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일
: 세상에 태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


르네님
매그너스 X 르네
메이플스토리
헬리시움의 새벽은 언제나 고요했다. 11월 27일, 막 열 두 시를 넘겨 하루가 시작된 지 몇 초 되지도 않을 무렵의ㅡ 새벽이라 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밤에 가까운 시각.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다.
도심 한가운데 위풍당당하게 다리를 뻗은 성채의 주인, 폭군이라 불리는 노바 족의 남자는 커다란 침대 위에서 홀로 눈을 꿈뻑거렸다. 온기 없는 시트가 휑하다, 날개를 뒤척이고 꼬리의 위치를 옮기고, 한 쪽이 잘린 뿔을 좀 더 편하게 베개에 기대어도, 잠은 되려 더 달아날 뿐이었다. 대체 무슨 별 일이 다 있는지.
영 낯선 일인 양 포장했지만 사실 이런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기를 따지자면 가끔이라 하는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 한 달에 대략 열댓 번, 많으면 스무 번이 넘었고 적으면 대여섯 번으로 그치는 그 괴이하게 시린 날, 그는 밤을 앓고는 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진실로 찾아오지 않은 것이 잠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에게는 지긋지긋한 불면증이 있었다. 이유는 정말 별 것 아니었다, 그의 병세에 뒤따라 붙는 무거운 두통에 비하면 어이없을 정도로 가벼운 것이었다. 그냥 불안이었다. 깃털처럼 툭 털어내면 떨어지는, 훅 불면 날아가는 덧없는 감정이었다. 깊게 생각하면 조금 속이 메슥거릴 정도의, 그러나 무시하면 가볍게 흩어지고 마는 하찮은 증상을 수반하는 뒤숭숭함.
그것은 그가 찬탈한 왕위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ㅡ절대로ㅡ우스운데다가 정의롭기까지 한ㅡ죄책감 따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죄를 모르는 남자였다. 피로 만들어진 왕좌에 앉아서도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되려 피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그랬다. 살육은 차라리 본능이었고 죽음은 그에게 더없는 오락이 되었다, 그래, 그것은 언젠가 아주 먼 옛날에는, 그런 것을 괴로워했던 적이 있는 것 같기도ㅡ 했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릴 정도의 쾌감이 되어 있었다.
토끼몰이, 여우 사냥, 약한 것들을 물어 죽이며, 광폭한 강자로서 군림하는 쾌감이. 그렇다면 그것이 어찌하여 병증이 되었는가? 묻는다면, 그가 짐승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약간 까탈스러운 성격이었다, 별 일도 아닌 것에 성을 내고 명령은 끔찍하게 까다로웠으며, 또한 지독하게 변덕스러웠다ㅡ 그것은 야생의 날것이었다.
별 수 없는 일이다. 느긋하고 부드러운, 그 어느 것도 경계하지 않는 종류의 생물은 돌려 말하면 그의 인생을 거슬러 단 한 번도 위협을 느껴 본 적이 없다는 뜻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에 있어 전장과 죽음을 그 무엇보다도 황폐하게 삼켜왔던 남자는, 그 무엇보다 목숨에 예민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자존심은 지나치게 드높았다ㅡ그 반대였을지도 모른다, 대개 아주 상반된 것들은 같은 본질을 지니기 마련이었으니까ㅡ그리하여 자만은 여유로 환면했고, 그것은 이내 능구렁이 같은 변덕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가혹하리만치 제멋대로인 성질의ㅡ 그리고 그 병증의 근원이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언젠가 그 지독하게 차가운 그림자, 새까맣고 끈적끈적한 타르가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들러붙으리라 믿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랬다, 까다로운 결계를 걸어 둔 최상층의 문을, 그는 불신했다. 결국에 그 문이 열렸을 때 웃음을 터트리고 말 정도로.
눈을 붙이면 때때로 생기 없는 숨결이 겨울의 바람처럼 훅, 그의 귓가를 스쳤다. 그럴 때마다 그는 화들짝 깨어나 성채를 살폈고, 인간이 아닌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성문과, 기척이라고는 그들의 것밖에는 보이지 않는 헬리시움의 밤을 보고서야 겨우 침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는 갑주를 머리맡에 두었고, 언제든 입을 수 있도록 일과가 끝난 후 손질했다. 잠들기 직전 급소를 보호했고, 큰 소리가 들리면 검을 들었다. 그의 밤은 그 어떤 시간보다도 예민했다, 단 한 번도 꿈을 꾼 적 없었다, 단 한 번도 잠든 얼굴을 다른 이에게ㅡ심지어 기상을 알리러 온 부하에게조차 알린 적 없을 정도로, 편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지독한 피로가 온 몸을 감았고, 이를 악물며 버티던 그는 급기야 일상 중 간간히 의식을 잃기까지 했다. 눈앞이 까무룩 멀어지는 감각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그래, 이겨내며. 언제나 승리했던 전장처럼 그렇게, 목숨을 포상으로 개선하던 나날.
훅 튀어들었다.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니이임~~~!”
“아.”
‘매그너스 님’은 영 짜증스러운 얼굴로 미간을 좁혔다. 아주 고요하던 공간에 울리는 목소리가 시끄러울 정도로 선명하다, 주인을 찾을 필요도 없이 품에서 존재감을 뽐내는 온기가, 정말이지, 그는 하, 하고 비웃음 같은 숨을 내뱉었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를 않는다. 대체 네가 뭐라고.
“시끄러워, 이 망아지 같은 계집애야. 스펙터도 잔다.”
“걔들 자면 업무 이탈이에용.”
“......내가 진짜 너 때문에 기가 차서.”
“우이잉.”
주인에게 혼난 강아지마냥 낑낑대는 소리를 내며 품에 파고든다, 헐벗은 가슴팍에 닿은 입이 오물거리는 것이, 분명 음험할 정도로 웃고 있으리라는 것을 이미 질릴 정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의도가 심히 불순했다, 제 맨가슴이 그리도 좋더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그러면 또 헉, 하고 과장스레 놀란 소리를 내뱉다가, 히히히 웃으며 착 달라붙을 것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기가 막힌 계집애. 그는 허탈함에 실소를 뱉었다, 가슴께가 너무 따뜻해서 도통 화 낼 기분이 들지를 않는다.
“그래서, 또 이 오밤중에 무슨 일인데.”
“매그너스 님 보고 싶어서 왔지!”
“네가 나 안 보고 싶을 때가 어디 있다고.”
“응...”
그러네... 하고 멍청한 목소리가 가슴께에서 웅웅 울렸다. 기가 막힌 계집애... 매그너스는 한숨조차 잃어버리고는 고 까맣고 조그만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생물이었다면 이 계집애는 학살왕의 칭호를 찍었을 것이 분명했다. 아주 넋 빼놓는 것에는 달인이었다.
슬쩍 품에 좀 더 파고드는 것을 보니 제 시선을 느낀 모양이다. 요망한 계집애, 눈치가 없는 것도 분위기를 못 읽는 것도 아니었다,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못 느낀 척, 자신이 모르고 싶은 것은 직접 말해 주기 전까지는 외면하는, 얄밉기 그지없는 녀석이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이잉, 우리 사이에 그런...”
“왜 왔는데.”
“......”
입이 오물오물 움직인다, 제 가슴팍에 그대로 느껴지는 간지러운 움직임이, 아. 뭔지는 몰라도 말하기 힘든 모양이지. 고 조그만 머리가 굴러가는 것이 여기까지 들린다. 아, 아. 진짜. 매그너스는 터지려는 웃음을 통한의 인내심으로 억눌렀다. 빌어먹을, 귀엽다. 되도 않는 잔머리를 굴리는 것이 귀엽다, 소란스럽게 야단 떠는 방정맞음이 귀엽다. 조금만 으르렁대도 금세 낑낑대며 기죽는 것이 귀여웠고, 그 와중에도 슬쩍 다시 기어오르려 눈치 보는 것이, 그리고 그게 다 보이는 것이 귀여웠다. 정말, 제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데, 제 품에서 꼬물대는 온기가, 너무, 지나치게, 귀여웠다.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입술을 꽉 깨물며 참는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가슴 속에 민들레가 한가득 피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이 계집아이는 그 사이를 방정맞게 뛰어다니며 홀씨를 흩뿌려서, 자꾸만 마음속을 간지럽게 했다.
“매, 매그너스 님 사랑해.”
“왜 왔는, 큽.”
간지럽다, 홀씨가 새장 같은 갈비뼈 안에서 박동하듯이 날리는 감각이 간지러웠고, 부러 가슴팍으로 흐트러트린 새까만 머리카락이 간지러웠다. 아, 이걸, 이걸 정말.
“...히히헤헤.”
“...크흡, 젠장.”
“으헤헤, 매그너스 님 사랑해요~”
“알았, 크, 알았다, 알았으니 입 떼고 말해라. 간지러워.”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내가 진짜 너 제멋대로인 거엔 신물이 난다, 아주.”
“어휴, 헬리시움에서 매그너스 님만큼 제멋대로인 게 또 어딨다고~”
“너, 너, 너. 르네 너.”
결국 웃음을 터트리고 만 제 인내심에 자존심이 깎아 먹힌 매그너스는 그 가녀린 목덜미에 얼굴을 부볐다. 꺅, 하고 이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는 청량한 목소리, 새하얀 목에서 과일 같은 향기가 났다, 입맛이 도는 달큰한 향기. 르네에게서는 늘 다른 향기가 났고, 동시에 언제나 같은 향기가 났다. 초콜릿 향, 갓 구운 버터 쿠키 향, 설탕 녹인 따뜻한 우유 향, 달큼한 오렌지 향, 조금 톡 쏘는 라임 향, 손끝으로 흐르는 복숭아 즙 향, 생크림, 초콜릿, 바닐라, 파인애플, 석류, 딸기, 아, 그런 향기. 그는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온기 섞인 달콤함은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그것은 정말 어색할 정도로 매혹적이었고, 또 그리고... 그는 생각을 묻으려 제 입술 아래의 여린 살갗을 가볍게 깨물었다. 밤의 어둠에도, 자신의 그림자 아래에서도 뽀얗게 빛나는 살결이, 잇새에 잘근잘근 짓눌렸다. 르네는 조금 몸을 비틀다가 이내 아야, 아야, 아파요! 하고 앙탈을 부려댔다. 웃음기 섞인 발랄한 목소리가, 아, 이해할 수 없다. 귀여웠다.
매그너스는 정말 납득할 수 없었다, 르네가 세간에서 말하는 귀여움의 정의에 상당히 가까운 것은ㅡ그는 자신이 굉장히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상태라고 굳게 믿었다ㅡ사실이었으나, 그래,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귀여운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은 매그너스의 시야에는 그냥 성가실 정도로 하찮은, 그리하여 신경조차 쓰지 않을 감자 몇 덩어리 정도로 보였다, 사실 아직까지 르네가 가져다 모으는 귀여운 것들은, 매그너스의 기준으로는ㅡ 음, 그냥 알록달록한 쓰레기였다.
그런데 르네는 너무 귀여웠다. 개구쟁이 꼬마가 된 양 자꾸 건드리며 놀리고 싶었다, 그녀의 반응은 언제나 그가 놀랄 정도로 제멋대로였고, 그는 대부분의 경우 굉장히 유쾌해졌다. 그래서 솔직히 매그너스는 자존심이 상했다, 자신이 저런, 저런, 아무리 분명 객관적이고 이성적이며 모두가 인정하고 넘어가야 할 귀여움을 지닌ㅡ매그너스는 정말 진심으로,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ㅡ 계집아이라 하더라도, 그래도 그냥 귀여워해주기에는 조금, 그게 자존심 상한다는 사실이 또 자존심 상할 정도로 조금, 자존심이 상했다. 어울리지 않는 쑥쓰러움이 들끓기도 했다, 그게 또, 또 자존심 상했다, 매그너스 본인에게는 정말 천일공노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갔다. 귀엽다, 귀엽다, 귀엽다, 아, 빌어먹을, 그는 그것보다 더 걸맞는 단어를 알고 있었다. 아, 아. 그러나 말할 수 없다.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정말, 이제는 자존심이었다. 느슨해진 입매를 당기며, 그는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온기를 모른 척 슬쩍 밀어내었다.
그러나 또, 운명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이다.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님, 오늘이 무슨 날이게요?”
어찌나 마법 같은 타이밍인지.
가슴이 근질근질했다,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죽이고 속삭이는 몽글몽글한 까만 눈이, 주인을 보는 강아지처럼 순종적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 시선, 그 눈이, 제게 모든 것을 내어 보이며 사랑을 반짝이는 그, 얼굴이.
“네가 날 보고 싶은 날.”
“이열 라임.”
“...여기서 과일 이름은 왜 나와?”
“아, 이런, 헬리시움에서 쓰기에는 너무 신식의 언어였나...”
“헛소리 할 거면 잔다.”
매그너스는 한숨을 내쉬며 가만 돌아누웠다. 물론 그것은 그렇게 하자마자, 도로 제 품에 꿈지럭거리며 파고들 온기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허할 틈도 없이 착 달라붙어, 아안돼애, 매그너스 님 일어나세요! 하고 칭얼거리는 높은 목소리가,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나 익숙한 것이 되었을까. 모른 체 베개에 얼굴을 묻는 그의 팔을, 아프지도 않은 손으로 탁탁 내리치며 짜증을 부리는, 덧없이 연약하고 작은 것.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하찮은 힘이다, 꽉 잡으면 아주 쉽게 멈출, 그리고 그가 아주ㅡ조금, 변덕을 부리면, 금방 숨을 다하고 말. 이전에 그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파괴의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 충동은 불현듯 찾아온 깨달음 같은 것이었다, 정말로 문득, 아, 자신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 현실의 물체 사이 존재하는 간극을 발견했을 때의 그런 감각을 닮은, 저 목덜미가 저렇게 희었던가, 그 팔은 이렇게나 얇았고, 조금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은 연약한 발목, 반항조차 없이 꿰뚫리던 하얀 가슴팍... 그 충동을, 굳이 가슴 속에 미련으로 남겨두지 않은 채 실현하는 것은 그닥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왜냐하면 언제나 그것은 르네로부터 시작되었고, 르네는 언제나 얌전히 제 몸을 내어주었기 때문에. 매그너스와 르네의 최초가, 죽음이었기 때문에.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다. 그 두려움을 물리치는 방법은, 그에게는ㅡ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저를 죽이러 온 침입자를, 그래 죽음을, 베어 죽이는 감각. 그것은 그에게 오락이었고 쾌락이었다. 죽음은 더없이 나약했고, 그것은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지독하고 악질적인 즐거움을 선사하고는 했다. 매그너스 자신이 그렇게나 강력하다는 것, ‘결국에는’ 그가, 노바 최고의 전사, 그 누구보다도 힘을 지닌, 파괴를 제 발 밑에 둔 이라는 증명. 언젠가 영웅의 것이었던 칼이 피로 더럽혀질 때마다, 아주 선명한 형태로 눈앞에 나타나는 군림, 그것은 어쩌면 그것밖에는 붙잡을 수 없었던 허망한 절박함이었고, 절박함이라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사실은 불완전한 믿음의 지표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던가, 그의 불면은, 그 불면의 이유가 되는 아주 가볍고 별 것 아닌 불안의 근원은ㅡ 아주 오래 전부터 그의 가슴 속에 뿌리내린, 죽음에 대한 공포. 자신의 힘에 대한 의심, 제 손으로 죽인 열등감의 망령, 합리화로도 벗어날 수 없는 죄악에 대한 해묵은 통증, 결국에는, 인격과 짐승을 가르는 그, 황폐하고 예민한 평화에 대한 불감. 그가 타고나지 못한 행복, 그것에 대한 어떠한 갈망, 그 갈망조차 부정하는 자존심... 결국에는 그의 모든 것, 자존심이라는 허울 아래에 가려진 더없이 인격체다운ㅡ 불완전함.
매그너스가 그것을 마주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간 쌓아온 탑의 가장 바닥을 빼내는 것이었다. 비록 그것이 이미 아슬아슬하게 금간 벽돌이었다 해도, 아직 버틸 수 있는 것을 망가트려 모든 것을 무너트리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모든 것을 버려가면서까지 감수할, 그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는, 지극히도 어리석고 의미 없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도박을, 시련을 이겨내는 영웅과도 같은 일을, 매그너스는, 폭군 매그너스는, 폭군을 버려가면서까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평범히 살아가느니 폭군으로 죽는 것을 택했다. 언젠가 목덜미를 물려 죽어도 그 무엇보다 강력한 공포였기를 원했다. 그러나 산 목숨으로서 그리도 외로울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는 겹겹이 쌓은 허무를 자존감 아래 감추며,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한, 혹은 그렇게 합리화한 새까만 공허에게서, 몸을 돌렸다.
르네를 만난 것은, 그렇게 감춰 유지하던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전장의 안에서였다.
그것은 굳이 묘사하자면 아주 깊은 운명이었고, 그 계집아이를 주춧돌로 모든 것이 붕괴될 고요한 소란의 시발점이었다. 운명, 아, 운명. 그는 운명이라는 것을 아주 지긋지긋하게 여겼다. 자신이 그런 멍에를 메고 있다는 것이 지독하게 불쾌했다. 끊어내려 몸을 뒤흔들었고, 운명이라는 것이 씌운 규칙을 폭력적으로 깨부쉈다. 그러나 그것조차 운명이라 하면, 그는 도저히 할 수 있는 말이 없는 것이었다, 운명, 운명, 우연과 경우의 수 같은 것들이 작용한 결과일 뿐이라 굳게 믿어 보아도, 르네와의 만남은 우연이라 하기에는 악질적일 정도로 매그너스와 꽉 맞물려 돌아가고 마는 것이었다. 그것은 만남 자체의 영향이라기보다는, 르네와 매그너스 개인의 성향이 지나치게 완벽하며 굳건했기 때문이었고, 더 나아가 르네라는 여자가, 지독히도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첫인상은 글쎄, 약하지는 않은 계집이었다. 그러나 서툴렀고 허술했고, 어울리지 않게 큰 검, 힘에만 치중한 단순한 기술이, 그러면 그렇지, 그를 이기기에는 한참 먼 애송이였다. 갈아내면 쓸 수 있을까? 그러나 폭군에게 덤벼든 건방짐의 대가로, 그런 미래는 찾아올 수도 없게 되었으리라. 여지조차 남기지 않은, 심장을 노린 일격, 갑옷조차 챙겨 입지 않은 계집아이를 죽이는 것은 아주 쉬웠다, 그는 실패하지 않았고, 금세 너덜너덜한 시신이 된 여자에게서, 흥미 없이 칼을 거두었다. 아주 완벽한 죽음이었고, 아주 완벽한 승리였다. 그런 언제나와 같은 승전의, 그리 되었어야 했는데.
두 번째 만남, 두 번째 만남이었다, 일상이 이그러지기 시작한 것은.
“...매그너스 님, 매그너스 니임.”
“아, 왜.”
...모른 체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면 낑낑대다 잠들고야 마는 녀석인데, 오늘따라 군소리가 많다. 부러 영 냉정히 볼멘소리를 내어도, 매그너스 니임, 하고 팔뚝을 흔드는 손이 멈추지를 않았다. 죽을 때가 되었나? 실없는 소리를 조금의 철렁함도 없이 속으로 중얼일 수 있는 것은, 그 죽음이라는 명제, 그 누구의 목 뒤에도 공정하게 날을 세운 저주이자 축복의 칼날이, 그녀에게만은 주어지지 않은 몫이었기 때문이었다.
매그너스는 분명히 그 날, 르네를 죽였다. 비단 르네가 아니라 그 누구더라도, 그는 제 성채에 잠입한 침입자를 살려 놓는 성격이 아니었다. 사실, 뭐, 그래. 아주 가끔, 변덕이라 이름붙인 거짓 여유가 아주 자비롭게 몇 명을 놓아 줄 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략적인 물러남, 거리를 가늠하여 여유를 던지는, 제 악명을 널리 떨칠 쥐새끼를 풀어놓는 오락. 언젠가 풀어놓으려 했던 멍청한 모험가가 아득바득 제게 달려든 이후로, 그는 그 오락을 그만두었다. 겨우 숨겨두었던 결벽이 잘못 조인 넥타이처럼 제 목덜미에 달라붙어 존재를 잊지 못하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두 번째 만남은.
불사신이 아니고서야.
“......”
“......왜.”
말소리가 멈췄다, 그러나 제 팔을 잡은 손에는 힘이 빠지지 않은 채였다. 그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며 르네를 바라보았다, 정말로 오늘따라,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르네는 이렇게 떼를 쓰는 녀석이 아니었다, 물론 가벼운 투정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받아주지 않으면 시무룩한 표정을 한 번 짓고는 곧 방긋이 웃으며 다른 주제를 가져오는 계집애였다. 그의 충실한 종, 그가 손짓하기도 전에 바닥을 길 줄 알고 발등에 입 맞추며 복종하는 방법을 아는 더없는 충견. 그것의 주인이 매그너스가 아니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 목줄은 제 손에 들려 있었기 때문에. 아니, 목줄을 버리더라도 그녀는 그에게 충성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사랑하는 것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생명이더라도 그것에게 주어진 생은 언제나 하나였다. 행복하고 안전한 삶을 두고 죽음을 택할 이는 없으리라, 그 삶이 지독하게 불행하고 절망스럽더라도 살아가는 이가 있다. 매그너스는 죽음의 무게를 알았다, 그는 왕으로 죽기를 바랐고, 동시에 살아남기를 바랐다. 전자는 그의 자존심이었고, 후자는 짐승의 본능이었다. 그리하여 가장 절박한 것은 왕으로 살아남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에, 힘에, 그 명세에 지독히도 집착했다, 그리하여 전부 얻었고ㅡ 그러나 동시에 그것과 인간적임이 공존할 수는 없었던 것이었다... ...그러니까 두 번째 만남의 이전까지는, 그랬다.
그는 하얀 턱을 잡아 올려 시선을 맞추었다. 새까만 눈동자가 그렁그렁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긴 속눈썹, 우는 듯 아닌 듯, 그가 형용할 수 없는 어떠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표정은, 그러니까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사실 그랬다, 매그너스는 그 무엇보다도 부정과 가까이 살아왔으면서도, 르네의 얼굴에 담긴 부정은 도대체 어떠한 종류인지를 인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그런 얼굴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르네가 그의 앞에서 보이는 얼굴은 언제나, 온전히 사랑과 행복을 담은, 아주 작고 귀여운 소녀였다. 그는 그것이 다가 아님을 어렴풋이 인지하면서도,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무슨 뜻인지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만히 눈썹을 치켜 올리자 그렁그렁한 눈이 시선을 축 늘어트렸다.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 같은 꼴이다, 아, 그 모습에서는 익숙한 것을 볼 수 있었다, 르네는 풀죽은 표정이었다. 아주 시무룩하고, 어딘가 실망한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더없이 솔직하고 순진한 감정표현에 매그너스는 입매를 조금 움찔했다, 아, 젠장. 귀엽잖아. 그는 그녀의 ‘그런’ 침묵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별다른 신경을 두지 않았는데, 그것은 르네가 그의 뜻을 절대로 거스르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기 때문이었으며, 동시에 그 침묵을 제외한 모든 표정이 지독하게 솔직했기 때문이었다.
“뭔데.”
“......”
눈치를 본다. 르네는 기분이 꽤 우울한 표정이었지만, 매그너스는 정말 배덕하게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눈썹을 추욱 늘어트리고 동그랗게 눈을 굴리는 표정이 너무, 빌어먹을, 그는 르네의 턱을 놓아주고 대신 제 입가를 가볍게 가렸다. 젠장, 젠장, 젠장. 그가 르네가 내민 간식을 격렬히 거부했을 때 그녀는 꼭 그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닥 좋아하지 않던 단 것을 입에 갖다 대기 시작한 것이 그때부터였다, 무의식중에 집어먹은 달콤한 것이 르네의 간식이었던 때의 그 세상이 무너진 것 같았던 얼굴이란, 아, 정말, 매그너스는 겨우 그런, 과자 쪼가리로도 그렇게 격렬한 감정표현을 보일 수 있는 르네가 신기하면서도, 동시에...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매그너스에게는 아주 특별한 것으로 다가왔다.
사실 르네는 매그너스에게는 그러니까, 특별하지 않은 부분이 없는 존재였다. 두 번째 만남은 그녀의 특별함 중에 가장 선명하고 먼 기억이었다. 그가 르네를 죽였던 것을 기억했던 이유는 딱 두 가지였다, 그녀가 이전, 자신이 배반하고 나온 검은 마법사의 수하였기 때문에ㅡ, 그리고, 그런 것 치고는 너무도 쉽게 죽었기 때문에. 음, 그래. 그녀는 검은 마법사의 개였다. 그를 물어뜯으러 왔을 때의 기세가 선명하고 오만했던 것만은 아주 흐릿하게 기억했다. 그래서 그는 솔직히 그 가슴에 칼을 박아 넣었을 때, 조금 우쭐함을 느꼈다. 별 것 아니잖아? 큰소리 친 녀석 치고는. 토끼몰이, 여우 사냥.
그래서 그 얼굴이 바로 지난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제 앞에 달려들었을 때는, 아무리 천하의 매그너스라도 솔직히, 당황할 수밖에는 없었다. 변신술사인가? 아니면 언데드? 혹은 인형을 다룬다든지, 하지만 그는 전날 그녀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고,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계집아이도 피 끓는 소리가 아주 선연했다. 착각이겠지, 착각이리라, 하고 검을 내리찍기 직전에, 그녀는 아주 경쾌하게 웃으며ㅡ 다시 한 번 자신을 죽이는 남자에게, 내일도 올게, 하고 말했다. 매그너스는 굉장히 찜찜한 기분으로 시체를 내다버렸고, 아주 당황스럽게도 정말 다음날 똑같은 모습으로 제 앞에 나타난 그녀를 마주했다. 그는 정말 혼란스러웠고, 계집아이는 또 덤벼들었다. 그래서 대화할 시간도 없이 또, 또 시체가 생겼다. 그게 며칠을 반복되니 매그너스는 이제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혼란스럽기 그지없어 잠을 못 이뤘다. 정말 뭐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리도 없고, 그녀는 자신에게 사사건건 달려들었으나, 정작 죽이고 싶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래서 그도 이번에는, 그녀를 죽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굉장히 이례적인 마음가짐이었으나, 그 마음가짐이 무색하게도 도저히 끝나지 않는 제압 과정에서 짜증이 끓어오른 그는 또 시체를 하나 만들었다. 매그너스는 허탈해졌고 한참을 시체를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그것을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이 쓸모없게도 시체는 벌떡 살아나 그를 쳐다보더니, 방긋 웃으며 내일 봐! 하고 까만 틈 사이로 사라졌다. 대체 저건, 뭐지? 진짜 뭔데. 뭐야. 그는 또 잠을 못 이뤘다. 결국 대화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계집애의 정체를 아는 것을 포기하고 검만 휘두를 정도로 익숙해졌을 때부터였다.
그 기간은 매그너스의 기억 속에 정말 평화적인 나날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일상이었음에도 죽음의 두려움이 다가오지 않았다. 목을 조여 오던 결벽도 아주 애매한 모양새로 흐트러져, 제 평화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평화로운 나날이었다... ...아마도 르네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매그너스 님, 저...”
“......어, 응. 나 뭐.”
잠시 이전의 르네를 떠올리던 그는 겨우 들려온 목소리에 약간 늦게 반응했다. 매그너스 님, 당연히 그에게 쓰여야 할 호칭이며 그녀의 목소리로 듣는 것도 놀라우리만치 익숙한 것이었으나, 그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었던 때가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납득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다 조금 손을 뻗어, 제 볼을 간질이는 손의 감촉, 매그너스는 자신의 볼보다 말랑말랑한 손바닥을 느끼며 눈을 깜빡였다. 언제 이렇게나 익숙해졌을까, 르네는 그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고ㅡ음,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특별한 것이겠지만ㅡ 매그너스도 그녀에게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특별하다는 것은 그러니까, 일상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르네는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고, 전혀 거부하지 않은 채 받아들였지만, 매그너스는 그렇지 않았다. 르네는 당연하다는 듯이 사랑을 속삭였고, 매그너스는 무시하고 밀어내었으며 외면했고, 그런 도망에도 불구하고 제 근간을 흔드는 용인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할 감정에 분노하고 두려움을 느꼈다. 그 두려움은, 두려움에서 기인한 폭력적인 원망과 비난과 분노는, 전부 르네의 몫이었다. 칼이 사지를 내리찍고 죽음에 몇 번을 목이 졸려도, 그녀는 다음날이면 한결같이 성채에 발을 들였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도망치면 된다, 자신을 두려워하고 겁을 먹어 영영 눈앞에 보이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제 온 심정을 뒤흔드는 이 이유모를 감정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르네는 그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의 근간은 자신의 것과 그렇게 다르지도 않았다, 분명 도망치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왜? 르네는 도망가지 않았다. 계속. 자신이 마주보지 않은 감정에서 도망치며 폭력적으로 내쫓을 동안, 그녀는 계속 제 쪽으로 걸음을 딛었다. 아주 오래, 오랜 시간 후에, 어쩌다 뒤를 돌아보고는ㅡ, 매그너스는 르네가 일상이, 일부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천천히, 제 탑에 꽃물이 들어 있었다.
“저요...”
그는 듣고 있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르네가 저렇게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또, 신기했다. 별다르게 특이한 것도 아니었고, 우물쭈물하며 말하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를 잠들지 못하게 했을 정도로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으면서도 제 눈치를 보는 것이 재미있어서였을지도 몰랐다. 르네는 그를 인간답게 만든 만큼이나 인간다웠고, 사실은 그도 르네도 인간은 아니라는 것이 더없이 유쾌했다. 매그너스의 근간은 용이었고, 르네의 근간은, 글쎄, 어둠이나 그 비슷한 것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인간의 감각을 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혹은 그것이 운명일까, 그가 어떤 수를 써도 멈추지 못할 내리막 같은 운명이었을까. 그는 이제 운명의 폭력적임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오늘 생일이에요.”
“뭐?”
그는 잠깐 귀를 의심했다. 그러고는 그렇게 내뱉은 얼굴이 발갛게 물든 채로, 안절부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눈조차 의심했다. 솔직히 좀, 놀랐다. 사실 좀 많이 놀랐다. 적어도 누워 있던 몸이 벌떡 일어나질 정도로는 놀랐다. 생일, 웬 생일? 너한테 생일이란 게 있었냐? 너 사실 사람이었냐? 그는 처음 그녀가 죽고 살아난 것을 봤을 때만큼이나 혼란스러워졌다. 꼼짝없이 정령이나 뭐 그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의 짐작이기는 했지만... 그렇다면 이 녀석이 늘 우기고 다니는 십대 후반 남짓의 나이가 진실된 것이었다는 말인가? 아니 뭐, 그럴 리는 없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그럼 나는 뭐지? 범죄자? 조금의 회고도 없이 순식간에 제 죄를 스무 개 정도 떠올린 매그너스는 믿지도 않는 신에게 속으로 용서를 빌었다. 이건 좀 양심이.
“...그... ...왜 말을 이제야 하고?”
“으음.”
르네는 매우 애매하고 불경한 표정으로 매그너스를 조금 훑어보았고, 매그너스는 납득했다. 그러니까 말해봤자 내가 안 챙겨 줄 거라고 생각했다 이거군. 그렇다면 검은 마법사 측의 인간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보기 싫은 빨간 머리가 여태까지 생일도 몰랐냐느며 깔깔깔 웃는 화상이 스쳐지나가자 입이 매우 썼다. 어찌나 선명하게 떠오르는지 저도 모르게 중지가 튀어나갈 뻔 했다, 이런 빌어먹을. 아무리 그래도 말을 했어야지 하고, 제 앞에서 아직껏 발그스름한 뺨을 한 계집아이의 멱살을 잡고 흔들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으나, 그는 자비롭게... 그러니까, 일단... 생일이니까, 참아 주기로 했다. 절대로 그런데 왜 이 시간에 온 거지,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간 것은... ...제기랄, 사실 맞았다. 잠이 오지 않아 보았던 시계는 열두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고, 그러니까 르네는, 땡, 하고 제 생일이 되자마자 분명히, 성채로 달려왔을 것이다. 그 점은 좀, 좀, 기특했다. 그가 다시 잠들지 못하게 한 것까지 용서해줄 수 있을 정도로, 사실은 좀 많이 기특했다. 가슴이 꽤, 그러니까, 가슴 속이, 빗장 같은 갈비뼈 안쪽, 새처럼 퍼덕거리는 심장의, 그 부근의 어딘가가, 분명히 그 즈음 어딘가에 있을 무언가가, 조금 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게, 그러니까, 음, 저기, 그게...”
“그게, 그러니까, 음, 저기, 그게, 뭐.”
“매그너스 님께 처음 듣는 축하는 생일로 미뤄두고 싶었어요!”
제가 소리쳐 놓고서는 새빨간 얼굴로 입가를 가린다.
두 손으로 꼭 막은 입술이 뭔가 더 말하고 싶은 듯이 오물거렸다가 이내 꾹 닫혔다. 소리치던 기세는 대체 어디로 갔는지, 다시 시무룩한 표정을 한 르네가 그를 바라보았다. 매그너스는 조금 멍한 기분으로 그 일련의 움직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뜨겁다, 간질거린다. 이렇게나 불타오르는 감각인데도 불쾌하지 않았다, 선물 상자의 포장지를 벗기기 직전과도 같은 기꺼운 들뜸과 설렘이 손끝까지 움찔대며 박동한다. 톡 건드리면 떨어질 듯이 그렁거리는 까만 눈이, 축 쳐진 어깨, 간절한 조마조마함을 담고 꼭 모인 자그마한 두 손을, 부서져 녹아내릴 정도로 꽉 끌어안고 싶었다. 제기랄, 그렇다, 이것은 귀엽다는 말로 다 담을 수 없는, 그래. 아, 그는 그 기이한 감정의 답을 알고 있다.
설탕물에 잠긴 것처럼 끈적끈적하고 달콤한 공기에 입가가 허물어졌다. 매그너스는 차마 거부할 수 없이 웃고야 말았다, 손을 뻗자 약간 움츠러드는 르네의 머리카락을 귓가로 쓸어 넘기고, 그 부드러운 까만 물결을 손으로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이 벅차 제대로 호흡할 수가 없었다. 르네는 아주 오래 비어 있던 자리를 충만하게 채워 놓았다. 어쩜 이렇게 꽉 들어맞을까, 모난 곳이라고 생각했던 부분마저 그 자체로 제 조각이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원래 제 일부였던 것처럼, 금 간 틈마저 채우며 자리한다. 내 것인가? 내 것이다. 그는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제 영토를 선언하였다.
"마저 말해 봐."
"......"
르네는 귓가에 와 닿은 손 위에 제 손을 겹치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 채 형용하지 못할 가슴의 박동이, 그 부드러운 살갗이 맞닿은 부위의 불쾌하지 않은 뜨거움, 손끝을 조금 움직이면 닿는, 오랫동안 검을 잡아 굳어진 손끝의 무딘 감각조차 꿰뚫고야 마는 녹아내리는 감각. 케이크 꼭대기에 놓인 체리처럼 아주 특별하고 달콤한. 르네는 아주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꼭 내리감긴 눈, 힘을 주어 바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까만 속눈썹, 발간 뺨과 하얀 콧등에 도는 홍조, 자그맣게 닫힌 말랑말랑한 입술, 그 일련의 움직임에 결국 매그너스는 눈썹을 늘어트렸다. 그 계집아이는, 그래, 그가 그토록 아끼고 귀애하는 자존심마저 잠시 접어둘 수 있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사랑스럽다, 그것보다 그녀에게 걸맞는 단어는 없으리라, 귀엽다, 사랑스럽다, 그 달콤함이 제 가슴속에 폭 들어와 도저히 나가지를 않았다. 제가 원래 존재했다는 듯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는 원래 여기 있었거든요, 매그너스 님이 몰랐던 거 아니에요? 하고 뻔뻔스레 주거하고 있었다. 르네는 차라리 사랑이었다, 발걸음이, 아주 작은 귀여운 움직임들, 모든 사랑스러운 몸짓과 목소리와 행위가, 그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그의 가슴 속에 본디 존재하던 감정을 인간으로 화하여 꺼내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생을 알았다. 그것은 르네가 알려 준 것이었다. 아주 예민하게 날을 세운 짐승을, 그 날 위로 맨손을 뻗어 쓰다듬어가며 자장가를 불렀다. 너덜너덜하게 되어가는 제 손을, 온 몸을 보면서도 웃으며, 그 피로 그의 몸을 적셨다. 그가 그 무엇이어도 사랑하고 숭배하리라 말하는 단 한 사람의 손 아래에서야, 그는 비로소 지독하게 공허하던 빈 가슴을 채울 수 있었다. 아주 외롭고 사나운, 검을 두르고 왕좌 위에서 초조해하던 날것의 매그너스는, 그렇게 르네의 왕으로 태어날 수 있었다.
“...저는, 저는, 그게, 그러니까...”
그는 꽤 끈기 있게, 그녀가 말을 이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르네는 늘 그를 이례적으로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특별한 이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특별하고 특이해서, 그러면서도 매그너스에게 목줄을 쥐어주어 소중해지기까지 했기 때문에. 아주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그는 조금 웃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던 손으로 볼을 매만졌다, 말랑말랑한 피부가 아주 기분 좋았다. 이렇게나 접촉이 가까워진 것도, 언제부터던가, 시작이 르네였다는 것만이 어렴풋 남아 있었다. 모든 태초가 르네였다.
“...오늘 처음으로 축하해 주시는 게, 매그너스 님이었으면 했어요...”
“생일 축하한다.”
바람의 말이 귓가에 닿자마자, 그는 조금 황급하게 속삭였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와닿은 답에 르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입가를 매만졌다. 얼굴이 조금 홧홧했다, 그렇게까지 다급히 말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기특하지 않은가. 정말로 지나치게 사랑스럽지 않은가. 그렇게나 머뭇거리고 망설이다 꺼낸 말이, 당신에게 최초로 축하받고 싶었어요, 라니.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열 두 시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야밤에 찾아왔던 것이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으며 입속으로 비속어를 중얼거렸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앞의 고 자그마한 육체를 끌어안고 한없이 입 맞추게 되어 버릴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필요는 없지 않나, 조금만 덜 사랑스러웠더라면 그의 말도 조금 덜 다급해졌을 것이다. 그가 단숨에 축하의 말을 내뱉은 것은 독점욕이 들끓었기 때문이었다, 잠시라도 틈을 주면 누군가에게 그 최초를 뺏길 것만 같아서, 그럴 정도로, 젠장,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그는 툭 터진, 사랑스럽다라는 단어를 꾹꾹 누르며 약간 달아오른 볼을 식혔다. 그는 아직 사랑이라는 단어를 쓸 수 있을 정도로 살갑지 못했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 본 적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속에서는, 아니 그렇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더더욱, 사랑스럽다는 단어가ㅡ민망할 정도로, 마구잡이로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 어쨌든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는 분명히 후회했더라도 금방 제 마음을 돌렸을 것이다. 시선을 향한 순간에 보인 것은 만개한 꽃처럼 환하게 피어난 사랑스러운 웃음이었다. 그것이 피어나는 장면을 놓쳐버린 것이 아쉬울 정도로, 그러나 그 아쉬움조차 금세 잊혀질 정도로 환한 웃음.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도 르네의 웃음은 유독 선명하고 밝아 보였다, 아주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것 같은, 바라보는 그조차 벅차오를 정도로 강한 기쁨을 담은 얼굴이었다.
“......고맙습니다...”
“......”
그는 한참 멋쩍게 입매를 매만지며 시선을 굴리고서야, 겨우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쓰다듬을 수 있었다. 고마울 것도 없다, 고작 말 한 마디에 저렇게나 기뻐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였다.
“......뭘 고마워, 그... ...자고 가라.”
그것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의 욕심이었다. 여즉 행복감이 남은 얼굴로 약간 고개를 갸웃한 르네는 매그너스의 목에 자연스레 팔을 감았다, 그러고는 고양이가 제 물건에 그러하듯이 부드럽게 볼을 부볐다. 약간 근지럽고 기분 좋은 감각에, 그는 자그마한 몸을 덥썩 끌어안고 침대에 모로 쓰러졌다. 꺅,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쓰러진 것은 상체뿐이었고 그랬기 때문에 반동이 적었다, 그 적은 반동마저 매그너스가 전부 받았으니 르네는 별다른 흔들림 없이 조금 놀랐을 뿐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맑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까르르 웃으며 그를 좀 더 꼭 끌어안은 움직임이 기어이 사랑스러웠다.
“그럼 그냥 보내시려구 했어요? 너무해.”
“아니거든, 내일 아침까지 있다 가라고. 성대한 건 못 주지만 케이크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어.”
“정말?!”
벌떡 일어나려는 몸을 붙잡아 침대에 누르자 잠시 바동대는 듯 하더니 얌전해졌다. 물론 얌전해진 것은 몸뚱이뿐이고, 르네는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할 정도로 신난 것처럼 보였다. 아주 대단한 기세에 힘을 조금 풀었더니 제 품 속에서 뒤척이며 매트릭스를 콩콩 두드린다. 아무튼 감정 전환도 빨랐다, 눈에서 반짝이가 튀어나올 것 같은 르네를 보고 불과 몇 분 전의 시무룩한 표정을 떠올린 매그너스는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었다.
“일찍 돌아가야 하면 뭐, 말고.”
“아냐! 괜찮아! 르네 저녁까지 있어도 돼요!”
그래, 그 말을 기다렸다. 그제야 가슴 한켠을 만족스러움으로 채운 매그너스는 막 돌아 누우려는 르네의 목덜미 뒤에 쪽쪽 입을 맞췄다. 간지러워요, 하고 꺄하하 웃는 소리가 들렸다. 편안한 충만함이 피어올랐다.
매그너스의 불면은 변칙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그의 수면에 규칙이 있었다. 그는 괴상하게도 르네와 있을 때만큼은 푹 잠에 들 수 있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그녀를 침대에 들이고서도 몇 달이 지난 후였다. 굳이 지난밤이 격렬하지 않아도, 고 작은 몸뚱아리를 꼭 안고 있으면 얼마 되지 않아 불면의 저주가 가시는 것이었다. 가끔 꾸곤 했던 악몽도 마법처럼 사라져 놀랍도록 편안한 밤을 보내고는 했다. 그것을 알았다고 딱히 무언가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는 한 달에 절반 정도는 그녀가 집에서 잠드는 것을 굳이 막지 않았고, 덕분에 그 정도는 불면을 앓았지만, 매그너스는 오히려 한 달에 절반 정도만 푹 잠들 수 있는 것을 매우 흡족스러워했다. 어느 정도의 경계는 필요했다, 르네는 너무 지나치게,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확실히 사실은, 혼자 잠드는 밤의 빈 온기가 어느 정도 그리웠다. 그리고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그는 적어도 내일 아침에 빈 시트와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고 가라는 말을 꺼낸 것은, 그가 눈을 떴을 때도 르네를 마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아주 비밀스러운 바람을 담은 요구였다.
“케이크는 어떤 게 좋냐.”
“오! 어차피 벨데로스 시킬 거죠? 엄청 사치스러운 삼단 화이트 초코 케이크.”
“......오빠 전쟁 중이다.”
어차피 돈 없으면 내가 가져오는데. 르네는 그렇게 투덜거리며 그의 팔 안에서 한 바퀴 굴러 가슴팍에 등을 안착했다. ...이러면 얼굴을 못 보는데. 물론 보지 않아도 꼼지락대는 온기는 더없이 사랑스러웠지만ㅡ음, 그는 제 턱 밑에 닿는 정수리에 입술을 묻었다. 조그만 머리가 그 안에서 팽팽 돌아가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듯 따끈따끈했다. 웅얼웅얼 투덜거리는 소리에 작게 하품하다 큭큭 웃은 그는, 이내 궁시렁대는 자그마한 육신을 향한 장난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손끝으로 허리를 간지럽혔다. 르네는 간지럼을 잘 타는 편이었다, 몇 초 되지도 않아 격렬하게 바동거리는 웃음소리가 튀어나왔다. 꺅, 그만 해요, 그만! 그만을 열세 번 정도 들은 뒤에야 손을 푼 그는 숨을 헥헥거리며 눈물을 닦는 르네를 빙글 돌려 제 품으로 마주안았다.
“그래서 뭐 먹는다고?”
“으응, 그냥 화이트 초코 케이크...”
“그ㅡ래, 아무튼 하얀 거 정말 좋아해.”
“......매그너스 님이 만든 건 됐어요.”
“젠장, 알아차렸군.”
“억지로 구겨 넣으면 못 먹을 것도 아닌데 오늘은 너무너무 졸ㅡ려!”
뭐, 그럼 별 수 없지. 수면욕이 다른 욕구ㅡ음, 그러니까 식욕이라든지, 아무튼 그런 것 따위를 이겨버린 모양이었다. 제 품으로 꼬물꼬물 파고드는 것을 끌어안으며, 매그너스는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우습게도, 그녀가 태어났기 때문에 그는 선물을 받았다. 불면의 저주를 풀어내는 잠, 죽음의 그림자를 디뎌 짓이길 수 있는 생, 그 모든 생을 그러모아 그에게 내미는 사랑, 그리하여 안식, 어쩔 줄 모르게 가슴이 간지러워지는. 그는 헬리시움의 11월 27일. 바로 오늘 탄신을 맞은, 제 모든 생애 가장 영롱한 선물의 박동을 느끼며 천천히 평온을 찾았다. 아마 잠꾸러기인 르네가 깨기 전에, 그가 먼저 일어날 테고, 그렇게 되면 그녀는 한 번 더, 긴 꿈에서 깨어나자마자 아주 기꺼운 축하의 인사를 받을 줄 수 있을 터다. 그 생각에 마음이 더없이 나긋해졌다.
르네는 눈을 떴다. 매그너스는 아주 긴 꿈의 아래에서 걷고 있을 터였다. 저를 품에 가둔 두 팔의 무게를 느끼며, 그녀는 터질 것 같은 가슴을 누르고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매그너스 님,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온 가슴을 파편으로 부수어 외치는 말, 매그너스도 익히 알고 있는 그 말, 그 말의 뒤에, 뒤에, 뒤에, 두 손이 벌벌 떨렸다, 입 안에서 삼키지 못한 더운 숨이 흐느낌처럼 흘러나왔다. 아, 어째서, 그녀는 사랑이었다. 그리하여 그 잔혹하고 완벽한 명제에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종족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생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주 이전에는 그녀 또한 죽을 수 있는 종족이었다. 그리하여 죽음이라는 것도 알았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을 안다고 해서 그 단어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르네의 생에는 끝이 없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죽음을 갈아 바칠 수 있었다. 그게 ‘사랑’ 이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녀는 그렇게 태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그만둘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모난 부분을 갈아 맞추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 적어도 그 칼날에 온 몸이 몇 번이고 찢겨진 끝에 그것이 더 이상 아프지 않을 정도로 무뎌졌을 정도의 시간은 된 것 같았다.
매그너스 님, 나는 당신을 만난 것을 후회해요.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내 전부를 그렇게 주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그것은 침묵의 동의어, 아주 긴 죽음과 탄생을 원망하는 들리지 않을 속삭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