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로윈
: 10월 31일. 유령이나 괴물 분장을 하고 즐기는 축제의 날


넬
매그너스 X 넬리
메이플스토리
넬리는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검은색 식탁보를 만드는 중이었다. 그녀가 앉아 있는 1인용 소파 주변에는 쓸모가 없어진 보라색 캔버스 천 조각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조금 전 만든 의자 덮개들의 흔적이었다. 오늘 그녀는 하루 종일 반짇고리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래도 꼬박 하루를 매달린 보람이 있어서, 오늘의 할 일은 이것으로 끝이었다. 집안의 모든 창문들을 가려 줄 검은 암막 커튼도, 낡고 흠집이 난 의자를 새것처럼 보이게 해 줄 의자 덮개도 전부 완성했다. 그러나 쉴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며칠 뒤에는 엄청난 양의 쇼핑을 해야 했고, 그보다 더 날짜가 지나면 더욱 엄청난 양의 과자를 직접 만들어야 했다. 하지만 넬리는 이 모든 일들이 싫지 않았다. 입가에서는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쉼 없이 바느질을 계속하는 손길에는 설렘마저 어려 있었다. 그녀는 할로윈 파티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10월 31일, 할로윈. 그날은 모두의 축제였다. 아이들은 신나게 과자를 얻으러 다니고, 청년들은 각자 회심의 분장으로 모두의 관심을 끌려 애쓰고, 노인들은 그런 아이들과 젊은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남몰래 숨겨뒀던 과자를 꺼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넬리에게 할로윈은 없는 날이나 다름없었다. 친구가 한 명도 없는데다가 소심하기까지 한 그녀에게 이런 사교적인 행사는 그림의 떡이었다. 아주 어릴 적, 언니의 손을 잡고 돌아다니던 시절 이후로는 할로윈을 즐겨 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십 년도 더 전의 즐거웠던 기억은 이미 빛이 바랜지 오래였다. 어쩌면 꿈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기도 할 만큼.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붙임성이 없었고, 남들 앞에 나서면 주눅이 드는 습관 역시 조금도 고쳐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축제에 동참할 생각이었다. 그것도 성대한 홈 파티를 열어서.
아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날릴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아무도 기꺼이 오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 뻔하니까. 물론 메이플 연합의 몇몇 친절한 간부들이 문을 두드릴 가능성은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들의 방문을 동정이나 적선으로 여기지도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고결하고 의로우니까. 하지만 넬리와 그들 사이에 흐를 공기는 파티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정적이고 어색할 것이다. 그런 파티를 그녀는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초대할 이는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매그너스, 그녀가 사랑하는 폭군이었다.
매그너스와 넬리 둘만의 축제. 그것은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다. 그녀가 사는 좁고 낡은 셋방을 꾸며서 아늑한 장소로 바꾸고, 따스한 등불을 켠 채 이야기꽃을 피우며 긴긴 밤을 지새운다면 그보다 행복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때문에 그녀는 당일로부터 보름도 더 남은 지금도 바쁘게 일하는 중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계획을 짜는 것이었다. 우선 넬리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부터 고찰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그너스는 그녀의 요리를 좋아했다. 그를 위해 그녀가 해낸 일은 수십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 그가 드러내놓고 반색을 표한 것은 식사를 챙겨 준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의 구상은 자연스럽게 그를 위한 상을 차려내는 쪽으로 흘러갔다. 또한 그녀는 요리 중에서도 과자 굽기가 특기였고, 할로윈 하면 바로 과자가 떠오르는 만큼 식탁 가득 과자를 채우기로 마음먹었다.
그 다음으로 고민한 것은 코스튬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할로윈의 꽃은 분장. 기왕 행사 기분을 내기로 정한 이상 어설프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특히 매그너스에게는 멋지면서도 독특한 옷을 입혀 주고 싶었다. 세상이 무너져도 그가 직접 분장을 하지는 않을 테니 그의 의상 준비 역시 그녀의 몫이었다. 그리고 며칠간 머리를 굴린 끝에 생각난 코스튬은, 메이플 월드 전통의 할로윈 괴담 가면신사였다. 아마 그는 모를 테지만 이쪽 세계에서는 제법 유명한 스토리였다. 악마와 거래를 하고 사람들의 영혼을 빼앗은 남자의 이야기. 부유하고 우아한 신사인 그 남자와 거칠고 호전적인 매그너스는 전혀 닮지 않았지만,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둘 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악당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세간에 알려진 가면신사의 모습대로 옷과 가면을 주문했다.
문제는 그녀 자신의 복장이었다. 도무지 적절한 코스튬이 생각나질 않았다. 그날만큼은 그에게 예쁘게 보이고 싶은 넬리였다. 하지만 스스로를 꾸며 본 적이 없는 그녀는 할로윈용으로 쇼윈도에 전시된 화려한 옷들을 보고 있자면 몸이 바닥에 닿도록 움츠러드는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매그너스 앞에서도 변함없이 수수하게 차리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저런 복장으로 나타나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통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쩌면 마치 그녀가 자주 입는 하늘색 면 드레스를 입고 있는 것처럼 태연하게 대해줄 지도 몰랐지만, 반대로 기겁을 하고 보자마자 내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조금이라도 그의 관심을 끌어 보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움을 이기고 말았다. 최종적으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주문한 옷은, 다름 아닌 바니 걸 세트였다. 의상이 도착하던 날 그녀는 포장을 보자마자 고뇌에 빠졌다. 검은 바탕에 새빨간 하트 무늬와 리본으로 장식된 상자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후회하기엔 이미 때는 늦었다. 할로윈 대목을 앞두고 모든 대도시의 맞춤옷가게들은 비상에 걸려 있었다. 한번 주문한 옷을 무르고 재주문한다면 제 날짜 전까지 수령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상자를 열어 보니 예상했던 대로 부담 가득한 의상이 들어 있었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 옷을 그대로 입기로 결심했다. 희망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자꾸만 혹시 모른다는 부질없는 기대가 머리를 쳐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찌 되었든 남자들이 좋아하기로 유명한 복장이니까.
‘…하지만 역시 망사스타킹은 안 되겠어.’
다만 그렇게 생각하며 스타킹을 주섬주섬 개어 넣고 대신 흰색 오버니삭스를 꺼내 놓는 그녀였다.
옷을 주문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집을 꾸밀 소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바로 현재 진행 중인 작업이었다. 파티가 끝난 후에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니 벽지를 바꾸는 등 대규모 단장은 불가능. 때문에 작은 변화로도 최대한 할로윈 분위기가 나도록 섬세하게 설계해야 했다. 집안이 어둡고 아늑하면서도 지나치게 답답한 느낌이 들지 않도록 커튼을 달고, 낡은 가구를 가리기 위한 각종 덮개들을 만들어 씌웠다. 잭 오 랜턴과 등잔도 필요했다. 그녀는 할 수 있는 한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이 모든 과정들이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생업뿐만이 아니라 메이플 연합원으로서의 임무도 있었다. 그러한 모든 일상을 이 일을 하느라 전부 미뤄 두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또한 단순한 일회성 이벤트용으로는 지나치게 많은 돈을 쓰고 있기도 했다. 평소 저축을 열심히 해 둬서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물론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이번 할로윈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그녀는 매그너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연심에 보답하지 않았다. 어쨌든 그가 밝히기로는 그러했다. 허나 그렇게 말하는 그는 때때로 그녀에게 애틋한 시선을 보냈다. 단둘이 있을 때 흐르는 묘한 기류는 이제 놀랍지도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한 마디는 절대로 들려주지 않았다. 어떨 때에는 달리 해석하기 어려운 의미심장한 단어들을 던지기도 했지만, 언제나 바로 다음 순간 그 말들은 흔한 장난이나 농담이 되고 말았다. 그러기를 벌써 몇 년이었다.
한편 그런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그가 그 나름대로 넬리를 제법 소중히 대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그녀가 쭉 자신의 곁에 있기를 바랐고 그녀의 허약한 몸을 걱정했다. 넬리는 이용가치가 전무한 자신에게 그가 일부러 애정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분수를 모르고 그의 앞에서 세 치 혀를 놀릴 때면 노상 죽고 싶냐고 을러대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가 그럴 마음을 먹었다면 그녀는 벌써 오래 전부터 목숨이 붙어 있지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연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넬리를 슬프게 만들었다. 일 년 중에는 특별한 날들이 무척 많았다. 서로의 생일, 크리스마스, 발렌타인데이, 화이트데이 등등. 그러나 그중 그녀가 기념할 수 있는 날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매그너스의 생일을 그녀는 알지 못했고 매그너스 역시 그녀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스스로도 기억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물론 그가 넬리의 생일을 챙기리라고는 애초부터 기대한 적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는 본래 전혀 다른 행사였다지만 현재는 완전히 연인들의 날이었다. 허나 직접 케이크를 구워 그와 나눠 먹어도 그것은 전혀 특별한 행위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와 그녀는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으니까.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항상 잊지 않고 그를 위한 초콜릿과 사탕을 챙겼지만 언제나 공허한 독백이 될 따름이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발렌타인데이도 화이트데이도, 그녀가 매일같이 반복하는 고백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물론 지금껏 수많은 연인의 날들을 혼자 챙겨오면서 우울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올해는 어떤 초콜릿을 만들까, 어떤 케이크를 구울까. 무엇을 어떻게 하면 그가 깜짝 놀라고 맛있게 먹어 줄까. 며칠을 꼬박 설레이며 고민하는 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에게 바라는 것이 없는 그에게 직접 무언가를 해줄 귀중한 핑계거리였다. 앞으로도 그녀는 가능한 모든 날들을 지금까지 그래왔듯 소중하게 보낼 것이었다. 단지 그저 친구도 연인도 아닌 이상한 관계 속에서 당당하게 기념할 수 있는 날을 일 년 중 하루 정도 가지고 싶었던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그녀의 혼잣말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아주 조금 쓸쓸했을 뿐.
그래서 두 사람의 기념일은, 연인의 날이어서는 안 되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 아닌 순수한 축제여야 했다. 그 날의 본질 그대로 즐기기 위해서. 그러면 그녀는 더 이상 그에게 거절당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날 하루만큼은. 그렇기 때문에 할로윈이어야만 했다. 그날만큼은 아무런 외로움 없이 온전히 특별한 날로서 즐길 수 있을 터였다. 그것이 그녀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넬리는 잠시 바느질감을 손에서 놓았다. 아픈 허리도 펴고 휴식을 취할 겸, 소파 등받이에 한껏 기댄 채 눈을 감았다. 허나 그다지 오래지 않아 다시 천과 바늘을 잡았다. 쉬엄쉬엄 해도 되겠지만, 매그너스와 관련된 일이면 조바심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게다가 준비 자체가 너무나도 즐거워 좀처럼 손에서 놓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속도대로라면 당초 세워뒀던 계획보다 제법 빨리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쁘게 손을 놀리는 와중에 며칠 전의 일이 떠올라 그녀는 슬며시 웃었다.
그날은 유달리 맑고 화창한 오후였다. 매그너스도 그녀도 오랜만에 한가로워서 함께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답잖은 얘기들을 나누며, 때로는 말다툼을 하고 때로는 장난을 치면서.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때 넬리는 이야기를 꺼낼 시점만을 재고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의 말소리가 잦아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매그너스, 있잖아요.’
‘안 돼.’
‘아직 말도 안 했거든요?’
‘뭐가 됐든 안 돼.’
너무나 매그너스답게도, 그는 순순히 얘기를 들어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넬리 역시 곱게 물러날 성정이 아니었다.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내주셨으면 좋겠어요. 이번 달 31일 밤에 말이에요.’
그녀는 그의 방어를 가볍게 무시하고 본론으로 이어갔다. 그도 그녀도 익숙한 일이었다. 매그너스가 부리는 괜한 심술을 넬리가 흘리거나 받아쳐 버리는 것은.
‘……뭔데. 벌써부터 불안하다.’
그때 그가 지었던 표정을 떠올리며 넬리는 쿡쿡 웃었다. 매그너스는 그녀에게 말려드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문제는 그렇게 싫어하는 주제에 항상 당한다는 점이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일그러지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부아가 치밀어 꿈틀거리던 눈썹이 참을 수 없이 귀여웠다.
‘……그러니까, 31일 밤에만 시간 내면 되는 거지?’
짜증 가득한 목소리였지만 마침내 그는 그녀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네, 그거면 돼요.’
‘기대는 하지 마라. 가기 싫어지면 안 갈 거야.’
말은 이토록 쌀쌀하게 내뱉었어도, 넬리에게 약속한 이상 어떻게든 일정을 비우려고 노력할 매그너스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에게만은 폭군이 아니었다. 스스로는 폭군으로 보이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어느덧 식탁보도 완성되었다. 오늘의 일과를 훌륭하게 끝마친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달콤한 휴식뿐이었다. 게다가 저녁에는 매그너스와 만나 식사를 함께 할 예정이었다. 아마 할로윈 전에 가질 수 있는 마지막 만남이 될 터였다. 입고 갈 옷은 미리 꺼내 두었다. 어젯밤 고심 끝에 겨우 고른 드레스였다. 그와의 약속이 생기면 언제나 그랬다. 워낙 꾸미는 데에 익숙지 않아 결국 평소의 그녀와 별 차이 없는 행색이 되곤 했지만, 매그너스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심은 어떻게 해도 사라지질 않았다.
‘물론 제대로 꾸며봤자 칭찬해 주지도 않겠지만….’
넬리는 자조했다. 그가 원래 칭찬에 인색한 남자인 건지, 아니면 그녀가 매력이 없는 건지 그녀 자신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예쁜 옷을 입으면 그에게서 예쁘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그녀가 이번 축제용으로 다소 파격적인 의상을 선정한 이유도 일부는 거기에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그에게서 특별한 반응을 이끌어내고 싶었다. 과연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일지 부정적인 방향일지는 당일이 되기 전까지는 모를 일이었지만,
‘어쨌든 노력은 해 봐야지.’
그녀로서는 최선을 다 할밖에 다른 도리는 없는 것이었다.
낮에 맞춰 둔 알람이 울렸다. 몸을 씻고 그를 만나러 갈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부푼 가슴 속에 자리한 약간의 서글픔을 외면하며 그녀는 욕실로 향했다.
* * *
“이제 뭐부터 하면 좋을까.”
식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식료품들을 보며 넬리는 가볍게 중얼거렸다. 본래 그녀는 혼잣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이번 행사 준비는 무엇 하나 설레지 않는 것이 없어 웃음기와 함께 저절로 입이 벌어지는 것이었다. 혼잣말이라기보다는 거의 흥얼거림에 가까울 정도였다. 앞으로 해 나갈 엄청난 노동이 그저 반갑기만 해, 수첩에 일의 순서를 적느라 울리는, 펜이 종이를 긁는 소리마저 경쾌했다.
그녀가 장만하려는 음식은 2인분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았지만, 파티로 친다면 간소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먹을 사람이 없어도 엄연히 파티인 만큼 이 이상 줄일 수는 없었다. 또한 시간과 몸의 한계가 있어 이보다 더 다양하게 마련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 달콤한 음료 하나와 새콤한 음료 하나, 사탕, 초콜릿, 두 가지 맛의 쿠키와 도넛, 제철 과일로 만든 젤리들, 그리고 메인으로는 커다란 애플파이가 한 개. 이 정도가 그녀가 감당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맨 처음 만든 것은 사탕이었다. 설탕이 가득 들어가기 때문에 서늘한 곳에만 보관한다면 거의 썩을 일이 없어서였다. 먼저 지난 계절에 미리 얼려 뒀던 딸기로 퓨레를 만들었다. 그리고 보글보글 끓고 있는 설탕과 물엿에 넣어 걸쭉하게 졸이고, 막대를 꽂은 모양틀에 사탕액을 부어 롤리팝을 완성했다. 선명한 빨간색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초콜릿 역시 실수로 따뜻한 곳에 두지만 않는다면 며칠 정도는 문제없었다. 게다가 만들기도 아주 쉽고 간편하기 때문에 빠르게 해치우기로 결정했다. 밀크 초콜릿과 화이트 초콜릿을 물기가 닿지 않도록 조심스레 중탕해 녹인 다음, 식혔다가 다시 중탕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이렇게 해야만 초콜릿에 윤기가 흐르고 맛도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는 몰드에 넣어 굳히기만 하면 되었다. 화이트 초콜릿에는 으레 남들이 하듯이 잘게 다진 쿠키를 넣어 씹는 맛을 더했다.
할로윈 전날에는 쿠키와 도넛을 구웠다. 원래 도넛은 발효시킨 반죽을 튀겨서 만드는 거지만, 날이 서늘해 발효가 어려운데다 튀긴지 시간이 지나면 맛이 없어질 것이 뻔했기에 오븐에 굽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본래의 것보다 훨씬 시간이 단축되는 레시피였다. 하지만 그런데도 넬리와 그녀의 오븐은 하루 종일 쉬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쿠키와 도넛을 각각 따로 깊고 커다란 그릇에 한가득 담아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계속해서 반죽을 밀고, 모양을 찍어내고, 오븐 앞을 왔다 갔다 하느라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왔지만, 트레이 위에 산처럼 쌓인 체스보드 같은 결과물들을 보니 그 정도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이 뿌듯했다.
물론 그 다음날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축제 당일이었지만 그녀는 아침부터 분주했다. 가장 나중에 만들어야 할 음식들이 남아 있었다. 과일 젤리와 음료,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구워낼 파이였다.
굳으려면 시간이 필요한 젤리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젤라틴을 찬물에 불리면서 어젯밤에 미리 내둔 석류즙과 오렌지즙에 설탕을 넣고 살살 데웠다. 그리고 충분히 불은 젤라틴을 데운 과일즙에 넣고 저어 완전히 녹인 후 예쁜 디저트 컵에 넣어 차게 식혔다.
급한 마음에 손놀림이 빨라졌다. 이제는 음료를 만들어야 했다. 새콤한 레모네이드와 달달한 포도주스였다. 어제 젤리용 과일즙을 짜면서 같이 레몬즙을 짜 뒀으면 편했을 텐데 그만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석류와는 달리 즙을 내는 데에 그렇게 오래 걸리는 과일이 아니라 천만다행이었다. 걸쭉한 설탕물에 레몬즙을 재빨리 섞어 조그만 항아리에 옮겨 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음료수는 미리 내놓으면 미지근해지기 때문에 일단 만들어만 놓고 그를 집으로 데려온 다음에야 식탁에 올릴 생각이었다. 포도주스도 마찬가지였다. 깨끗이 씻은 포도를 냄비에 넣고 자작하게 물을 부어 끓였다. 올라오는 거품을 걷어내 가면서 진하게 우려낸 다음 체에 걸러 넓은 그릇에 붓고 저절로 식도록 내버려 두었다. 뜨거울 때에는 당도를 분별하기 어려워 설탕을 얼마나 넣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두르다보니 난장판이 된 부엌을 한번 치우고, 이번에는 파이 반죽을 만들기 시작했다. 굽는 것은 거의 집을 나서기 직전에 할 예정이었지만 집안 청소와 소품 배치 등 다른 할일도 많기 때문에 시트와 필링은 미리 만들어야 했다.
먼저 체에 친 밀가루에 차가운 버터를 넣고 잘게 부숴 가며 섞어, 콩알만큼 쪼개진 버터에 밀가루가 달라붙어 부슬부슬한 모래처럼 되도록 했다. 그리고 거기에 계란을 넣고 손으로 치대 하나로 뭉친 뒤, 종이에 잘 싸서 냉장시켰다. 반죽하면서 녹은 버터가 다시 굳고 반죽 안에 수분이 고르게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비는 시간에는 사과 필링을 만들었다. 냄비에 황설탕을 고르게 깔고 불을 올려 살살 녹인 후 버터를 섞었다. 버터가 완전히 녹은 다음에는, 깍둑썰기해서 시나몬 파우더와 약간의 전분에 버무린 사과를 넣고 졸였다.
아침나절을 그토록 부산하게 보내고 쉴 틈도 없이 대청소를 해야만 했다. 매그너스를 집에 초대하는 것은 생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어쩌면 다시는 없을 일인지도 몰랐다. 그러니 만에 하나라도 그에게 나쁜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었다. 집안의 모든 창문을 열어젖혀 환기를 시키고, 거실과 부엌을 비롯해 화장실, 그리고 그가 쳐다보지도 않을 그녀의 침실까지 깨끗하게 쓸고 닦았다.
그렇게 오후 시간도 도대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금세 사라져 버렸다. 넬리는 녹초가 된 몸을 소파에 뉘었다. 가만히 쉬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기운이 다시 나지 않을 것 같아 꿀에 절인 레몬을 가져왔지만 이미 입맛조차 사라진 뒤였다. 허나 억지로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었다. 오늘만큼은 완벽한 자신이 되리라. 그러려면 몸에 활기가 돌아야만 했다. 낮잠을 자고 싶기도 했지만 시간이 애매해 오히려 더 피곤할 것 같았다.
부모님이 이 광경을 보시면 뭐라고 하실까. 그녀는 문득 떠올렸다. 한번은 이런 적이 있었다. 그에게 선물할 막대과자를 열심히 만들고 있는데, 연락도 없이 가족들이 찾아온 것이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탓에 그에게 선물할 분량 외에는 여분이 없어 눈앞에서 뻔히 과자를 구우면서도 대접할 수가 없었다. 허나 거기서 끝났으면 차라리 다행이었다. 누구에게 주는 거냐고 묻는 어머니에게 잽싸게 둘러대지 못하고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리고 있자, 그걸 또 눈치 빠른 언니가 눈여겨보고는 남자한테 줄 선물임을 대번에 알아맞혀 버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여기까지도 괜찮았다. 다 커서 독립한 딸이 연애질을 한들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정말로 난감했던 일은,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뒤에 일어났다.
‘너 이거 저번에 만들었던 그거 아니니?’
어찌 된 까닭인지 홀로 다시 방문한 어머니가, 그에게 전해주지 못한 과자 상자를 발견하고 만 것이었다.
‘왜 이게 아직도 여기 있어?’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는 할 말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왜냐하면,
‘너 설마 널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 뒤꽁무니 쫓아다니고 있었던 거니?’
매그너스가 만나주지 않아 선물을 전할 기회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에는 어찌나 예리한지, 어머니는 한참을 길길이 날뛰며 그딴 사랑 타령 당장 때려치우라며 소리 질렀다. 평소에는 딸에게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도 걱정 하나 안 하고 태평하게 넘어가면서, 가망 없는 남자에게 홀랑 반했다는 사실은 그리도 못마땅한 것일까.
냉정하게 따지자면 남자 문제는 자칫 평생을 두고 후회할 일로 남을 가능성이 결코 낮지 않은 만큼, 어머니가 그렇게 화를 내는 것도 납득은 가능했다. 하지만 그와 만나지 못한 설움에 어머니로부터 질책 받은 수치심이 더해지니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잠깐이었지만 다시는 가족들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때 어머니가 했던 말이 아직까지도 가슴에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받지도 않을 선물은 왜 만들어? 그깟 남자 하나가 뭐라고 이렇게 목을 매?’
아마 지금의 그녀를 보면 어머니는 비슷한 말을 할 터였다.
‘할로윈이 뭐라고. 그 남자가 뭐라고. 사랑이 뭐라고 네가 이 고생을 하니.’
허나 몇 번을 물어도 끝끝내 그녀에게 있어서 대답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그녀는 매그너스를 연모하고, 그 감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었다. 그를 만나기 이전의 그녀는 불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삶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알게 된 이후는 달랐다. 만약 지금 당장, 혹은 가까운 미래에 그를 잃게 된다면 그녀는 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에 대한 연심만이 그녀에게 삶을 살아갈 용기를 주었다. 내일도 모레도 그를 만나고 싶다, 그 일념 하나만으로 그녀는 이 세상이 좀 더 오래 살 가치가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할 수밖에 없어.’
넬리의 입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져 나갔다. 어느새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피로에 젖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저녁을 먹고 나서는 샤워를 해야 했고, 샤워를 한 다음에는 파이를 오븐에 넣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테이블 세팅과 몸단장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기색으로, 그러나 편안한 얼굴로 다시 한 번 부엌으로 향했다.
* * *
넬리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눈이 빨개지지는 않았는지, 옷에 구김은 없는지 하나하나 체크했다. 최소한 그녀의 눈으로 보기에 확 띄는 결점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점점 자신감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거울 속의 그녀는 토끼 머리띠를 한 채, 충격적일 정도로 짧은 길이의 검은색 탑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손에 낀 장갑에는 선명한 분홍색 리본이 달려 있었는데, 똑같은 리본을 목에도 매도록 되어 있었다. 마치 선물 포장용 리본 같이 보였다. 드레스와 같은 재질에 역시 같은 리본이 달린 용도 불명의 장우산은 아무래도 허전한 손에 들고 있으라고 준 듯했다.
‘역시 무리수였던 걸까. 내 주제에 이런….’
안 그래도 짧은 치맛자락이 자꾸만 위로 말려 올라가는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망사스타킹을 오버니삭스로 바꾼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딱히 위안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르게 제법 굽이 높은 구두도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이런 걸 신고 정말로 걸을 수 있는 걸까. 가다 넘어지기라도 할까봐 눈앞이 캄캄했다.
그런 그녀의 불안과는 별개로, 바깥은 이미 떠들썩한 축제가 한창이었다. 아이들이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그녀의 좁은 침실까지 들려 왔다. 슬슬 집을 나서지 않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았다.
넬리는 숄을 집어 들어 걸쳤다. 그에게 보여 주기 전까지 의상을 가려야 하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11월 직전의 날씨에 이런 옷만 입고 나가면 성채에 도착하기도 전에 얼어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또각또각 발을 옮겨 현관문을 빼꼼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걸음걸이가 그다지 어설퍼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도 그런대로 걸을 만했다. 다만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 거북할 따름이었다.
‘…….’
문고리가 불에 달궈진 쇠붙이라도 되는 양 잡았다 놓았다 하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서둘러 가야 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 문을 열고 나가면 모두들 그녀를 바라보며 비웃을 것만 같았다. 예쁘지도 않은 게, 봐줄 사람 하나 없는 게 그런 옷은 뭐 하러 입냐고. 숄로 가리고 있으면서도 꼭 안 걸친 것마냥 부끄러웠다.
‘……그치만, 가야겠지. 매그너스를 만나러.’
그녀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쉰 다음 문을 열었다. 그리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문단속마저 누구에게 들킬세라 최대한 조용하고 재빠르게 해치웠다.
하지만 밖에 나와 보니 실상 그녀의 그런 공포심은 기우에 가까웠다. 모두들 축제를 즐기느라 넬리를 쳐다볼 틈도 없었다. 더군다나 누가 더 눈에 띄는 분장을 하고 왔는지 경쟁까지 하는 터라 그녀의 바니 걸 코스튬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남몰래 안도했다. 걸음걸이도 조금씩 가벼워져 갔다.
한편으로는 이제 매그너스에게 줄 의상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사람들 사이에 치여서 구겨질까봐 신경 쓰기 시작했더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오만 번뇌가 다 떠오르게 된 것이었다. 소매의 솔기 마감이 제대로 되었던가. 사이즈가 너무 작지는 않을까. 벌써 전부 몇 번씩이나 철저하게 확인한 부분들인데도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두려워하는 것은, 역시 그의 고집이었다.
‘……안 입는다고 하면 어쩌지…….’
어떠한 행사나 기념일도 그에게는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휴일이라고 해서 쉴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와 함께 즐겨 줄 사람도 없었다. 거기다 그 자신이 떠들썩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분위기에 휩쓸리는 성격 또한 절대로 아니었다. 하물며 전용 의상을 입으라니. 수 백 년 동안 아마 단 한 번도 고려해 본 적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과연 넬리를 위해 그 고약한 성질머리를 기꺼이 굽혀 줄까. 그녀는 자신이 없었다.
평상시처럼 간식거리나 다른 선물을 들고 찾아 가는 거라면, 내가 당신을 생각해서 가져왔는데 받는 것도 못 해주냐고 고집을 부릴 수나 있었을 터였다. 허나 그가 축제를 썩 즐기지 않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기획한 이번 이벤트는, 아무리 열심히 준비했어도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어쨌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후회하고 없던 일로 할 수 있었던 기회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이대로 성채까지 씩씩하게 걸어가서 생각한 그대로 진행하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은 잡아 놓고 아무 일도 없다고 얼버무려 버린다면 그것이야말로 그에게 살해당할지도 모르는 짓이었다. 차라리 그가 기뻐할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믿는 편이 나았다.
복잡한 머리로 이것저것 생각하며 정신없이 걷다 보니 어느새 성채 앞이었다. 대리석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요새였다.
그녀는 문 앞에 섰다. 어지간한 힘으로는 밀리지도 않을 것 같이 거대한 철문이었다. 허나 이 문은 허락받은 사람에 한해서는 아주 쉽게 스르륵 열린다는 것을 넬리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문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조금 전 집을 나섰을 때에도 그랬듯, 어느새 또다시 움츠러들고 있는 것이었다. 수없이 여러 번 보아 온 그녀의 얼굴만 한 문고리가 오늘따라 서먹했다.
몇 분을 그렇게 망설이며 서 있었을까.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얼른 안 들어오고 뭐 하고 서 있냐?”
당연하게도,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였다.
“어…,”
급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심장이 쿵쾅거려 말문이 막혔다. 눈앞이 아찔해 쓰러지려고 하는 몸을 간신히 바로 세웠다. 그리고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채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매그너스. 아름다운 저녁이에요. 그렇죠?”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무진 애를 쓰며 되는 대로 인사를 했다. 얼굴에는 영업용 미소를 띄운 채였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 티가 나지 않기를 그녀는 간절히 바랐다.
“그래. 그런데 너 왜 어깨가 휑하냐.”
그랬다. 숄을 걸쳐도 어깨는 가릴 수 없는 것이었다. 넬리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와 눈을 맞춘 뒤, 여태 꼭꼭 여미고 있던 숄을 벗어 던졌다.
“제 할로윈 코스튬이에요. 어때요?”
그는 한동안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놀란 걸까. 당황한 걸까. 혹시 너무 별로라서 할 말이 없는 건 아닐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너……”
그는 곤란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넬리는 초조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런 취향이었냐?”
“…….”
별로구나. 그녀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각오는 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순식간에 목이 메어왔다. 그러나 꾹 참고 대답했다.
“할로윈 코스튬이거든요? 촌스럽긴.”
“뭐? 죽고 싶냐?”
눈치도 없이 평소처럼 으름장을 놓는 그였다. 원래도 그의 협박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녀였지만 오늘은 서러워서라도 더더욱 받아 주고 싶지 않았다.
“의상도 준비 안 하셨죠? 안 봐도 빤하네요.”
“그딴 거 내가 알 게 뭐야.”
“당연히 그렇게 말씀하실 줄도 알았고요. 그래서 제가 대신 준비했어요. 자요.”
넬리는 소중하게 가슴에 품고 온 의상 가방을 내밀었다. 그는 있는 힘껏 얼굴을 구겼다. 평소라면 그마저도 멋져 보였겠지만 오늘은 그저 얄미울 따름이었다.
“뭐? 안 입어. 저리 치워.”
너무나 상상했던 그대로 흘러가는 상황에 속으로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재미있거나 기뻐서는 물론 아니었다. 그녀는 여기서 포기할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저랑 제 집까지 걸어가실 거잖아요.”
“그래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한껏 거만하게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를, 그녀는 최대한 고집스러운 눈빛으로 맞받아쳤다. 그리고 마지막 공격을 시도했다.
“그 갑옷 차림으로 가시면 단번에 구경거리가 되실 걸요? 얌전히 제가 준비해드린 옷을 입으시는 게 신상에 좋을 거예요.”
“…….”
그녀는 이 공격이 유효할 것임을 확신했다. 한두 번 그와 싸워 본 그녀가 아니었다. 넬리는 그와의 말싸움에서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망할. 내놔 봐, 그럼.”
아니나 다를까. 마침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순응하고 마는 그였다. 내 옷을 혹평했으니, 당신도 벌을 받아야지. 그녀는 승리감에 차 이번에야말로 진실한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가방을 넘겨주었다.
“이렇게 말 잘 들으시니까 얼마나 좋아요. 진작 그러시지.”
“닥쳐.”
매그너스는 그 커다란 철문을 쾅 소리 나도록 닫으며 성채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 입었던 갑옷을 도로 벗기가 힘이 들어서인지, 그는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넬리는 다소 조바심을 내며 그가 옷을 입고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녀는 그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마다 항상 마음 한 구석이 찔리듯이 불안했다. 그럴 리는 없었지만 그와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 봐.
“……됐냐?”
때문에 이렇게 그가 다시 눈앞에 보여야만 안심이 되는 것이었다.
“네, 됐어요. 잘 어울리네요.”
“잘 어울리긴 무슨. 네 바보 같은 장단에 맞춰 주는 것뿐이야.”
그는 이런 종류의 칭찬에 익숙지 않은 편이었다. 그녀가 그의 외모를 추어올릴 때면 항상 눈을 피하고 우물거렸다. 드문 일이긴 했지만 심지어는 얼굴을 붉힐 때도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정을 가장하느라 오히려 더 우스꽝스럽게 굳은 표정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넬리는 픽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왜 웃어.”
“아무 것도 아니에요.”
괜히 혼자 쑥스러워 딱딱거리는 것이 그녀는 미치도록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를 향한 애정 어린 눈길과 미소에 매그너스는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얼른 길 안내나 해. 이러다 오늘 내로 도착이나 하겠냐.”
“알았어요. 어서 가요.”
매그너스 한 사람 때문에 기분이 급격한 하강과 상승 곡선을 그리는 것이 넬리는 새삼 신기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자신의 커다란 애정을 스스로 절감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녀는 더 이상 구태여 입을 열지 않고 그와 함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걸친 숄을 매그너스가 가면 속 아쉬운 눈초리로 힐끔거렸다는 것은 그녀조차 모르는 비밀이었다.
* * *
집으로 향하는 길은 당연하게도 오던 길을 되짚어 갈 뿐이었지만, 혼자 걸어올 때와는 전혀 다른 두근거림이 있었다. 조금 전에는 온통 걱정뿐이었지만 이제는 정말 그와 함께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는 그렇게나 거북하던 거리의 소음마저 즐거웠다. 가면을 쓰고 있는 만큼 연합 사람들에게 들킬 염려도 없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가면신사 코스튬을 준비한 것은 결국 옳은 선택이 되었다. 그 또한 생각했던 것처럼 나쁘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걸음걸이가 급하지 않았고 주위를 자주 둘러보았다. 신기한 구경거리가 있으면 잠시 멈춰 서기도 했다. 넬리는 이러한 그의 모습이 낯선 한편, 의외의 면모를 발견했다는 흥분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을 둘만의 날로 정한 것은 여러 모로 잘한 일이었다.
‘이제는 마지막 파티만 그가 좋아해 주면 돼.’
그것이 이제 마지막 남은 관문이었다. 과연 그는 마음에 들어 할까. 최소한 나쁜 반응은 아닐 거라고 믿고 있었다. 음식이라면 언제 갖다 바쳐도 안 좋은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까지 작정하고 차려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고, 오히려 부담스러워 할 가능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머릿속의 여러 가지 상반되는 생각들이 서로 엉킨 채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대체 뭐 때문에 오라고 한 거냐?”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를 꽉 채우고 걷는 와중에 그가 물었다. 이쯤 되면 궁금해 하는 것도 인지상정이었다. 누가 봐도 단단히 준비한 티가 나니까. 그러나 물론 그녀에게 있어서는 별로 반갑지 않은 질문이었다.
“그건 비밀이에요.”
이번 파티의 목적에는 분명 그를 놀라게 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순히 먹고 마시기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직접 보기 전에 내용을 알아서야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는 만큼, 알려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어차피 가면 알게 되는 거 아냐? 숨겨서 무슨 의미가 있는데?”
하지만 그에게 그런 섬세함을 바라기는 어렵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추리 소설도 처음부터 범인이 누군지 알고 보면 재미없잖아요.”
“난 책 안 봐서 그딴 거 모르겠는데. 그냥 알려주지?”
끝까지 고집을 부리는 그의 모습이 놀랍도록 익숙했다. 평상시의 매그너스 그 자체가 아닌가. 아까처럼 또다시 실랑이를 한 차례 벌여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절할 때보다 요구할 때 더 다루기 쉬웠다.
“가끔은 책 좀 읽으세요. 그런 식이면 카이저에게 진다고요. 두뇌로.”
그 방법이란, 약간 미안한 일이긴 했지만 그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가 정말로 지고 싶어 하는 부분이 아닌, 그의 기준으로 부차적인 곳을 언급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정말로 상처 입을 테니까. 그런 슬픈 일은 결코 바라지 않았다.
“너 오늘 아무래도 더 살기 싫은가 보군. 목이라도 따 줘?”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험악한 말을 내뱉을 때의 매그너스는 절대로 넬리에게 손을 올리는 법이 없었다. 그녀가 이미 자신의 말과 행동을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까. 확률은 반반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본인이 넬리를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우쭐대는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한편, 이 모든 것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 일부러 속아 주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와 그녀는, 그렇게 서로 모르는 척만 하는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그 어느 쪽이든 그녀에게는 그다지 상관이 없을 것이다.
“아, 다 왔어요. 여기예요.”
마침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이것저것 열심히 구경하면서 왔는데도 성채에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에 비해 훨씬 빠르게 돌아온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마음가짐의 차이인 것일까. 그녀는 마지막으로 심호흡을 했다.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곧 안으로 모셔 드릴 테니까, 아주 잠깐만요.”
“뭐야, 짜증나게. 내가 그렇게 인내심이 강하지 않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어지간히도 조급하게 구는 그였다. 필요할 땐 그렇게나 오래 기다릴 줄 알면서, 그녀 앞에서만은 꼭 다섯 살배기 어린아이처럼 보채는 그였다. 넬리가 그만큼 편안하게 느껴진다는 뜻이라면 그것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지만, 구슬리다 보면 기력이 소진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미리 체력을 소모한 날이라면. 오늘은 파티 준비부터 그를 데려오는 일까지 어느 것 하나 힘들지 않았던 것이 없었다. 허나 그녀는 속으로 이를 악물었다. 이제는 정말로, 그와 옥신각신할 일이 더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녀는 여태까지 꽤나 원하는 대로 그를 이끌고 왔다. 그러니 반드시 마지막까지 무사히 일을 마칠 작정이었다. 지금껏 들인 정성이 물거품이 되지 않도록.
“지금까지 잘 참으셨잖아요. 5분도 걸리지 않아요. 네? 조금만 더 저를 따라와 주세요.”
여태 해온 것과는 달리, 진지하고 간곡하게 청했다. 그런 그녀의 태도 변화를 그 역시 느꼈을 터였다.
“…….”
“이렇게 부탁드릴게요.”
그는 대답 대신 팔짱을 끼고서 지붕 밑 기둥에 몸을 기댔다. 그녀가 간청한 대로 시간을 좀 더 주겠다는 의미였다. 넬리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감사의 미소를 보내며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굳이 기다리게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는, 바로 미지근해질까봐 출발 전에 미리 내어 놓지 못했던 음료수를 세팅하기 위해서였다. 재빠른 손놀림으로 설탕을 넣은 레몬즙에 탄산수를 부어 저었다. 얇게 저민 레몬을 예쁘게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포도주스 역시 컵 벽면에 튀지 않도록 조심하며 레모네이드와 양을 맞춰 따랐다. 각 컵에 띄운 얼음은 세 개였다. 몇 개를 띄워야 가장 보기 좋고, 조금 녹더라도 크게 맛을 해치지 않을지 고심 끝에 정한 개수였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넬리는 울렁이는 가슴을 부여잡고 문을 빼꼼 열었다.
“이제 들어오시면 돼요.”
“…그래.”
매그너스는 석연치 않은 눈초리로 그녀를 한 번 째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묘한 생기로 반짝이는 것을 알아차린 것일까. 하기는 눈치 채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속내를 숨기는 데에는 그리 능숙하지 않은 편이었다. 특히 매그너스의 앞에서라면 더더욱. 허나 그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문고리를 잡아채 홱 열고는 성큼성큼 집안으로 들어올 뿐이었다. 그리고―
“…….”
넬리의 집은 아주 좁아서 현관에서 부엌이 바로 보였다. 때문에 그가 들어오자마자 마주한 것은 그녀가 차려 놓은 식탁이었다. 집안의 모든 조명을 전부 꺼서 어두운 가운데 식탁에 홀로 밝혀져 있는 호박등이 따스한 노란 빛으로 그녀가 준비한 온갖 것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 광경 앞에 그는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무 말도, 어떠한 움직임도 없이 다만 못 박힌 것처럼 그 자리에.
두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매그너스가 식탁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동안 넬리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상황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었다. 그가 하는 생각은 무엇인지, 그 생각은 과연 그녀가 기뻐할 만한 것인지. 허나 도저히 먼저 말을 걸 수 없었다. 덜덜 떨리는 손가락을 등 뒤에 숨긴 채 애를 태울 따름이었다.
“……이거, 혼자 다 한 거냐.”
한참을 기다린 끝에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네, 저 혼자 했어요. 당연한 얘기지만.”
그의 질문에 대답하며 넬리는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를 썼다. 뿌듯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런 중요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지금 이 자리를 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오로지 순수한 감동만을 주기를 원했다.
“이건,”
그는 목이 메인 듯 한 번 기침을 했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이야.”
그러고는 성큼성큼 식탁으로 걸어가, 직접 의자를 빼고 앉는 것이었다.
“뭐 해? 안 앉아? 이러다 날 새겠네.”
퉁명스럽게 내뱉는 그의 얼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나서가 아니라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그녀가 사랑하는 반응이었다.
“알았어요. 접시 가져 올게요.”
넬리는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걸 본 그는 언짢은 듯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린 아이처럼 분한 모습이었다. 애플파이를 잘라 두 개의 접시에 나눠 담았다. 다행히도 파이는 아직 그럭저럭 바삭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식었네요, 파이는.”
물론 필링이 차가워진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어떻게든 따뜻한 상태로 드리고 싶어서 집 나오기 직전까지 구웠는데….”
이미 이렇게나 행복한 와중에 지나친 바람이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역시 조금은 안타까웠다. 완벽을 기하고 싶었기에 더더욱 아쉬운 것이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랫입술을 내밀고 있는 그녀를, 매그너스는 못마땅한 얼굴로 턱을 괸 채 바라보았다.
“야.”
그리고 예의 무뚝뚝한 말투로 그녀를 불렀다.
“네?”
넬리는 대답하면서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모든 고난을 무사히 넘기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이 모든 일들을 그럭저럭 해낸 자신이 대견스럽고 흡족하면서도 아주 약간의 허탈감을 표정에서 감추기가 쉽지 않았다. 매그너스는 조용히 명령했다.
“고개 들어 봐.”
“왜 그러세요? …읍!”
비로소 고개를 든 그녀의 입에 파이가 물려졌다. 매그너스의 접시에서, 그가 직접 찍어 든 조각이었다.
“이거, 식어도 맛있거든?”
“…….”
“남은 거 내가 다 가져갈 거니까, 그러기 전에 먹기나 해.”
그리고 그녀의 입에 들어갔던 그 포크로 그녀 접시에서 파이를 덜어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는 것이었다. 넬리는 새빨개진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보고 다시 면박을 주었다.
“뭐야. 왜. 안 먹어? 없어진 다음에 후회해도 난 모른다.”
“아, 아니에요. 먹을 거예요.”
그녀의 심장이 곧 터져 버릴 것처럼 두근거렸다. 파이를 잘라 보려고 노력하지만 자꾸만 포크질이 엇나가는 것도 분명 그 때문이리라. 잔뜩 달아오른 뺨은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조금이라도 진정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고 마신 레모네이드는 그다지 쓸모가 없었다. 오히려 찬 기운에 가슴이 한층 선뜩해오는 듯했다.
“매그너스.”
넬리는 굳은 입술을 겨우 움직여 그를 불렀다.
“왜?”
“고마워요.”
그 외의 다른 말은 할 수 없었다. 쓸데없는 수식어를 덧붙이면 도리어 진심이 가려질 것 같았다. 따라서 이것이 그녀가 전하고자 하는 단 한 마디였다. 매그너스는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나도.”
매그너스와 넬리는 조용히 둘만의 파티를 즐겼다. 때로는 침묵이, 때로는 농담이 오갔다. 여느 때처럼 한 사람은 놀리고, 다른 한 사람이 발끈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넬리의 웃음으로 끝나 버렸다. 호박 속 노란 등불만이 너울거리며 그와 그녀를 비추었다.
그렇게, 행복한 두 사람의 할로윈이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