 소녀가 품에 끌어 안은 책을 일견한 사내는 말했습니다.

 

  “그건 기록이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 책을 제 손으로 넘겨 받아왔지요. 그의 손 안에서 저절로 넘겨지는 페이지가 마치 마법처럼 보였습니다. 스륵 훑어보던 사내는 손을 기울여 다시금 책을 덮곤, 본래 있었던 자리에 두었습니다. 군더더기라고는 없는 실로 주인다운 행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제서야 이곳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영령의 좌. 사후의 사내가 몇 번이고 부름에 답해 세계를 관조하고 돌아오는 곳. 이 책들은 모두 그 관망의 기술에 불과하며 사내는 소녀보다도 더 많은 곳, 그리고 보다 많은 것을 보고 돌아왔다 말했지요. 삽시간에 너무 낯선 이야기를 잔뜩 들어버린 소녀는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어렵네요,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녀가 그렇게 중얼거리면 사내는 피식 웃었습니다. 그런 대답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물론 영령이라는 개념은 소녀에게 있어 어려웠지만, 그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아니었습니다. 잠시 오늘 하루 들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정리하던 소녀는 그가 들려준 이야기를 짧게 요약해 보았습니다.

 

  “그럼……, 이곳에서 세상을 보고 계신 거네요.”

 

  아무리 수 천 수 백의 재보를 지녔다고 한들, 누구와도 만날 수 없고 손 닿을 수 없는 영령의 좌에서의 일상은 썩 재미 있는 생활은 아닐 거라고 소녀는 막연히 생각했었지만 지금은 그 생각을 철회해야 했습니다. 사내는 그녀의 가늠보다도 훨씬 더 무지막지한 왕님이었거든요. 어떤 한 세상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가능성을 보는 존재라니……, 어쩐지 제 어깨가 덩달아 무거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이곳은, 말하자면 인리의 끝. 인간의 힘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치천의 땅. 언제인가 찾아올 재정의 날을 위해 사내가 머무는 왕좌. 노발대발하는 기색을 띠는 일이 잦았던 저 붉은 눈동자로 사내는 소녀가 짐작도 할 수 없이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겠지요.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전히 평온한 얼굴은 수 십 세기를 거슬러 올라, 사내가 다스렸던 황야를 향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사랑하고 어여삐 여겼던 대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담긴 깊은 애정을 보는 순간 소녀는 어느샌가 그 미궁 같은 속내를 이해하고 싶어지고 만 것입니다. 문명의 토대가 되었고 그 이후에도 변함없이 제 사명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그의 성정은 분명히 매력적인 것이었으니까요.

 

 

 

 

 

 

 

*        *        *        *        *

 

 

 

 

 

 

 

  그래서 소녀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저도 데려가 주세요.

 

 

 

 

 

 

 

*        *        *        *        *

 

 

 

 

 

 

 

  어느 날엔가, 어떤 시공에서 사내를 부르고 있었거든요. 아마 사내가 그 이후 입이 닳고 닳도록 말했던 성배 전쟁이라는 것이 시작되는 모양이었습니다. 사내는 광활한 서고의 한 켠에 또 다른 이야기를 새겨넣기 위해 출전을 준비했고, 소녀에게는 이것으로 작별이라는 짤막한 인사를 건네었지요.

 

  “없는 문턱도 닳을 만큼 드나들었으니 이젠 알아서 돌아가거라.”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세 번이나 말하게 하진 않으실 거죠?”

 

  언제 배워 버릇한 뻔뻔함인지. 늘 걸치고 있던 새하얀 옷자락 대신, 소녀가 처음 이 공간에 찾아왔을 때처럼 황금빛 갑주를 걸쳐 입던 사내는 눈동자만을 굴려 웃고 있는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순순히 물러설 것 같지는 않아 보이는 웃는 낯이었습니다. 웃는 얼굴 너머엔 결연함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기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다 앞머리칼을 쓸어올리며 물었습니다. 죽고 싶어진 게냐? 하지만 소녀는 또 간단히 대답해오는 것이었습니다. 전 한시도 빠짐없이 왕님 곁에만 있을 건데 죽을 일이 뭐가 있겠어요. 무심하리만큼 맹목적인 신뢰였습니다. 그건 분명 난생 처음 느꼈던 경외심 탓이겠지, 사내는 어렵지 않게 그 신뢰의 기반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두 어 걸음 너머에서 소녀가 손을 내밀었습니다.

 

  단지 헤매기만 하던 제 삶에 새겨진 지표로서, 당신을 담고 싶어요. 제법 낯부끄러운 이야기를 눈동자 너머로 건네오는 소녀. 그간 몇 번이고 마주쳤던 시선이지만 그녀의 눈동자 색을 이토록 선명히 깨닫게 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쓸모없는 상념이라고, 사내는 떨쳐내려 하지만 소녀는 여전히 제게 손을 뻗고 있었습니다. 한숨. 다시 한 번 한숨.

 

  그리고 다음 순간, 그녀는 사내의 코 앞에서 그 붉은 눈동자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붙잡힌 팔목이 어느샌가 끌어당겨져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네 놈이 고른 길이다.

 

  후회하지 않겠느냐고 사내는 물었습니다.

 

  네, 제가 고른 길이에요.

 

  후회하지 않는다고 소녀는 대답했습니다.

 

  낯선 곳에 떨어지는 것은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내가 머무는 영령의 좌에까지 도달했던 제 발걸음을 고작 낯설고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멈추기엔 마땅치 않았을 뿐더러, 지금 이 품에 와닿는 온기가 무엇보다도 가장 큰 버팀목이었기 때문이겠지요. 종국엔 즐겁다는 듯 웃는 목소리와 더욱 강하게 끌어 안아오는 이 팔이 있다면 또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녀는 마주 웃으며 이 다음 찾아올 세상에 기대를 품었습니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요.

 

 

  이것은 아주 먼 옛날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느 따스한 봄날, 한적한 공원의 나무그늘 아래 앉아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던 한 소녀가, 초록색의 정장을 차려입고 시계를 보면서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가고 있는 흰토끼를 본 것으로부터 이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어라, 토끼가 정장을 쫙 빼어 입었네. 시계를 보면서 어디론가 급하게 뛰어가고 있어. 그것도 두 발로."

 

 

  언제부터인가 현실과 망상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게 된 듯한 소녀가, 그 토끼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기까지는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어? 토끼가?"

 

 

  참으로 이상하지. 보통 사람 같았으면 1초도 안 돼서 알아차렸을 것을, 마치 이런 광경에 익숙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게 그 토끼가 가는 쪽으로 고개만 돌리고 있었을 뿐이었으니 말이었다.

 

 

  "신기해! 이상해!"

 

 

  소녀는 그제야 앉아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금 전의 그 토끼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손에 쥐고 평생을 놓지 않을 것만 같이 소중하게 다루던 휴대폰은 이미 그녀의 손을 떠나버린지 오래.

 

 

  다행히도 토끼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다만 평소 체력이 그리 좋지 않았던 소녀였기에, 따라잡기까지는 꽤나 많은 힘에 부쳤다. 한 걸음만 더 가까이하면 잡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손을 쭉 뻗으니, 그 아래는 이미 뻥 뚫린 구덩이였다.

 

 

  소녀의 금빛 머리칼이 하늘 위로 휘날렸다. 분홍색의 원피스가 무언의 낙하산 역할이라도 해주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럴 새도 없이 계속해서 아래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죽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생각하기까지 또 소녀에게는 약 1분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야, 살려줘~!"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푹신한 마시멜로 같은 바닥 위에 떨어져 두 번 정도를 위로 튀어 올랐다가 마지막으로 가볍게 안착했다.

 

 

  "후아, 끔찍한 순간이었어."

 

 

  이마의 땀을 닦는 시늉을 하며 말했지만, 사실 끔찍하다고 느낀 것은 1분도 채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소녀가 구덩이에서 떨어진 시간은 고작 1분 30초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었다. 다만 소녀에게는 함께 대화해줄 친구도, 게임을 할 휴대폰도 없었기에 길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을 테다.

 

 

  이제 슬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땅을 받치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 왜 왔더라? 평소에도 약간의 건망증 같은 게 있었던 소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앉은 자리에서 손을 받치기만 한 채 일어나지 않고 있던 그 소녀가 신경 쓰이던 사람이 당연히 있었을 테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기, 괜찮으심까……?"

 

  큰 키에 앳돼 보이는 얼굴을 한 남자가 소녀에게 다가와서는 손을 내밀어 주었다.

 

 

  "아, 네. 일단은 괜찮은 것 같은데… 여기는 어디인가요?"

  "여기요? 우음,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하지……."

 

 

  남자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던 사이,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난 소녀가 또 무언가를 떠올린 듯 무릎을 탁 치며 소리쳤다.

 

 

  "어, 토끼! 토끼 아니에요?"

  "네? 어……."

 

 

  그러고 보니 그랬다. 남자의 옷차림은 방금 전 공원에서 보았던 토끼가 입고 있었던 정장과 디자인 및 색이 아주 일치했고, 머리 위에 쓰고 있던 모자에는 앙증맞은 토끼 귀 장식이 달려있었을뿐더러, 소녀의 손을 잡고 있던 반대쪽 손에 시계 역시 들려져 있었다.

 

 

  "에, 저를 어디서 보셨는진 모르겠지만… 일단 토끼는 맞슴다. 이건 제 인간화 모습이에요."

 

 

  인간화, 그렇구나. 소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잘생겼다."

  "엣? 저어, 그렇게 빤히 쳐다보시면서 말씀하시면 제가 좀 부끄러운데……."

  "앗. 그, 그래요? 미안해요!"

 

 

  그렇지만 진짜로 잘생겼어.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보는 느낌이야. 저렇게 잘생기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 걱정 전혀 없겠지. 아니, 하지만 지금은 이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다른 물어볼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었다. 일단 뭐부터 물어보지? 소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손가락을 하나둘씩 접어갔다. 남자는 그런 소녀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를 몇 번, 또 시계를 보기를 몇 번 더 반복했다.

 

 

  "그래서, 일단 여기는 어디인가요?"

  "어디라고 물어보셔도… 음, 우울한 나라이려나요."

  "우울한 나라?"

  "네. 이곳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은 전부 우울함 투성이에요. 저도 그렇구요."

  "그렇게 잘생긴 얼굴을 하고도 우울해요?"

  "생긴 거랑, 우울함을 느끼는 건 별로 관계가 없다고 생각함다만……."

  "그, 그런가. 아, 아까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고 있었던 거예요?"

  "엣, 다 보셨슴까? 저… 사실 크게 급한 일은 없었고, 그냥 눈에 띄지 않으려고여……."

  "그게 오히려 더 눈에 띄던데요."

  "그, 그랬슴까……? 하아, 우울하다. 죽고 싶어……."

  "자, 잠시만요! 죽고 싶다는 말 그렇게 쉽게 해요?"

  이 광경은 꽤나 익숙했다. 마치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누군가를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그저 넘어갈 뿐이었다.

  "뭐, 이 나라 사람들의 말버릇이기도 하죠. 그래도 죽고 싶다는 말은 저만 하는 것 같아서… 왠지 뿌듯……♪"

  "그런 걸로 뿌듯해하지 마요."

  우울한 나라라더니, 이상한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로 무척이나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왜 진작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본인의 몸보다 약 두 배 정도나 큰 테이블이 바로 옆에 놓여 있었는데도. 그리고 그 위에는 '날 먹어요'라는 글자가 쓰인 쪽지와 함께 예쁜 색의 쿠키 여러 개가 놓여있는 것 같았다.

  "저기, 토끼님."

  "네?"

  "저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소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 위의 쿠키를 가리키며 남자에게 물었다.

 

  "어… 일단 먹어도 죽진 않슴다."

  "와, 그러면 먹어도 되겠다! 그런데 어떻게 먹으러 가죠? 테이블을 올라갈 수도 없고."

  "바로 옆에 몸이 커지는 물약이 있네요.

  "어라, 이거?"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것 같은데, 말하니까 뿅 하고 생긴 기분. 역시 이곳은 이상한 나라가 맞는 걸까. 소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본인의 옆에 놓여있는 흰색의 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 안에 들어있는 게 몸이 커지는 물약이라고? 소녀는 남자와 병을 번갈아 바라보다가도 다시금 병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테이블 위의 쿠키와 같이 '날 먹어요'라고 쓰인 스티커 하나가 붙어있었다. 흔들어보니 양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떡하지. 소녀가 남자 쪽으로 슬금슬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어갔다.

  "어떡하죠?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어, 저는 괜찮슴다."

  "왜요? 쿠키 안 좋아해요?"

  "안 좋아한다기보다… 저는… 여기서 더 커지기 싫어서……."

  "그런 거예요? 뭐, 그래도 내가 토끼님보다 더 커질 거니까요!"

  소녀는 당당하게 말하고는 물약을 꿀꺽, 원 샷 했다.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런 느낌도 느껴지지 않았고. 다만 남자를 점점 내려다보게 되었다는 것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작아 보이게 되었다는 것이 굉장히 낯선 느낌이었다. 본인과 눈높이가 맞는 것은 쿠키가 놓여있는 테이블뿐이 없었다.

  "어, 나 진짜로 커진 거예요?"

  남자가 옅게 웃으며 소녀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반가움의 인사인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의미인 것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소녀도 마주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무튼, 가까이서 보게 된 쿠키는 무척이나 탐스럽고 맛이 있어 보였다. 모양도 귀엽고. 누가 만든 걸까, 생각하며 쿠키를 하나 집어 들자마자 소녀는 왠지 모를 회의감이 들었다. 내가 정말로 이걸 먹어도 괜찮은 걸까. 아니 그보다, 다시 또 어떻게 작아지지. 그전에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휴대폰도 두고 왔고……. 내 아이돌들 어떡하지. 아, 이벤트도 뛰어야 되는데 큰일 났다.

 

 

  스토리상 왠지 여기서는 울어야 될 것 같은 기분이기도 했다. 딱히 울고 싶다거나 하는 마음은 없었지만 일단 눈물이 나와서 울어버렸다.

 

 

  "엣, 어째서 우시는 검까!"

 

 

  남자가 소리쳤지만 들리지 않았다. 빗방울보다도 더욱 굵고 거센 소녀의 눈물방울이 바닥에 쌓이고 쌓여 점점 더 차올라갔다. 태풍, 쓰나미, 어쩌면 그 이상의 위협을 느낀 남자는 급히 빈 상자 안으로 들어가 소녀의 눈물 벼락을 피하려 했다.

 

 

  "하아, 우울해. 어째서 우는 거야."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참 눈물을 흘리던 소녀는 잔뜩 울상이 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쿠키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한 입 베어 물어버렸다. 그와 동시에 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소녀의 몸이 다시 작아져버린 것이었다. 아무래도 그 쿠키의 효과가 몸이 작아지는 것이었나 보다. 큰 것이 갑작스레 작아져버린 것인지라 허공에 떠있던 소녀의 몸은 다시 아래로 떨어졌고, 운이 좋았던 건지 남자가 들어가 있던 빈 상자 속에 안착되었다.

 

 

  "뭐예요? 비, 왔어요?"

  "이거 다 그쪽 눈물임다……."

  "네에?"

 

 

  스스로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의 소녀였지만, 이런 실내에 비가 왔을 리는 없고… 아까 울었던 것을 생각하면 결국은 납득이 되었다.

 

 

  소녀와 남자를 태우고서 물 위를 둥둥 떠다니던 빈 상자는 커다란 열쇠구멍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어디까지 가는 걸까. 차마 예상치도 못한 채 그저 향하는 대로 경로를 파악할 뿐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한참 가다 보면 육지가 보이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로 육지 비슷한 것이 보였다.

 

 

  "어라, 다들 무얼 하고 있는 거예요?"

  "코커스 경주……. 아, 그냥 무시해도 됨다. 이상한 아이들이에요."

  "응? 어째서에요?"

 

 

  육지라기보단 섬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무인도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그 작은 곳에서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이 원을 그리며 제자리에서 계속 달리고 있었다. 남자는 약간 성가신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그 육지 쪽에서 최대한 얼굴을 멀리했다. 당장이라도 이 주변을 모른 척하고 빠져나가고만 싶어 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그랬다.

 

 

  하지만 쉽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 보냐. 얼마 안 있어 "어이, 시계 토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남자를 부르는 것일 테지.

 

 

  "들킨 건가. 하아, 귀찮아……. 우울하다."

 

  소녀와 남자가 있던 쪽으로 헤엄쳐 건너오기 시작하는 육지의 동물들. 그 모습을 보며 잔뜩 성가신 표정을 짓는 남자, 그리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의 반응은 굉장히 상반되었다.

 

 

  여러 종류의 동물들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도도새같이 보이는 동물이었다.

 

 

  "어라, 시계 토끼. 옆에 있는 여자는 누구야? 처음 보는 얼굴인데."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무슨 대장이라도 되는 걸까. 이 동물이 말을 하면 끝마디를 다른 동물들이 따라 하는 식으로 말이 이어졌다.

 

 

  "혹시, 우리들 몰래 애인을 만든 거야?"

  "애인을 만든 거야?"

  "하아, 우울해……."

  "하아, 우울해……."

  "하아, 우울해……."

  "하아, 우울해……."

 

 

  그리고 어느샌가 이 대화는 "하아, 우울해……."만으로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마치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똑같은 말과 억양으로 반복되는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소녀는 당장이라도 머리가 터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 쪽으로 점점 더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당장이라도 뒷걸음질 치고 싶었지만, 여기서 발걸음을 뗄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왜, 왜 이러세요……. 저기요……"

 

 

  이러다가 진짜로 죽는 거 아닐까? 토끼를 쫓아서 이상한… 아니, 우울한 나라에 들어왔다가 결국은 죽어버리는 인생이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많이 놀아둘걸. 급기야 패닉 상태가 된 소녀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린지 오래.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동물들의 얼굴을 보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선배, 피요 선배. 일어나세요."

  "우음……?"

 

 

  무언가 몸을 흔드는 듯한 느낌에 살며시 눈을 떴다. 그러니까, 나 혹시 꿈을 꾼 걸까. 비몽사몽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눈이 마주쳤다. 그러니까, 토끼님……. 어라, 꿈이 아닌가.

 

 

  "요즘 부쩍 잠이 느시고… 많이 피곤하신 검까?"

  "어… 어라, 토끼님……?"

  "네? 토끼님이라뇨?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진 모르겠슴다만, 일단 저는 타카미네 미도리고요……."

  "미도리……?"

  "뽀뽀… 해드리면, 정신 차리실 검까?"

  "……응!"

  "하아, 하는 수 없네요."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 두 사람의 입술이 맞대어졌다가 떨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꿈이었던 것 같다. 무슨 꿈이 그렇게 생생할 수 있지.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또 마지막 장면은 조금 많이, 무서웠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온통 낯선 외형의 동물들이… 그것도 두 발로 걸어 다니기까지 하고 말도 하는 동물들이 '우울하다'라고 말하며 내 쪽으로 점점 다가오는데, 무섭지 않을 리가 없잖아.

 

 

  "하아. 미도리 군, 피요코 누님. 이런 곳에서까지 애정행각은 좀 자제해주시라구여. 미도리 군의 우울함, 제가 이어받을 것 같은 느낌임다."

 

 

  그래서인지 테토라의 입에서 나온 '우울'이라는 말에 왠지 모르게 오싹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우울'이라는 단어가 무섭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하여튼 나도 참, 왜 그런 꿈을 꿔서는.

 

 

  "에… 우울하다고 하지마, 테토라. 왠지 무서워지는 기분인걸."

  "어째서임까? 미도리 군이 맨날 하는 말인데여?"

  "맞아, 맞아. 미도리, 너도 하지마. 알겠지? 응? 절대로 하지 마!"

  "하아, 어째서… 우울하… 아니, 아님다. 안 할게요……"

 

 

  좋아, 좋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왜 잠들었더라. 누워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허벅지에 무언가 배기는 듯한 느낌에 시선을 돌렸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그래, 이 책을 읽다가 잠이 든 모양이지. 그래서 그런 꿈을 꿔버린 걸까. 오늘은 동아리 활동이 일찍 끝나서 덩달아 일찍 연습실에 와있었는데, 아무도 없길래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오, 나구모! 타카미네! 피요코! 모두들 일찍 와있었구나! 슬슬 오늘의 연습 준비하자!"

 

 

  이렇게 하나둘씩 모여든다는 것은, 연습 시간이 가까웠다는 뜻이겠지.

 

 

  자, 그러면 슬슬 준비를 시작해볼까!

 

 

  붉은 장미는 시선이 닿는 곳마다 화려하게 피어나 제 폐쇄적인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지금까지 봐 온 장미들 중 그 무엇보다도 강렬하고 시선을 찌를 듯 붉게 피어난 생명체에 소녀는 짧게 감탄한다. 세상에 이런 경이로운 장소가 존재한다는 믿기 힘든 사실과 제 코를 간질이는 달콤한 장미의 향기에 소녀는 마법에 홀린 듯 한 치 앞도 알지 못하는 장소로 걸음을 느릿하게 옮긴다. 그 화원이 탐욕 가득한 붉은 여왕의 둘도 없이 소중한 물건이라는 것은 일절 알지 못한 채.

  사방이 붉은 빛뿐인 정원을 텅 빈 생각으로 하염없이 걸으면서 소녀는 제 검은 머리칼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어딘가 균형을 깨어버렸다는 배덕감이 마음 한 켠에 잔잔히 일기 시작했다. 화원의 주인은 붉은 걸 엄청나게 좋아하는 모양이야. 걸어도 걸어도 끝이 보이질 않는 화원에서 지금까지 제 눈에 담긴 것이라고는 온통 붉은 장미들뿐이니. 분명 이 화원의 주인은 제가 지금까지 겪어 온 사람들 중 가장 독특한 사람일거라 생각했다. 걷고 걸어 나타난 화원의 출구에서 붉은 여왕의 보물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던 카드 병정들에게 자신이 침입자라 불리며 잡히는 순간까지도 앨리스는 이슬을 한아름 머금고 있는 붉은 장미에게서 눈을 쉬이 떼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기억에 기생하듯 틀어박혀 자라나고 있는 장미를 키우는 사람은.

  '처음 왔다면 말이지, 그 누구보다도 붉은 여왕을 조심해야 해.'

  텅 빈 찻잔에 건조한 공기를 차라고 부르며 넘칠 만큼 한가득 부어주던 우스꽝스러운 모자장수의 이야기가 갑자기 떠올랐다. 붉은 여왕. 생소한 이 세계의 신선함만큼이나 제 귀에 덜그럭 소리를 내며 걸려 남아 있던 낯선 사람. 부스러기조차 남아 있지 않던 이빨 빠진 접시에 손을 휘적이며 초콜릿 칩이 가득 박혀있는 바삭한 쿠키를 입안에 가득 밀어 넣었다. 독해 빠진 붉은 여왕은 말이지. 붉지 않은 것은 결코 눈뜨고 가만 보질 못해서 전부, 전부 붉은 색으로 만들어 버려. 그것이 순결한 흰 장미든, 하얀 마음을 가진 여린 양이든. 뭐든지.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는 질척한 딸기잼 덩어리마냥 새빨간 핏빛으로.

  검은 머리칼의 너도 그렇게 될지 몰라. 온통 붉은색으로.

 

  앨리스는 여왕이 목숨과도 같이 소중히 여기는 붉은 장미의 화원에 허락 없이 발을 들였다는 죄목으로 죄인의 신분이 되어 붉은 여왕의 앞에 서게 되었다. 모자장수가 키들거리며 제게 경고했던 붉은 여왕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고약한 심보만큼 코가 삐뚤어지고 눈매가 갈기갈기 찢어져 저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을까? 두려움이 저의 어깨를 한껏 잡아먹을 만도 하건만 앨리스는 붉은 장미의 현혹에서 허우적거리는 탓에 두려움을 느끼긴 커녕 숨조차 제대로 쉬는지 알 수 없었다. 살아있기는 한 걸까. 그 붉은 장미들에게 모든 혼을 빼앗겨 버린 것 같은 혼미한 기분.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여왕이 법정의 시끄러운 인파들 사이로 걸어온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럽던 법정이 적막함으로 가득 차는 것은 순식간. 또각또각 단단한 구두소리만 날카롭게 복도를 때리며 울려 퍼진다. 빨간 여왕은 무슨 행색을 하고 저를 마주할까.

  "네가 내 파이를 훔쳤느냐?"

  파이는 보지도 못했는데요. 제 단발마의 증언이 튀어나가기 전 여왕의 모습이 먼저 제 앞에 드러났다. 붉은 여왕, 이라던 사람은 저와 같은 검은 머리를 한 채 비릿하고 흉악한 미소를 입 안 가득 그린 채 막다른 길에 몰린 쥐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표정을 하고 있다. 온통 빨간색이라고 했는데, 왜 그대의 머리는 칠흑 같은 검은색인가요. 목구멍을 간질이는 말 한마디를 적막함 속에 던져 넣고 싶었으나 저를 보고 웃고 있는 그 미소가 마치 입을 다물라고 암묵적으로 제게 명령을 내리는 것 같아 앨리스는 무의식적으로 말을 삼켰다. 빨간 여왕-여왕도 아니라 왕인 것 같은데-은 한참동안이나 저를 내려다 보다 몸을 온전히 덮는 붉은 망토를 허공에서 펄럭이며 앉으면 몸이 바스러질 것처럼 딱딱하고 거대한 왕좌에 털썩 주저앉았다. 왕이-이제 칭호를 왕으로 바꾸도록 하자-지루한 연극의 중반까지 꾹 참고 본 고집스러운 어린아이 같은 심드렁한 표정을 짓자 이를 지켜보고 있던 동물들도 하나 둘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저 아이가 파이를 훔쳤어요. 여왕님이 손수 만드신 파이 한 조각을 저 아이가 훔쳤다고요. 술렁거림은 점점 더 웅장해져 저를 잡아먹을 괴물처럼 앨리스를 완전한 도둑으로 몰아갔고 왕은 그 관중들의 횡포를 즐겁다는 표정으로 능글맞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 아이는 화난 관중들에게 무슨 태도를 보일까. 여기서 저와 같이 유일하게 흑빛 머리칼을 가지고 있는 독특한 아이는. 훔쳤어. 훔쳤어. 네가 여왕님의 보물 같은 파이를 훔쳤어. 소곤거림은 앨리스의 나약한 귀를 느릿하게 갉아먹는다.

  자, 너는 어떡할래. 앨리스?

  붉은 여왕은 제 앞에 서서 저의 턱을 싸늘하게 식은 손가락으로 들어 올린다. 너는 붉지가 않구나. 나는 붉지 않은 것은 눈 뜨고 못 보지만 너는 특별히 검은 모양이라도 봐 줄 수 있을 것 같아. 그래. 파이 도둑아. 너는 나의 빨간 장미들과 같이 붉은 색으로 물들고 싶니?

  빨강은 내 사랑의 상징이란다.

  타앙- 언제부터 존재했을지 모를 테이블을 두 손으로 크게 내리치며 공기를 가를 듯 찢어지는 목소리로 소리친다. 안 훔쳤다니까요! 나무를 때리는 타격음이 제 귀로 침범하는 동시에 눈앞으로 쏟아지는 검고 붉은 트럼프 카드들. 카드들 사이로 보이는 것은 한쪽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고 있는 붉은 왕의 탐욕 덩어리. 너도 붉은색이라면 내 마음에 들었을 것을. 붉은 왕의 입모양이 그랬고 제 눈이 그리 말했다. 눈은 초점을 잃어가고 의식은 불투명해졌다. 꼬박 잠이, 들었다.

 

  앨리스. 이제 일어나야지.

  물속에 잠긴 것처럼 흐릿한 목소리는 물고기처럼 유영해 제 귀로 부드럽게 들어온다.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것은 방금 전까지도 자신과 함께 놀고 있던 제 하나뿐인 사랑하는 언니. 좋지 않은 꿈을 꿨나 보아. 앨리스. 햇볕 때문인지 붉은 여왕의 틈새 없는 추궁 때문인지 찡그린 얼굴을 보며 제 언니는 걱정 담긴 인사를 건넸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이상한, 좀 특이한 꿈을 꾼 것 같아.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던 꿈인데- 앨리스는 불만을 호소하듯 편한 마음으로 뚜렷하지 않은 기억의 색을 이야기한다. 뒤로 흐트러지게 피어난 붉은 장미에 흘낏 시선을 주면서 제게 사랑을 속삭였던 사람의 정체를 까맣게 잊어버린 채.

영하월
푸치
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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