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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행X디젤

포켓몬스터 BW

Esoruen

뇌문시티는 하나지방에서 오락으로 가장 유명한 도시였다. 뮤지컬 홀과 놀이공원, 빅 스타디움과 리틀 코트까지. 다양한 놀이시설이 있는 휘황찬란한 도시는 늘 포켓몬 트레이너들로 북적거렸고, 그 트레이너의 대부분은 도시 중앙에 있는 배틀 서브웨이로 모이곤 했다.

‘배틀 서브웨이 하면 서브웨이 마스터지!’ 기어 스테이션에 모인 트레이너들의 1차 목표는 늘 한결같았다. 배틀 서브웨이의 보스. 실력 있는 트레이너의 앞에서만 모습을 드러내고 그 실력을 시험한다는 ‘서브웨이 마스터’ 그들을 쓰러뜨리는 것이 목표인 트레이너들은 오늘도 연승을 노리며 열차에 올랐지만, 부득이하게도 그 서브웨이 마스터 중 한 명은 지금 부재중이었다.

 

“상행! 우리 어디 갈까요? 어디 가고 싶어요?”

 

디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들뜬 얼굴로 상행의 손을 이끌며 앞서나갔다. 평소에도 기운이 넘치긴 하지만, 저렇게 신이 난 모습을 보는 건 얼마만이던가. 자신과 포켓몬 배틀을 할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상행은 오랜만의 외출이 낯설 틈도 없이 신난 그녀를 따라가느라 발을 바삐 움직여야 했다.

 

“그렇게 빨리 가면 넘어집니다, 디젤.”

“저 애 아니거든요? 그래서, 어디 가고 싶으세요? 처음 제안한 사람은 저니까 장소는 상행이 골라주세요!”

 

그걸 제안이라고 할 수 있나. 상행은 며칠 전 있었던 배틀을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저랑 승부해서 이기면 데이트 해 주세요!’ 그런 말을 하며 나타난 디젤은 반드시 이기겠다는 듯 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어차피 배틀은 거절할 생각이 없었지만, 갑자기 데이트라니.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상행은 흔쾌히 ‘좋습니다’라고 답하고 몬스터 볼을 꺼냈다.

 

‘그렇게 필사적인 디젤은 몇 년 만이었는지 모르겠군요.’

 

결과는 디젤의 승리였다. 꽤나 필사적으로 배틀에 임한 그녀는 그 승리가 얼마나 기뻤던 건지 제 드레디어를 껴안고 제자리에서 폴짝폴짝 뛰며 만세를 불렀었다. 처음으로 제게 이겼을 때도 그렇게 요란하게 기뻐하진 않았는데. 그렇게 데이트가 하고 싶었던 걸까. 상행은 괜히 머쓱해져 코 밑을 손등으로 훔쳤다.

디젤은 이 뇌문시티에선 나름대로 유명한 트레이너였고, 슈퍼 싱글트레인을 휘젓는 출중한 실력을 반증하듯 인기도 제법 높았다. 체육관 관장인 카밀레만큼 유명한 것은 아니어도, 배틀 트레인을 자주 오가는 사람은 누구나 알 정도의 인기라고 하면 이해하기가 편할까. 일부러 그녀와 승부하기 위해 싱글 트레인을 타는 사람도 있는데, 그녀는 굳이 데이트 상대로 자신을 선택했다.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두고, 자신을.

 

“글쎄요. 디젤이 가고 싶은 곳이라면 어디든 좋을 것 같습니다.”

 

원래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과 데이트를 하고 싶어 할 정도의 마음이라면 거기 응하지 않을 수가 있나. 하늘에 맹세코 그녀와의 승부에서 적당히 봐주거나 양보한 기억이 없는 상행은 순수하게 ‘자신과 데이트 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승리를 거머쥔 디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니 데이트 코스도, 이왕이면 그녀가 정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녀를 어여삐 여기는 그로선 그야말로 당연한 배려였다.

 

“정말요? 나중에 후회해도 전 몰라요!”

“네.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럼 놀이공원이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이 튀어나왔다는 건 처음부터 저길 가고 싶었다는 말이겠지. 상행은 쉽게 그녀의 마음을 눈치 챘지만 굳이 그걸 말로 내뱉지는 않았다.

 

“놀이공원이라, 알겠습니다. 재미있을 것 같군요.”

“혹시나 해서 묻는데, 높은 곳은 무섭다거나 그런 거 없죠?”

“없습니다. 걱정 마시길.”

“흐흠~”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디젤은 그의 말에 입꼬리를 씩 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설마 자신을 제트코스터에라도 태울 생각일까. 별로 상관은 없었지만, 겨우 그 정도로 디젤이 저런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지을까?

불안 반 기대 반의 마음을 안고 얌전히 그녀를 따라간 상행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유원지 입구에서 마주잡은 손을 꼭 쥐었다. 혹시라도 그녀를 놓친다면, 기껏 나온 데이트가 엉망이 되고 만다. 배틀 서브웨이 안에서는 지겹도록 본 사이지만, 밖에서는 같이 다닐 기회가 없었으니 이 시간을 망칠 수는 없었지. 직책상 외출을 할 시간은 없는 상행에겐 바깥을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무엇보다도 소중했다.

그리고 아마 디젤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상행이 힘을 준만큼 똑같이 힘을 주는 디젤의 손은 그녀의 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이 늦었는데도 사람이 꽤 많네요, 조금 더 일찍 나올 걸….”

 

앞만 보며 걷는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설마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상행은 디젤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기웃거렸지만 새하얀 얼굴은 귀 끝만 살짝살짝 보일 뿐이다.

언제나 자신만만한 그 얼굴에 그늘이 지는 건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걱정이 된 상행은 조용히 그녀를 따라가다가 슬쩍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 시간에 나온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을이 아름다운 시간이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네. 게다가 오늘은 유난히도 노을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 같군요.”

 

해가 지고 있는 하늘은 짙은 붉은색과 맑은 노란색이 섞여 아름답다.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마치 한 폭의 그림을 걸어놓을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발밑과 눈앞만 보며 걷던 디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들어 한참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느려지는 발걸음. 서서히 멈춰 선 그녀는 지는 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다가 슬쩍 상행을 향해 고개 돌렸다.

 

“저, 제가 타고 싶은 것부터 타도될까요?”

 

노을이 너무 선명한 탓일까. 그녀의 뺨이 평소보다 붉게 보인다.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시야를 환기시킨 상행은 디젤의 얼굴에 도는 붉은빛이 자연 현상이 만들어낸 착각이 아님을 깨닫고 부드럽게 웃었다.

 

“어디로 가고 싶습니까? 디젤.”

 

뒤에서 따라가기만 하던 상행이 가볍게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제 앞으로 당긴 손 위에 전하는 가벼운 키스. 마치 이제부터 자신이 리드하겠다는 듯 디젤의 손에 입 맞춘 그가 부드럽고 강직한 눈길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 그럼 저기로…!”

 

그녀가 가리킨 것은 놀이공원에서도 가장 눈에 띄고 가장 인기 있는 기구였다.

어쩌면 이 도시의 명물 중 하나라고도 할 수 있는 커다란 관람차. 2인용이라 어지간해서는 단 두 명씩만 태우는 뇌문시티의 관람차는, 놀이공원에 온 연인들에겐 꼭 타봐야 하는 기구로 자주 입에 오르내리곤 했다.

 

“네, 알겠습니다. 줄이 길지 않으면 좋겠는데 말입니다.”

“괜찮아요! 상행이랑 타는 거라면 줄이 아무리 길어도 기다릴 수 있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으로 그렇게 대답하고 미소 지은 그는 디젤과 함께 겨우 인파 속에서 빠져나왔다.

우려와 달리 관람차의 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어차피 금방 타고 금방 내리는 기구니까 손님이 많아도 기다리는 일은 적다는 뜻이겠지. 자신들을 알아보는 시선들을 모른 척 하며 나란히 줄의 맨 뒤에 선 두 사람은 관람차에 탈 때 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서 오세요, 즐거운 시간되시길!”

 

약간의 기다림 끝, 관람차 안에 들어가 단 둘이 되고 나자 먼저 입을 연 것은 디젤 쪽이었다.

 

“우와, 엄청 쳐다보네요! 상행이 배틀 서브웨이 밖으로 나오는 게 드문 일이긴 해도 그렇게 다들 쳐다볼 것까지야!”

“다들 저를 본 것이었습니까?”

“당연하죠! 저야 뭐 볼게 있다고?”

 

정말로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상행은 조금 의아해졌다. 아까 전 무시무시한 시선들은 분명히 자신도 느꼈다. 확실히 그 시선의 반 정도는 자신을 본 게 맞았지만, 다른 반은 분명히 디젤을 향하고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시선들은 모두 나름 유명인사인 자신과 디젤이 나란히 붙어 외출한 것이 신기해서 본 것들이겠지만, 결국 사람의 눈길이란 어느 한 곳에 머무르게 되는 법이었다.

단언컨대, 그는 자신을 향했던 시선도 나중엔 결국 그녀에게 머물러갔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신과 달리 그녀는 표정도 풍부하고 생기가 넘치니까, 이목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으니까.

 

“…아, 저기.”

“네?”

“해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저쪽.”

 

능숙하게 말을 돌린 상행이 지평선 쪽으로 고갯짓했다. 관람차의 창 너머,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태양이 산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다. 지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 환경. 거기에 디젤은 완전히 마음을 빼앗겨 나누던 대화도 금방 잊어버리고 말았다.

 

“와아!”

 

어린아이처럼 감탄한 그녀가 창문 가까이 붙어 바깥을 바라보았다. 태어나 자란 곳이라 해도 높이에 따라 다른 감동이 다가온다니. 세상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그 감상에 영향을 주는 건 높이나 하늘색뿐만이 아니었다.

아까전보다 더 붉어진 뺨. 난색을 받아 따뜻한 색으로 반짝거리는 하늘색 머리. 가장 짜릿한 승부의 마무리를 할 때처럼 생기가 넘치는 눈에는 지는 해가 가득 담겨있다.

오늘 유난히 노을이 아름다워 보이는 건 모두 그녀 때문이겠지. 상행은 평소보다 체온이 높은 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곧 정상이네….”

“생각보다 빠르군요.”

“…흐음….”

 

두 사람이 탄 관람차가 점점 높아져 가는 와중. 창문에 붙어 밖을 보던 디젤은 어느새 똑바로 앉아 맞은편에 앉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 같은 몸짓이다. 상행은 그녀의 표정에서 평소와는 다른 기류를 느꼈다.

 

“디젤?”

 

갑자기 진지해진 분위기에 그도 저절로 디젤을 향해 앉게 되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그렇게 잠깐, 짧은 침묵을 유지하는 관람차 안은 겨울이라는 날씨가 무색하게 온기가 가득 차오르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가장 높은 곳에 도착한다. 아무리 길어봐야 10초 이상은 걸리지 않을 것이다. 고지가 얼마 남지 않자 슬쩍 자리에서 일어난 디젤은 천천히 상행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점점 가까워지는 얼굴, 따뜻한 숨이 입술에 닿기 전.

 

“디젤.”

 

그녀의 어깨를 잡아 움직임을 멈춘 그가 무표정한 얼굴로 다정하게 일렀다.

 

“관람차 안에서 움직이면 위험합니다.”

“…아….”

 

안 그래도 붉은 기가 돌았던 얼굴이,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아, 귀여워라.’ 상행은 속으로 감탄했다.

조금만 움직여도 코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마주하고 있는 디젤은 곧바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그, 그렇죠? 하, 하하하.”

“네, 조심하지 않으면 다칩니다.”

“하하….”

 

어색한 분위기가 싫어 그녀는 계속 웃기만 한다. 어깨를 잡혀 앞으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뒤로 물러서지도 못하는 디젤은 결국 어쩔 줄 몰라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관람차 맨 위에서 키스를 하면 그 두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다는 속설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데이트 요청, 장소는 놀이동산, 그녀가 맨 처음 타고 싶다고 한 것은 이 관람차. 아아, 그랬던 건가. 이제야 그녀의 의도를 눈치 챈 상행이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고개를 살짝 들었다.

뜨거운 숨이 닿던 입술에, 숨결보다 뜨거운 그녀의 입술이 살짝 닿았다.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는 관람차가 내려가기 시작하고, 숨을 멈춘 가슴이 고통스러워 질 때 쯤. 그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잡고 있던 어깨를 눌러 디젤을 바르게 앉혔다.

 

“제대로 앉으셔야 합니다. 아무리 안전하게 설계된 놀이기구라도, 흔들리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네에….”

 

그리 길지도 않은 입맞춤이었는데 디젤의 표정은 그야말로 엉망이 되어있다. 아마 여기가 관람차 안이 아니었다면, 분명 발을 동동 구르며 소리라도 질렀을 얼굴이었다. 부끄러워하는 그녀에게 향하는 시선을 애써 창밖으로 돌린 상행은 귓가에 울리는 심장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그녀가 제 얼굴을 볼 여유가 없어서 다행이다. 만약 여유가 있었다면, 표정을 숨겨야 할 쪽은 제가 되었을 것이다.

휴우. 소리 죽여 한숨 쉰 그의 뺨에는 노을이 한가득 묻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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