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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 12월 25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기념일. 오늘날에는 가족과 연인을 위한 날로 굳어짐
에소루엔

Esoruen

조슈아 패러데이 X 에이미 리브먼

​매그니피센트 7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엎어졌다. 아까운 술이 쏟아지고, 술병과 술잔이 깨지고, 산지 얼마 안 된 플레잉 카드가 젖고 구겨진다. 그야말로 난장판이 된 도박판은 나중에 어떻게 청소해야 좋을지 막막한 지경이었지만, 이곳에서 그걸 신경 쓰는 사람은 주점의 주인을 제외하곤 한 명도 없었다.

 

“이 자식들, 너희 짜고 친 거지?! 빌어 처먹을 놈들! 배가 맞았다고 아주 쿵짝 맞춰 남의 지갑을 털려고 해?!”

 

테이블을 엎고 리볼버를 꺼낸 남자는 패러데이와 에이미를 향해 총을 들이밀고 외쳤다. 배가 맞았다고, 라. 그게 얼마나 대단한 사실이라고 근거로 대는 걸까. 에이미는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 쳤다.

 

“내가 왜 저놈이랑? 털어도 나 혼자 저놈 것까지 털지 내가 누구랑 손을 잡는다고?”

“오, 너무하잖아 허니. 난 적어도 허니 건 안 털어”

“둘 다 닥쳐!!”

 

타닥. 주점 구석의 벽난로에서 나는 나무 타는 소리에 소란스러운 대화가 끊겼다. 안 그래도 추운데 분위기 까지 싸늘해지다니. 최악의 크리스마스다. 패러데이는 자신을 노려보는 세 명의 시선을 무시하고 에이미에게 눈짓했다. 어떻게 할까, 라는 뜻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두 사람은 전혀 판을 짜거나 작전을 꾸민 적이 없었다. 우연히 오랜만에 만나 같은 판에 앉았고, 서로 사기를 치려고 했을 뿐인데 왜 의심하는 걸까. 아, 물론 그 과정에서 의심을 받지 않게 몇 번 남에게 좋은 패를 줄때, 서로에게 좋은 카드를 넘기긴 했지만. 그래도 그건 짜고 친 게 아니라, 서로 합이 맞은 것뿐이었다.

 

“일단 총은 내려놓고…”

“닥쳐 한 마디라도 더 하면 쏜다!”

“거 무서워서 살겠나. 그치 에이미?”

“좀 닥쳐…”

 

이러려고 앉은 게 아니었는데. 에이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일까지는 돌아간다고 굿나잇과 약속했는데. 곤란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을 봤다고 판에 끼어든 게 잘못이었나. 두 손을 들고 어쩌다 자신들이 이 지경이 된 건지 한탄하던 그녀는 화풀이 하듯 옆에 있는 얄미운 발을 밟았다. 으윽. 패러데이의 입에서 작은 비명이 새어나왔지만, 다행이 상대방들은 모르는 것 같았다.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허니”

“닥쳐 너까지 죄다 쏴 죽이고 가버릴까 보다”

“나도 쏜다고? 후, 여전히 터프하네. 그런 점이 좋아”

 

탕. 소근소근 이야기 하던 와중 날카로운 총성과 함께 근처의 유리잔이 깨졌다. ‘입 닫으라고 했지!’ 위협사격을 한 남자는 에이미에게 다가가더니 그녀의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뒤져봐도 아무것도 안 나온다만”

“그건 뒤져봐야 아는 거지. 총은 어디 있지? 듀크! 넌 패러데이의 소지품을 뒤져봐!”

 

야단났군. 이랬다간 짜고 친 건 아니지만 사기 치려고 한 건 들키고 만다. 위기감을 느낀 패러데이는 어쩔 수 없이 행동에 나섰다.

 

“잠깐! 그래, 사기 쳤어. 우리 허니랑 짜고 쳤는데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봐주지 그래? 지금 카드 개수가 안 맞는다고 이러는 거지 실질적으로 털린 건 한 푼도 없잖아?”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에이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 지었다. 아주 같이 죽자는 건가. 역시 죄다 쏘고 튀었어야 하는데. 속으로 불평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내뱉는 그녀와 달리 남자들은 격분해서 이를 갈았다.

 

“이 뻔뻔한 새끼가…”

“진짜야.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 내 뒷주머니에 수작질용 카드들이 있어. 확인해 봐. 하나도 안 쓰고 보관중이니 너희도 보면 알 거 아냐?”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명은 조금 떨어져서 총을 겨누고, 한 명은 에이미를 잡고, 나머지 한 명은 패러데이의 몸수색을 한다. 나름 안전을 중요시한 배치였지만, 이것이 오히려 독이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패러데이는 남자가 제 뒤로 다가가 주머니를 뒤지려는 순간, 에이미를 잡고 있는 남자의 홀스터에서 리볼버를 뽑았다. 탕. 탕. 탕. 호쾌한 세 번의 총성. 남자들은 모두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후, 위험했네. 그렇지 허…”

“이 미친놈아!”

 

상황이 종료되기 무섭게 그의 뒤통수를 갈긴 에이미는 자신을 잡고 있던 남자의 시체를 툭 차버렸다. ‘엿 같아서 원!’ 투덜거리며 옷매무새를 다듬은 그녀는 맞은 곳을 문지르고 있는 그에게 매섭게 따졌다.

 

“어디서 구라를 쳐?! 만약 사정도 안 듣고 쐈으면 어쩌려고?!”

“진정해 진정, 후. 여전히 화끈하구나, 다행이야. 우리 허니는 머리도 가슴도 몸도 다 화끈하지”

“아주 화끈함에 환장했네, 불에 집어던져줄까?”

“하하하”

 

그녀라면 정말로 자신은 벽난로에 곱게 접어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패러데이는 제 것이 아닌 총을 아무 곳에나 버리고 뒷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까 그 자신의 입으로 말한 수작질용 카드였지만, 사실 이 카드도 다른 플레잉 카드들과 다른 건 없었다.

 

“우리 처음 만난 날 생각나네, 그렇지? 그때도 서로 야바위 치려고 했다가 눈이 맞아서…”

“어느 시절 이야기를 하는 거야?”

“부끄러워 하기는, 우리 키스 안 한지도 오래 됐지? 오랜만이니까. 응? 그간 잘 지냈어?”

“잘 지냈지. 일을 물어다 주는 사람이 생겼거든”

 

호오. 누군지 매우 신경 쓰인다. 하지만 그는 굳이 에이미의 일을 캐묻지 않았다. 그녀도 자신도 자유로운 무법자다.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 사실을 캐묻는 것은 아웃이겠지. 카드로 손장난을 하던 그는 덱을 잘 섞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늘 하는, 그만의 카드 마술이었다.

 

“뭐야?”

“아무거나 하나 뽑아봐”

“싱겁기는”

 

그의 마술은 여러 번 보았다. 자신은 흉내도 낼 수 없어 감탄하는 기술이긴 하지만, 여러 번보다 보면 역시 심드렁해 질 수밖에 없다. 별 기대도 하지 않고 카드를 뽑은 그녀는 제가 무엇을 뽑았는지 확인했다. 하트 7. 그저 그런 카드다. 제가 뽑은 카드를 도로 덱에 끼워 넣은 그녀는 재주를 부려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확인했어, 섞어도 돼”

“좋아, 우리 허니가 뽑은 카드는…”

 

능숙하게 카드를 섞은 그는 제일 위로 올라온 카드를 집었다. ‘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보인 카드는 하트 7. 분명, 에이미가 뽑은 카드였다. ‘역시 잘 한다니까’ 과정을 다 지켜보고 카드에도 특별히 장치가 없는 걸 본 그녀는 이런 마술을 척척 해내는 그가 혹시 카드의 악마 같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맞아. 그거야”

“허니의 마음을 담은 카드를 찾는 건 마술 축에도 못 들지”

“염병…”

“그런 말 말고, 좀 더 예쁜 말 해주면 안 될까. 크리스마스잖아?”

 

그게 무슨 상관이야, 라고 말하려던 그녀는 제 입술로 다가온 카드 때문에 입을 닫았다. 이건 또 무슨 새로운 수작일까. 제 입을 다물게 할 용도로 한 짓이라면, 시원하게 선빵을 날려줄 용의는 있는데. 그녀가 눈치를 보는 사이 얼굴을 가까이 한 패러데이는 카드를 올려둔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에이미”

 

카드와 함께 떨어진 입술. 그의 손목이 가볍게 회전하자, 들고 있던 하트 7이 조커로 바뀐다. 이건 처음 보는 마술인데. 정말로 놀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패러데이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나중에 코트 주머니 확인해 봐, 그럼”

 

한건 했으니 가보겠다는 건가. 제가 처리한 남자들의 주머니를 털어 판돈을 챙긴 그가 주점을 나섰다. 잔뜩 로맨틱한 분위기를 잡아놓은 와중에도 돈은 챙기다니. 과연 조슈아 패러데이답다.

조금 뒤, 주점 주인이 어질러진 테이블을 치우러 오자 슬쩍 벽난로 쪽으로 자리를 피한 그녀는 제 코트 주머니를 뒤져보았다.

 

“허”

 

언제 넣어놓은 걸까. 주머니에서 나온 것은 작은 나무 인형이었다. ‘설마 직접 만들었다던가 하는 간지러운 설정은 아니겠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곰 모양 나무인형을 만지던 그녀는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메리 크리스마스, 조쉬”

 

나무 곰 인형에 뒤늦게 대답한 그녀는 그렇게 난로 앞에서 한참을 웃었다. 날씨는 좋지 않지만, 썩 나쁘지 않은 크리스마스다. 그녀는 머릿속에 적어놓은 최악이라는 글자를 깨끗이 지워버렸다.

앵커 2

북극

니지무라 슈조 X 아케치 유

​쿠로코의 농구

 

 

하늘에는 솜처럼 하얀 함박눈송이가 포옥포옥 떨어진다. 거리에는 캐럴 송이 연이어 들리고, 구세군 냄비 옆에서는 기부금을 재촉하는 벨이 쉼 없이 움직였다. 길에는 커플이며, 가족이며, 다들 집에서 나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나왔다. 만나기로 한 장소는 인테리어가 심플한 카페였다. 저가 좋아하는 상큼한 레몬 스펀지케이크나 꾸덕하고 달달한 브라우니를 잘 만드는 곳이었다. 아마 그는 저를 위해 그 곳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딸랑- 하는 벨소리가 카페를 잠시 울린다. 작지 않은 카페 안을 둘러보자 앉아 있지만 키가 큰 그의 모습이 쉬이 눈에 띈다. 오늘도 그는 잘생겼다. 어렸을 때부터 마주보고 지낸 얼굴이지만 그가 잘생기지 않았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슈조-!”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조용히 웃으며 자신의 손을 흔들어 얼른 앉으라는 표시를 했다. 나도 웃으며 그의 맞은편에 마주앉았다.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나야 미리 나와서 뭐 좀 먹으려고 했다 치고.”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저거 사실 거짓말일걸? 슈조와 내 지인은 상당수가 겹쳐져 있어서 슈조와 약속이 있는 날이면 SNS가 터져버릴 듯이 울려대곤 했었고 그건 어제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 증거로 지금도 쉼 없이 자신의 존재를 알려대는 라인 팝업창이 있었다. 그건 슈조도 마찬가지인 듯 자신의 핸드폰을 보면서 멋쩍게 내 얼굴을 보곤 나는 살짝 한쪽 입 꼬리만 올리며 볼일이 있었다고 라고 물으니 순순히 미안이라고 슈조는 말한다. 아마 슈조는 볼일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미리 나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순순히 미안이라고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슈조가 미리 시켜놓은 전혀 슈조 취향이 아닌 꾸덕한 브라우니를 조각 내 입에 넣었다.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니 브라우니의 달달한 맛이 더 달달한 것 같다. 가까이서 낮게 울리는 웃음소리에 눈을 슬그머니 뜨니 슈조가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뭘 봐, 내가 tv너머의 코미디언인줄 알아?”

“오늘 또 뭐 때문에 심통 났냐. 넌.”

 

입술을 삐쭉 내밀며 심통 부리자 슈조도 입술을 삐죽 내밀며 대꾸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브인걸, 집에서 하루 종일 뒹굴뒹굴하려고 했는걸. 마음대로 약속 잡아버리고…….

 

삐죽이던 입술을 집어넣고 브라우니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그런 나를 보던 슈조는 품 안에서 영화표 두 장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내가 이게 뭐냐는 표정을 짓자 슈조는 덤덤히 영화표라 말한다. 그걸 누가 몰라서 물어보냐, 그래서 이걸 들이미는 의도가 뭐냐고. 뭐, 보자고? 아니면 두 장 다 주겠다고. 바른대로 말해라. 누나 명치 스나이퍼야.

 

“아니 같이 보자고, 내가 왜 너한테 굳이 영화표를 보여주겠냐?”

 

뭐 그냥 보여줬을 수도 있지. 난 입술을 삐죽이며 반쯤 뭉갠 브라우니를 한 입 먹었다. 슈조는 뭐가 그렇게도 바쁜지 다른 때와는 달리 계속 핸드폰을 잡고 있었다. 윈터컵에서 이긴 걸로 연락이 몰릴 일은 조금 희박했다. 왜냐하면 윈터컵은 한 달 전에 끝났고 방학은 시작한 지 꽤 됐고 아저씨는 미국에서 슈조 동생들과 있을 테니 아저씨가 걱정되는 건 아닐 테다. 내가 보는 지도 모르고 핸드폰만 보고 있는 슈조가 낯설었다. 마지막 브라우니를 입에 넣자, 슈조는 영화 보러 나가자고 했다. 나쁜 새끼, 내가 어제 먹을 때는 건들지 말랬다고 진짜 말 한마디도 안 꺼내냐.

 

깜깜한 영화관 특성 탓에 내 발에 걸려 넘어질 뻔 했던 나는 다행이 슈조가 잡아줘서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내가 고맙다고 말하니 슈조는 퉁명스레 조심하라고 한다. 평소와는 다를 것 없는 반응이건만, 뭔가 다른 것 같은 기분을 카페서부터 지울 수가 없었다. 나는 속으로 오늘따라 슈조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좌석에 앉았다. 나는 그때서야 슈조가 예매했다던 영화 제목을 볼 생각이 났다. 내가 개봉하기 전부터 보고 싶다고, 기대된다고 말했던 그 영화였다. 내가 감동한 눈빛으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슈조를 올려다보자 슈조는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분명 조금 일찍 도착해서 시작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말이다. 전에는 영화가 시작될 때까지 나랑 대화해줬으면서. 나는 심술이 나서 팔걸이에 걸쳐져 있던 슈조의 팔을 끌어안았다. 놀란 슈조는 팔을 빼려고 했지만 내가 놔주지 않아서 곧 팔 빼는 걸 포기하고 말았다. 난 포기한 슈조의 어깨에 기대서 때마침 시작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여성 취향의 로맨스여서 슈조는 싫어하는 타입의 영화일 텐데.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재미있었다. 조금 고전적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런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영화시간 내내 스크린만 바라보며 팝콘과 콜라를 마시던 슈조는 약간 지루했던 모양이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그냥 로맨스도 아닌 여성취향 의 로맨스인 터라 남자인 슈조에게는 재미의 요소가 없었을 것이다.

 

“슈쨩, 이 영화 슈조한테는 재미없었지?”

“응, 네가 기대된다기에 예매했던 건데. 딱 너 취향이지 나한텐 별로.”

 

슈쨩...감동이야, 설마 나 때문에 취향도 아닌 거 본 거였어? 난 방학 들어서 키가 또 자라 키 차이가 더 벌어진 슈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감사를 표했다. 슈조는 내 취향이 엄청 오글거린다며, 내 취향을 대차게 깠다. 너무하네, 사람 취향이 좀 그럴 수도 있지.

 

영화가 끝난 후 길거리에 나온 우리는 오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나와 있는 것을 보고 경악했다. 우리가 아침과 점심 그 사이에 낀 영화를 봤기 때문에 지금 시간은 점심 먹기 딱 좋은 시간이었지만, 길거리던 식당이던 많은 사람들에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식당에 들어가면 몰린 사람들에 의해 밥도 잘 안 넘어갈 것이다. 어떻게 할 거냐는 뜻을 담아 슈조를 올려다보니 슈조도 똑같은 생각을 했는지, 나를 내려 보았다.

 

“그냥, 주변에서 조금 놀다가 나중에 밥 먹을가?”

“돈이 어디 있어서 그런 소리를 해?”

“아버지가 너랑 논다니까 조금 주셨어.”

“아픈 아저씨 등골을 빼먹냐 나쁜 놈아.”

“안 받는다고 했는데, 주셨어. 너한테 온전히 쓰시라는 아버지의 명이야”

 

돈이 어디서 생겼나 했더니 그게 아저씨 지갑에서 나온 거였니? 하여간 나한테 쓰라고 돈을 주시는 아저씨나, 진짜 나한테 돈을 쓰는 너나. 어떡해 부자가 똑같이 행동하냐.

 

“그럼 어디 갈 거야? 어디 갈 때라도 있어?”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있으면 너한테 물어볼 거 같아? 우리는 영양가 없는 대화를 계속하며, 가까운 곳에 있는 공원에 갔다. 거리에 비해 비교적 조용한 공원은 우리를 포함해 몇몇의 커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계속 뒤로 가있는 슈조의 손을 잡아끌어 꽉 쥐었다. 요즘 따라 슈조는 내 손을 잡는 걸 피해서 심통이 나서 더 꽉 쥐었던 것도 있다. 슈조한테는 그렇게 센 힘도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벤치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할 일 없이 하늘만 보았다. 숨을 내쉬자 하얀 입길이 하늘을 장식했다. 거리에서 멀게 들리는 신나는 캐럴도 멍하게 들으며 난 슈조에게 엉겨 붙었다. 슈조는 한숨을 내쉬며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슈조의 코트자락을 목표로 그 곳에만 자꾸 입김을 불어 넣으니 쉽게 축축해지고 말았다. 뭔가 복잡한 표정의 슈조는 내게 하지 말라고 밀어냈다. 내가 알았다고 말하며 다시 엉겨 붙으니,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가만히 두었다. 슈조의 핸드폰이 공원의 적막을 깨고 울렸다. 발신자는 아버지, 그러니까 아저씨였다. 얼른 받으라는 눈치를 주니 슈조는 받고 오겠다며 일어섰다.

 

어제까지만 해도 전화든 문자든 그냥 내 앞에서 했으면서, 갑자기 슈조가 낯설어 보였다.

이런 슈조는 오랜만이었다. 한창 슈조가 혈기왕성할 때, 그 때 나는 그런 감정을 느꼈었다. 당황, 불안, 초조. 그리고 조그만 곳에서 울리는 애정. 난 그 전부터 슈조를 좋아했을 수도 있다. 슈조와 멀어질 것을 걱정한 나는 비겁하게도 도망쳤다. 고백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짝사랑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난 짝사랑도 사랑이라도 끝내기 싫어 도망친 것이다. 난 눈을 살짝 감으며 섧은 감정을 삭였다. 눈을 뜨면 이 섧은 감정을 숨기고 어느 때와 다름없는 내가 있을 것이다. 슈조가 통화를 끝낸 듯 나를 불렀다. 나는 눈을 뜨고 활짝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환히

 

슈조는 이제 슬슬 밥 먹으러 가자며 나를 이끌었다. 공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라멘집이 있었다. 구석에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슈조는 잘만 찾았다. 슈조는 꼭 쥔 손을 놓지 않은 채, 포렴을 젖혀 안으로 들어갔다. 슈조는 짤막한 인사를 건네자 주방 안에 있던 아저씨가 반가이 맞아 주셨다. 그 아저씨는 내 이름을 알았다. 그리고 슈조와도 친한 듯 보였다. 내 시선을 알아챈 슈조가 이 곳은 아저씨의 단골집이자, 아저씨의 친구 분의 가게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본인도 자주 찾는다는 말도 함께. 슈조는 차슈 라멘 2개를 시키더니 주방에 근접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가게의 내부는 전통적인 라멘집이였다. 인테리어는 소박하고 정겨웠다. 일본 집에는 적어도 하나씩 있는 장식품도 보이고 가게에 흔히들 있는 장식품도 보였다. 실내에 몇 분 들어왔다고 조금 더워 외투를 벗어 옆 의자에 걸어두었다. 슈조도 더운 건 마찬가지였는지 코트는 벗어 옆 의자에 벗어둔 지 오래였다.

차슈 라멘은 정말 맛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좋아하는 아저씨가 단골일 만큼 정말 맛있었다.

낮은 슈조의 목소리가 가게 안에서 잠시 울리다 사라졌다. 슈조와 주인아저씨는 아저씨의 건강에 대해 말하더니 조금 있으니, 어서 빨리 건강을 회복했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대화를 끝마쳤다. 슈조는 참 좋은 남자친구가 될 거 같다. 키 크지, 잘생겼지, 매너 있지, 스포츠 잘해서 주장까지 했지, 다른 운동도 잘하지.

 

나는 속으로 슈조의 대한 칭찬을 늘어놓으며 슈조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슈조는 내 열정어린 칭찬을 들은 건지 내 시선이 너무 따가웠는지, 나를 내려 보았다. 슈조는 입모양으로 ‘왜’라고 물었고 나는 평소처럼 닳냐?라는 말 대신 잘 생겨서라는 말을 했다. 반응은 최상, 슈조는 나와 손을 잡지 않은 반대 쪽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가려봤자, 귀까지 빨간 건 가려지지 않지만 난 조용히 있기로 했다. 슈조와 잡은 손은 따듯했다. 사람 많은 길거리에는 노점상이 즐비했다. 목걸이나 반지 등을 파는 노점상이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있었다. 슈조는 내 손을 잡고는 골목길을 제 손금 보듯이 누비고 다니더니 한 악세서리 가게에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세공·주문제작 가능’이라고 적힌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세공을 한다는 시점에서 주문제작과 같은 말이 아닐까 싶지만 난 그런대로 넘어가기로 했다. 가게 안에는 오더를 받아 제작한 특별한 반지의 도안들이 즐비했다. 가끔가다 커플링들이 간간히 보였다.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작은 팻말에는 ‘주인이 제작한 세상에 한 쌍뿐인 반지’라고 적혀있었다. 저런 건 비쌀 텐데.

주인에게서 무언가를 받아든 슈조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거리로 나갔다. 야, 난 데리고 가야지, 나 여기 어딘지 모르는데. 저 멀리 휘적휘적 긴 다리를 활용하여 걷던 슈조는 두고 간 내가 생각났는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와 나를 챙겨 다시 앞으로 전진 했다. 골목을 적절히 활용하여 사람이 덜 보이는 쪽으로 이동하는 슈조는 익숙해 보였다. 너... 설마 혈기왕성할 시기에 골목길로만 다녔니? 이러니까 내가 못 찾지. 골목길을 전진한 우리는 이내 우리가 아침에 만난 카페 옆 골목을 빠져나왔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기해하자, 슈조는 이게 뭐가 신기하다며 타박을 주었다. 그래서 난 조용히 웃으며 슈조의 옆구리에 주먹을 박아 넣어 주었다. 이건 괘씸죄. 추위로 우리의 귀는 빨갛게 얼어붙었다. 그래서 우리는 몸 좀 녹일 겸 다시 카페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아메리카노에 레몬 스펀지케이크 먹어야지! 우리는 거리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거리에는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도 한 가득이었다. 저 사람들은 약속에 늦은 걸까 아니면 일 때문에 뛰어 다니는 걸까?

 

“뭐봐? 창밖에 재미있는 거라도 있나봐, 유?”

“아, 그냥 사람들 구경하는 거야.”

 

나는 창 밖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내 앞에는 아침과 다름없는 슈조가 귀를 말갛게 물들이며 있었다. 테이블에는 내가 좋아하는 디저트가 있었다. 또 이 기분, 이 거리감. 이 기분은 뭘까, 슈조는 왜 날 이렇게 보고 있는 걸까. 난 테이블 위로 올린 손을 서로 깍지를 꼈다. 무슨 소리를 들어도 충격 받지 말자. 그렇게 내게 세뇌시키며 난 슈조의 입 부분을 보았다. 슈조는 머뭇거리며 말하기를 주저했고, 난 슈조가 무슨 말을 할까 긴장하며 계속 마르는 입과 목을 축이며 슈조가 얼른 말하기를 원했다.

 

“유”

 

얼른 말해줘, 슈조. 난 준비되어 있어. 네가 무슨 말을 하던 상처받는 걸 들어낼 준비가 되어 있어. 얼른 나에게 그 말을 꺼내 끝내줘. 나한테 매정할 수 있는 그 말을.

 

“좋아해”

 

나도, 나도 좋아해, 내 슈쨩. 어렸을 때부터 쭈욱 좋아해 왔어. 넌 친구로서 일지도 모르지만 난 이성으로서 좋아해 왔어.

 

“사귀자”

 

그래, 그렇구나.

....어? 뭐라고? 슈조 다시 한 번 말해줄래? 너도 같은 마음이야? 내가, 내가 생각하는 그 좋아해 였어? 같은, 같은 마음이야? 정말로? 하지만 오늘은 만우절이 아니잖아, 만우절은 4월인걸? 오늘은, 오늘은 12월 24일이잖아. 크리스마스이브라고

 

“그래, 네가 들은 거 맞아. 좋아해. 사귀자. 더 이상 친구 사이는 싫어”

 

정말로..내가 생각하는 좋아해였구나.

 

난 그 소리를 듣자마자 내 귀를 의심했다. ‘좋아해, 사귀자’라니 그 니지무라 슈조가 누군가에게 고백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정확하게는 네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을 생각하기 싫었던 거지만. 하지만 저 붉게 물들은 귀가 진심이라는 걸 알려줬다. 슈조의 진심.

난 말없이 슈조 입에 과감하게 입을 맞췄다. 다른 누가 아니고 슈조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누가 아니라 슈조니까. 난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

 

“ 내 대답이야.”

 

난 짧게 뽀뽀를 한 뒤 이렇게 말하고 웃었다. 그리고 슈조는 놀란 얼굴을 순식간에 평소대로 되돌리더니 이번에는 슈조가 내게 입을 맞췄다. 깊고 깊게 그렇게 달콤하게

앵커 1

청아루

미카제 아이 X 하츠미 아루

노래의 왕자님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세상이라 불리는 세계는 하늘에서 작은 하얀 뭉치가 내려왔다. 춥다, 두꺼운 코트, 따듯한 코코아, 겨울. 4번의 계절 중 한 해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아루는 잠옷도 갈아입지 않고 담요 하나만 어깨에 걸친 채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창가에 다가가 앉았다. 따듯한 실내의 온도 때문인지 김이 서린 창문을 닦고 바깥을 바라봤다. 코를 빨갛게 물들고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아이, 매서운 바람에 코트 앞섬을 바로잡는 직장인, 골목 구석에 숨어든 길고양이까지 모두 겨울에 맞는 옷차림으로 하루를 나고 있었다. 유독 길거리에 알록달록한 전구들이 상가와 주택가를 꾸몄는데, 이는 내일 있을 크리스마스 축제를 위함이라 생각하면서도 벌써 올해도 마지막인가. 라는 아쉬움을 빛냈다. 멍하게 바라보던 창가에서 시선을 떼자 언제 연락이 왔는지 휴대전화에 불빛이 들어왔다.

 

‘루, 일어났어? 오늘은 저녁에 사무소 연말 파티가 있을 거야. 예정이 앞당겨졌으니 첨부한 자료 확인 부탁해.’

 

  매니저인 츠오언니에게서 간결한 메시지가 하나 상태 표시줄에 떠있을 뿐, 다른 연락은 없었다. 사무소의 연말파티는 샤이닝 사무소의 연예인과 여러 작곡가들이 모여 바쁘게 보낸 올 한해를 마무리 짓는 큰 연례행사다. 사장님도 참여하니 불참은 피해야싶지만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는 아무래도 불편하고 귀찮다. 주변을 의식해야하는 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여태 다른 행사는 둘러대어서 피했지만 연말 행사는 아루도 피하지 못하는 큰 시련이다.

 

  피하지도 못하기에 가장 싫어하기도 하지만 이는 개인적인 이유일 뿐, 파티 장에 가면 한 사람 때문에 가장 바빠질 예정이 마음에 걸린다. 미카제 아이, 제 연인은 지금 한참 서재에서 작사를 마무리 짓고 파티 준비를 시작하겠지만 그 스스로 알고 있을 터다. 미스터리한 이미지로 대중에게 알려진 아이는 파티에 참석하면 주변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 그저 평범히 사람만 꼬이면 회장에서는 눈길조차 던지지 않고 설렁설렁 참석한 뒤 돌아오겠지만 미심쩍은 티를 내며 다가가는 여자는 아루의 눈에 거슬리게 보일 뿐이다. 거기다 샤이닝 사무소의 지침은 연애금지. 이처럼 사람 속 꼬이게 만드는 지침도 없다. 처음 들었을 적에는 활동하기에도 바빠서 벅찰 텐데 무슨 연애인가 싶었지만 본인이 시작하니 이리 큰 족쇄로 따라올 줄은 미처 몰랐다. 스스로가 연애 같은 걸 한다는 게 더 의외였지만.

 

‘확인했어요. 조금 있다 봐요.“

  간단히 답장을 보내고 탁상의 시계를 바라봤다. 파티 시작까지 9시간. 넉넉히 남아있으니 시작 3시간 전부터 준비하면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다. 추위를 잘 타는 것은 아니지만 눈과 거센 바람은 할 수 있다면 만남을 늦추고 싶다.

 

“아루? 일어났어?”

  똑똑, 하는 노크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인영이 익숙하게 다가왔다. 9시간 후에 여러 인파에 둘러싸여서 시선도 마주치기도 힘들 그가 한손에 하얀 머그잔을 들고서 내민다. 따듯한 김이 올라오는 코코아를 담은 머그잔은 밖에 흩날리는 눈의 색과 닮아서 새삼 지금이 다시 겨울이라 느끼게 만든다.

 

“이만 일어날 시간이야. 아침도 먹어야지.”

“코코아만 마시면 안 되나요?”

“안 돼. 또 아침을 거르면 주방에 못 들어가게 한다 했을 텐데.”

 

  초콜릿색 눈이 불만을 안고 뚱하게 바라봤다. 점점 새침해지는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현을 하고 있지만 그는 불만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크리스마스이브잖아요. 산타 할아버지 대신에 선물, 소원을 들어주시면?”

“산타가 선물을 주는 날은 내일이야. 그리고 아루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잖아?”

 

  그렇지만, 아직 성인도 아니라고요? 고집 부리는 눈이 아이의 얼굴을 뚫을 듯 바라봤지만 늘 이 패턴은 언제나 제가 지고 말았다. 오늘도 같겠지. 삐죽하고 튀어나온 입술이 아이의 시야에 잡혔지만 저 삐죽거림 마저 제지하면 정말 오늘 하루는 얼굴도 보기 힘들게 뻔했다. 거기다 크리스마스이브의 행사는 늦은 시간까지 진행될 테니 지금 아니면 시간도 없을 텐데. 평소라면 없을 심술이 발동한 원인은 짐작이 가지만 이를 또 입 밖으로 내면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걸 아이는 잘 알고 있다.

 

“그럼 코코아와 모닝 브레드.”

“저 그거 어제 만들다가 예열 잘못해서 살짝 딱딱한데..”

 

  앞의 삐죽거리는 애인이 원할 조건을 붙여 제안하니 바로 눈을 싹 피하며 실수를 고백한다. 어제 유난히 허둥거리더니 기어이 무언가 하나를 잘못했나보다. 크리스마스 하루 전날에 먹는 아침으로는 아이의 메모리에는 물론, 아루의 기억에도 오래 남지 않을까. 생각하는 두 사람의 눈 오는 이브였다.

당스

다이스

Q X 다이스

007 Spectre

 

 

그러니까 플랫에서 TV 보면서 팝콘 먹자고 했잖아요.

Q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런던에 사는 모든 사람이 거리에 나온 것 같은 북적임. 피곤하기는 다이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그녀는 오늘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Q, 미안해요. 그렇지만 그거 오늘만 판다고 해서......”

 

잡은 손을 살짝 흔들며 말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Q가 웃는다. 그 미소에 다이스는 내가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는데 Q가 따라온 거잖아요! 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얼마나 더 걸어야 하죠?”

“거의 다 왔어요!”

 

이번엔 진짜로. 다이스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방긋 웃었다.

 

 

           *

 

 

마침내 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가게 앞의 줄은 다이스가 예상했던 것 보다 길었다. 그녀는 조금 절망했다. Q의 손을 잡고 걷는 내내 다이스는 속으로 기도했었다. 제발, 제발. 줄이 길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그 물건을 살 수 있게 해주세요, Q! 기도하는 대상이 틀렸던 걸까. 하지만 다이스가 믿는 유일한 신은 바로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남자였다. 지각하지 않게 해주세요, Q. 버스에 자리가 있게 해주세요, Q. 얼마나 많은 바람을 그에게 말했던가. 다이스가 Q를 좋아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효과가 꽤 있었기에 그녀는 늘 그에게 빌었다. 만약 다이스가 Q를 좋아하는 만큼 기도가 이루어졌다면 그가 아니라 그녀가 신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제법 긴 줄에도 다이스는 굴하지 않고 제일 끝에 섰다. 크리스마스 기념 한정판인 그 물건을 포기하긴 싫었다. 포기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건.

 

“Q. 진짜 저 혼자서도 괜찮으니까 플랫에 먼저 돌아가도 돼요.”

“아니요, 다이스. 제가 안 괜찮아서 그럽니다. 모처럼 휴가를 냈는데 혼자 있으라고요?”

 

Q의 말에 다이스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그렇구나. 나만 같이 있고 싶었던 게 아니었구나. 다이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물건을 꼭 손에 넣고 말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했다.

 

*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이걸 꼭 사고 싶었거든요.”

“축하합니다. 당신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저도 기쁘네요.”

 

자그마한 쇼핑백에 들은 물건이 너무나 좋아서 다이스는 자꾸만 손을 흔들었다. 덕분에 보라색 리본에 쌓인 상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쇼핑백이 그리는 부드러운 포물선을 잠시 바라보던 Q는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다이스.”

“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궁금하게!”

 

Q는 그녀에게 질문을 하는 대신 꼭 잡은 다이스의 손을 끌어와 입을 맞췄다. 갑작스런 Q의 행동에 다이스가 부끄러운 듯 웃는다. 그의 생각이 맞을 것이다. 다이스는 꼼꼼했지만 의외로 허술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눈꽃 무늬가 있는 다이스의 장갑 위에 Q의 입술이 한 번 더 내려앉았다.

Q는 며칠 전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있잖아요. Q는 넥타이 고를 때 어떤 기준으로 골라요? 글쎄요. 그냥...... 무늬가 있는 거라든가. 무늬가 없으면 별로예요? 아뇨, 꼭 그런 건 아닙니다. 그렇구나.

여전히 신이 난 다이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Q는 슬쩍 고개를 뒤로 돌렸다. 다이스가 필사적으로 말려서 들어가지는 못 했던 가게가 보였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가득한 유리창 너머가 반짝였다. 깔끔하게 재단 된 옷을 입고 있는 마네킹들은 머리에 산타 모자를 쓰고 있었다. 빨갛고 하얀 모자를 보면서 Q는 플랫으로 돌아가 다이스 몰래 침대에 자신의 양말을 걸어야하는 건지 고민했다.

 

*

크리스마스 이브의 저녁은 Q가 원했던 만큼 오붓했다. 특별한 날에만 다이스가 불을 붙이는 캔들의 불빛이 식탁 위에서 일렁였다. 다이스는 신이 나서 연신 재잘거렸고 Q는 언제나 그렇듯 다이스의 마음에 꼭 드는 대답을 했다. 만족스러웠던 저녁 식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TV를 켰다. 이윽고 익숙한 오프닝 소리가 들렸다.

 

“역시 이걸 봐야죠.”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별로라더니.”

“그래도 여전히 좋아해요.”

 

시끄러운 거실에 때때로 바삭한 소리가 끼어들었다. 다이스는 양 볼 가득 팝콘을 우물거리면서 Q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언제 그에게 줘야할지 생각했다. 어쩌면 Q가 침대에 양말을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 속에 몰래 넣으면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다이스는 문득 자신도 양말을 걸어야하는 건지 고민했다. Q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샀을까? 고개를 돌려 옆을 보자 드라마에 집중하는 Q의 얼굴이 보였다.

 

“Q.”

“네.”

“좋아해요.”

“......새삼스럽게.”

“아니, 그걸 말하려고 한 게 아니었는데요. 얼굴을 보니까 불쑥 그 말이 튀어나왔어요.”

“네에.”

 

다이스는 더 말하지 않고 그의 팔을 들어 자신의 어깨에 둘렀다. 두 사람의 얼굴이 한층 더 가까워졌다. 다이스는 시선을 들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좋아해요.”

“알아요.”

 

곧 Q의 입술이 다이스의 이마에 닿았다. 다이스는 정말로 새삼, 그가 너무 좋아서 잠시 숨이 멎는 듯 했다.

 

“저보다 더 집중하고 있네요.”

“오랜만에 보는 거라서.”

“재밌죠?”

“예전 시즌이 더 나아요.”

“역시 그렇다니까요.”

 

창 밖에는 조금씩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창틀에 눈이 조금 쌓였을 때 드라마가 끝났다. 다이스는 다시 양말에 관해 고민했다. 하지만 답은 정해져있다는 걸 그녀는 고민을 시작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Q.”

“네.”

 

그녀는 항상 고민이 있으면

 

“크리스마스 양말을 걸어야 할까요?”

 

그에게 물었다.

 

“다이스가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럼 제가 제일 좋아하는 양말을 걸겠어요.”

“그렇게 해요.”

 

가볍게 미소짓는 Q의 얼굴을 보면서 다이스는 그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다는 걸 알았다. 서랍에서 양말을 찾는 동안 다이스는 Q가 양말을 걸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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