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칠석
: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 위에서 한 해에 한 번씩 만난다는 설화가 있는 날
레이브리엘
레이브리엘 X 시토우 이데리하
언라이트


칼로 썰은 건지 칼등으로 멋대로 짓뭉갰는지도 모를 고기의 무게를 양철 저울에 올려두고 가늠하던 주인장이 손가락 4개를 펴 보였다. 물론 레이브리엘이 그걸 아 그러세요, 하고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바로 1분 남짓 전 가게를 나간 중년 남성과 비슷한 양임에도 가격이 30% 가량 차이 났기 때문이다.
“실례지만 아저씨, 지금 제가 어리다고 등쳐먹으려는 거예요? 아하, 아니면 제가 이 곳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가? 아 그래, 둘 다일 수도 있겠네요.”
분명 이데리하로부터 익힌 루비오나 변방 국어를 써도 주인장은 귀를 후비며 발음이 이상하다고 똑바로 이야기하라는 소리만 되풀이한다. 무슨 자는 전사 끌어다 케이오시움으로 갈아버리는 소릴 지껄이는 거야. 이데리하도 자연스럽다고 해줬는데. 확 저걸 정강이를 까버릴 수도 없고. 난폭한 상상을 하고, 그것을 실현시켜버릴까 고민하고 있던 참에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를 가느다란 바람처럼 찢었다. 가게 입구에서 단정하게 걸어오는 이데리하의 모습에 주인장이 꿀꺽 침을 삼키는 소리가 레이브리엘의 귀에는 똑똑히 들리는 것 같았다. 당달 봉사가 아닌 한, 저 길다란 장대 끝을 천으로 눌러 감았어도 그게 사실 창이라는 것쯤 쉽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 청년이 불과 어제 마을 인근의 마수를 처리해준 무리의 한 명이라는 것도.
레이브리엘이 해사하게 웃으며 주인장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아저씨, 죄송하지만 제가 방금 잠깐 한 눈 팔다가 가격을 잘 못 들어서 그런데, 다시 말씀 좀 해줄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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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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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줄까?”
“괜찮아요.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디노가 많이 좋아할 거예요. 살짝 덤이 얹힌 고기가 담긴 봉투를 내려다보며 레이브리엘이 말했다. 동향 출신의 장성한 사내에게 쫄아서라도 원값을 제대로 불러줄 거라는 생각이야 했지만 덤까지 얹어줄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마을을 구한 사람의 일행이라는 것을 뒤늦게나마 알았기 때문일지도. 물컹한 고깃덩이를 손끝으로 살며시 쥐어보고 있는데 이데리하가 재차 말을 붙여왔다. 드문 행동이었다.
“…미안허다. 니랑 같이 붙어있었어야 혔는디.”
“네?”
“바가지 쓸 뻔한 거 다 알어.”
“…어디서부터 봤어요?”
“니가 등쳐먹으려는 거냐구 물을 때부터.”
“…….”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여. 디노 얘기 듣구 니 찾으러 다니다가 우연히 들은 거라서 말여.”
긍께 너무 그런 눈으로 보지는 말어. 말을 맺는 이데리하의 한 마디에 레이브리엘은 고개를 쌩 정면으로 돌리고 안면근육을 담당하는 장치들을 침착하게 움직여보았다. 그런 눈이라니,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본능이 짜맞춘 얼굴 표정이란 게 늘 그렇듯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모양이 아니었으니, 레이브리엘이 알 리 만무했다. 그녀는 고기가 담긴 봉투를 슬며시 내려다보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괜찮아요. 그런 사람들, 어느 시장 바닥에나 있는 사람들인걸.”
레이브리엘은 거짓을 담지 않고 말했다. 본인이 어찌할 수 없는 태생과 출신으로 받는 부당한 처사에 발끈하고, 당하는 족족 지치지 않고 따지기를 반복했지만 세계 도처에 그런 인간들이 쫙 깔려 있다는 것을 학습하는 일은 쉬웠고, 할 필요가 있는 일이었다. 설령 지금껏 받아온 부당한 대우를 뛰어넘는 난폭한 일이 몸에 부닥쳐도, 구태여 그녀가 고른 세계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 더불어 사는 곳이기 까닭이다. 단지 그 사이에 특별한 한 명이 끼어있다는 이유만으로. 단순하지만 필요충족조건에 부합하고도 나머지가 남는.
시장 모퉁이를 돌아 그들은 작은 광장으로 빠져나왔다. 프로폰드의 영향에 용케도 꺾이지 않고 지금껏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답게, 낡고 평평히 닳아간 돌들, 녹음 어린 나무줄기와 식물들이 군데군데 박혀있는 지면에서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고 어른들이 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군집을 이루는 무리들. 조릿대를 중심으로 어린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진 설익은 열매처럼 아래에 모여 시끄럽게 무언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잎사귀와 가지에, 일부는 반듯하게, 일부는 엉성하게 끈으로 매인 알록달록한 종이조각들과 리본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는 램프 장식처럼 레이브리엘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러구보니, 곧 있으믄 타나바타구먼.”
그녀와 같은 곳을 바라보던 이데리하가 말을 흘렸다.
“타나바타?”
“…칠석이라고도 혀. 다른 나라에두 있는지는 모르겄는디, 이런 동방 쪽엔 풍습이 있어야. 애들이 종이 같은 거에 소원을 적구, 그걸 나무에다가 매달어.”
“여름의 크리스마스같네요.”
“그른가…. 으응, 확실히 생각해보믄 좀 비슷한 부분이 있긴 혀…….”
“그럼 크리스마스처럼 유래 같은 것도 있나요?”
“유래? 으응.”
이데리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만연하게 떼는 동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되떠올려 헤집는 이야깃거리가 꽤 고물인 모양이라고 레이브리엘은 생각했다. 수려한 생김과는 완전히 안 어울리는 말투로 이데리하는 자동인형들이 서커스 하던 시절을 차근차근 짚어내는 양 이야기를 꺼낸다. 견우와 직녀가 하늘 세계에 살았다던디. 어두침침한 방 한 구석에서 램프를 끄기 전, 제 어미가 자신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이데리하는 조심스레 풀기 시작했다.
물론 이야기를 다 들은 레이브리엘의 평가는 박했다.
“자업자득이잖아. 결국 농땡이를 안 쳤다면 행복하게 잘 살았을 텐데요.”
저도 이데리하를 특별히 많이 좋아해도 다른 전사들 기억 찾아주는 걸 게을리 하진 않았다고요, 라는 뒷문장은 구태여 발설하지 않았다. 레이브리엘다운 표독스러운 감상인지라, 드물게 이데리하가 창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견우랑 직녀가 들으면 화내겠구먼. 니가 이따 종이에 소원 적어서 달아줘두, 쏙 빼놓을지두 몰러.”
“빼놓으라고 해요. 필요 없으니까, 그런 거.”
제 소원은 이미 이루어졌거든요.
직접적인 뒷말을 잇는 대신 레이브리엘이 봉투를 한 손에 쥐고 다른 쪽 손바닥을 펴 이데리하에게로 내밀었다. 그 손 안에 담긴 메시지 따위야 까맣게 모를텐데도, 팔을 내려 손끝을 살며시 쥐는 이데리하의 손의 감촉.
그래도 가급적 이 시간은 오래 이어지는 편이 행복하리라는 고집이 있기에, 소녀는 뒤늦게나마 말을 바꾸어봤다.
“뭐, 그래도 은하수를 건너 만나는 분위기는 로맨틱할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