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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행X디젤

포켓몬스터 BW

Esoruen

“디젤, 오늘 밤 바빠?”

 

이른 아침 기어 스테이션으로 온 디젤은 하행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해 대답은 않고 눈만 깜빡였다. 보통 이럴 땐 아무리 급한 용무가 있어도 ‘좋은 아침.’이라던가 ‘안녕.’같은 말부터 하지 않던가. 하지만 상대가 하행이라면 이정도 대화의 생략은 놀랍지도 않지. 금방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밤이요? 아뇨, 그다지!”

“잘 됐다! 나랑 놀러가자!”

“놀러?”

 

‘이 남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디젤의 시선은 마치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통 놀러가자고 이야기 할 거라면 낮 시간대에 여유가 있냐고 묻는 게 보통인데, 왜 하필 밤에 바쁘냐고 물은 걸까. 게다가 저렇게 쉽게 놀러가자고 하다니. 서브웨이 마스터가 마음대로 자리를 비워선 안 될 텐데.

 

“저는 괜찮은데, 하행은 괜찮아요?”

“나? 왜?”

“아니, 서브웨이 마스터잖아요? 더블 트레인은 누가 지켜요?”

“으음, 괜찮지 않아? 밤이잖아.”

 

‘아’ 짧은 감탄사를 내뱉은 디젤의 얼굴이 놀람으로 물들었다. 하행이 말하는 밤은 저녁 먹을 때쯤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그걸 이제야 알아챈 그녀는 진심이냐는 듯 다시 한 번 물었다.

 

“…잠깐, 그렇게 늦은 시간에요?”

“응! 왜?”

“안 피곤하겠어요? 다음 날도 열차에 타야 하잖아요?”

“응!”

 

저렇게 기운차게 대답하는 이상 더 물어볼 필요는 없는 거겠지. 조금 못미더운 얼굴로 고민하던 디젤은 결국 ‘어떻게든 될 거야!’라는 긍정적이기 짝이 없는 결론을 내렸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제가 걱정해봐야 무슨 소용인가. 하행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이렇게 조르는 거겠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건 그때 어떻게 할지 고민하면 되는 일이었다.

 

“좋아요! 놀러 가는 거라면 거절 할 이유도 없고.”

“그럼 나중에 보자! 응, 밤 10시 쯤. 여기서 만나.”

“네, 네. 그럼 나중에 봐요!”

 

밤 10시. 어딜 갈지는 묻지 못했지만 뇌문시티 안에서 노는 거라면 저 시간도 나쁘진 않다. 오락의 도시인 제 고향은 낮보다 밤에 더 빛나는 곳이었으니까. 다른 도시라면 정말 최소한의 불만 켜져 있을 깊은 밤에도, 유일하게 마을 전체가 밝은 뇌문시티는 멀리서 보면 마치 하나지방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샛별같이 느껴졌다. 괜히 표어가 '천둥번개처럼 현란하게 반짝이는 마을'인 것이 아니지. 근사한 야경을 떠올리자 금방 기분이 들뜬 디젤은 어느 때와 같이 배틀을 위해 슈퍼 싱글 트레인에 몸을 실었다.

 

 

 

 

 

9시 54분. 약속시간보다 조금 빨리 약속장소에 도착한 그녀는 아직 하행이 도착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벽에 기대어 섰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북적하던 기어 스테이션은 쓸쓸할 정도로 조용했다. 오늘 아침에도 조용하긴 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오늘 밤에는 어디서 재밌는 행사라도 하는 걸까. 포켓몬 배틀에 푹 빠져 주변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 놓치는 경우가 잦은 디젤은 하행을 기다리며 사람이 유난히 적어보이는 이유를 이것저것 상상해 보았다. 빅스타디움에서 야간 경기라도 하는 걸까. 어쩌면 새로운 포켓몬 뮤지컬이 나온 걸지도 모르지. 제가 어릴 때부터 즐겨온 문화들을 곰곰이 떠올리던 그녀는 어느새 제 발끝에 걸쳐질 정도로 다가온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하행, 왔어요?”

“응! 많이 기다렸어?”

“아뇨, 그다지! 그래서, 어디 가요?”

 

제 질문에 하행은 소리 내서 웃었다. 그걸 왜 이제야 물어보냐 말하는 것 같은,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것 같은 들뜬 웃음이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 걸까. 디젤은 그 웃음에 얼마나 대단한 대답이 나올까 내심 기대했지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었다.

 

“따라와!”

 

말보다는 행동이라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하행은 대뜸 디젤의 손을 잡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마치 도망가는 사람처럼 빠르고 조용히. 스리슬쩍 배틀 서브웨이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거리를 지나 최대한 외곽 쪽으로 향했다.

네온사인의 불빛도 아득해지고, 행인들의 소음도 들리지 않는 16번 도로 앞.

꽤 뛰었는데 숨도 차지 않는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멈춰선 하행이, 대뜸 몬스터 볼을 꺼냈다.

 

“아케오스, 출발!”

 

‘설마.’ 디젤은 몬스터 볼에서 나와 기세 좋게 날개를 퍼덕이는 아케오스를 보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가 데리고 있는 수많은 포켓몬들 중, 하필 아케오스를 꺼냈다는 건, 이 다음 이어질 가장 설득력 있는 전개는….

 

“자, 타. 디젤.”

“네?”

“얼른! 아, 혹시 힘들어? 올라타는 거. 디젤은 잘 안 쓰니까. 공중 날기.”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곤란해 하는 걸 모르는 걸까. 먼저 아케오스에 올라탄 그는 망설이는 그녀에게 대뜸 손을 뻗었다. 뭐라 말을 이어가려던 디젤은 눈앞에 다가온 손에 고개를 들었다가 입을 닫았다. 달을 등지고 있어서인가. 은빛 윤곽만이 선명한 하행의 웃는 얼굴이 눈부셨다.

 

“얼른. 내가 도와줄게.”

 

‘혼자서도 탈 수 있어요.’라던가 ‘어디로 가요?’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은 모두 목구멍에서 나오지 못하고 주변의 어둠에 녹아 사라졌으니까. 뭔가에 홀린 듯 그의 손을 잡은 디젤은 아케오스에 올라타는 순간 까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심해 속 조개처럼 꾹 입을 닫고 있던 그녀는 아케오스가 날갯짓을 하며 날아오르려 하자 겨우 말문이 트였다.

 

“잠깐, 역시 어디 가는지는 알아야…!”

“출발~!”

“으아악!”

 

갑작스러운 출발에 놀란 그녀는 앞에 앉은 하행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녀가 겁에 질렸다고 생각하는 건지 하행은 그렇게 귀에 속삭여줬다. 겁을 먹은 건 아니었다. 자신은 그저 조금 놀란 것뿐이었다. 횡설수설 설명하는 것은 그다지 성미에 맞지 않는 디젤은 머릿속의 반론을 치우고 고개만 끄덕였다. 대답을 들은 그의 얼굴에, 또 함박웃음이 번졌다.

차가운 밤하늘이 신경 써서 묶은 머리카락을 흩뜨리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있던 그녀는 고도가 안정되고 나자 눈꺼풀을 올려 주변을 바라보았다. 별과 달이 가득한 밤하늘은 뇌문시티처럼 눈부시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따뜻한 반짝임이 가득했다.

 

“다 왔다!”

 

밤하늘을 충분히 감상하지도 못했는데 아케오스는 벌써 착륙해버렸다. 가볍게 제 포켓몬의 등에서 뛰어내린 하행은 올라탈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당황했던 아까와 달리 이번엔 제법 익숙하게 그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디젤은 어두운 주변을 살펴보았다. 쏴아. 쏴아. 귓가에 감겨오는 소리는 익숙하진 않지만 그다지 낯설지도 않았다.

 

“여긴… 물결마을?”

“응! 바다 보러 가자. 저쪽이야.”

 

물결마을은 바다가 유명한 도시였다. 여름만 되면 사람이 몰려 온 마을이 북적거리는 휴양지가 되었고, 그 관광객들은 모두 이 바다를 즐기러 오는 거였으니까. 놀러오기엔 더없이 좋은 장소라고 하고 싶지만 지금은 봄이다. 바다로 가도 자신들을 반겨주는 건, 아마 파도소리와 갈모매의 울음소리뿐일 것이다.

물론 그게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다만 하행이라면, 북적북적한 걸 더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의아해졌을 뿐이지. 디젤은 그렇게 생각하며 앞서나가는 등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능숙하게 리드하는 하행이, 오늘따라 너무 낯설게만 느껴졌다.

 

“어제 도전자가 말해줬어. 자기는 물결마을 출신인데, 조용한 바다가 엄청 아름답다고. 봄엔 조용하다고 해줬어. 그래서 같이 오고 싶었어.”

“저랑?”

“응. 디젤이랑!”

 

역시 낯설다. 너무 낯설다. 제가 아는 하행이 이렇게 듬직했던가? 디젤은 비어있는 손으로 제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밤공기에 차가워졌을 터인 제 뺨이, 불에 덴 것 마냥 뜨거웠다.

 

“음, 여기가 좋겠다.”

 

해안가에 가까이 다가간 그는 이 조용한 휴양지가 한 눈에 다 보일 만큼 높은 곳에 멈춰 섰다. 불이 다 꺼진 마을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포켓몬 센터. 마치 패턴을 인쇄해놓은 듯 별자리로 가득한 하늘을 똑같이 비추는 바다. 간지러운 소리를 내며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던 디젤은 제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여름에 보았던 물결시티와 지금 제가 보는 물결시티는 전혀 다른 장소 같았다. 아마 오늘 하행이 데려와 주지 않았다면, 이런 모습의 물결마을은 평생 모르고 살았을 수도 있었겠지.

 

“…고마워요, 하행.”

“뭐가?”

“오늘 같이 가자고 권해줘서?”

“으음”

 

그녀의 감사인사가 뭔가 이상하다 느낀 걸까. 하행은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아니. 왜 고마워하는 거야? 다 디젤 덕분인데. 거절당했다면 안 왔을 거야. 여기. 혼자 왜 와?”

“…….”

 

아, 이 남자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결국 얼굴이 새빨갛게 익어버린 디젤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숙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눈치 없는 하행의 물음에 대답도 할 수 없는 그녀는 입을 여는 대신 얌전히 하행의 품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제 몸을 껴안는 두 팔과 가슴이 따뜻하다. 온 몸을 감싸는 온기가 좋아, 디젤은 창피한 와중에도 소리죽여 웃었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은 걸까. 어리둥절해 하던 하행도 그녀를 보며 같이 소리 내어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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