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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후군 합작을 위해 설정을 조금 변경하였습니다.

* 노래의 왕자님 All Star 미카제 아이 루트 네타 있습니다.

 

 

  칠흑 같은 꿈에서 깨어났을 때, 수혈을 받고 있었다. 눈동자를 조금 굴리기만 해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왼쪽 팔목에는 굵은 주사바늘과 살색 의료용 테이프, 투명한 관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새빨간 피를 보고 비파는 눈을 감았다. 아이가 옆에서 말을 걸었다. 비파는 괜찮으냐는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자겠다고 얘기하자마자 그대로 잠들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 주사바늘은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아이가 간호사를 부르고 의사가 찾아왔다. 3년 전 1차 치료로 증상이 완화되었지만 병이 다시 재발해서 2차 치료를 감행하겠다고 한다. 먼저 항암제나 면역억제제, 혹은 비장절제술을 사용하는 방식으로 증상 완화와 치료를 꾀해보겠다고 했다. 제가 얼마나 피를 흘린 건가요? 의사는 금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올리고 차트를 한 번 보았다가 다시 비파를 보았다. 구급차가 데려오는 시간을 감안하면 대략 4시간입니다. 몇 시간 만에 깨어난 거죠? 비파는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의사가 하루가 지났다고 말했다. 비파는 핸드폰을 찾았다. 의사가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인 핸드폰을 건네주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 핸드폰에는 메일 5통과 전화 10통이 와있었다. 메일 한 통은 친구에게서 온 것이었다. 내일 약속시간을 확인하는 내용이었다. 핑 도는 시야를 간신히 붙잡고 못갈 것 같다고 답장을 보냈다. 그 외의 메일과 전화는 모두 한 사람의 것이었다. 미카제 아이라고 적힌 화면을 집중해서 보고자 노력했다. 그가 보낸 메일은 조금 있으면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는 내용 하나를 제외하고는 걱정을 담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와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다행히 근 1년 동안은 상태가 괜찮아서 외출을 하는 것이 부담이 되지 않았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은 아침에 목욕하러 들어갔던 욕실이었다. 현기증이 생기는 바람에 발을 잘못 디뎌 넘어졌다. 팔을 세면대에 부딪쳤는지 가벼운 상처가 났는데 피가 났다. 덜컥 겁을 먹고 만약을 대비해 구비해뒀던 약들을 먹고 처치를 했다. 피가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안 건 몸을 씻고 욕조에서 잠들었다가 현기증 때문에 깼을 때였다. 그 때는 이미 몸에 힘이 빠진 상태였다. 아이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아침에 입고 나갔던 코트는 벗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다. 코트 소매는 검붉은 피가 스며들어 있었다. 비파는 아이를 보면서 웃으려고 했다. 입꼬리가 파들파들 떨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눈꺼풀을 몇 번 깜박이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영화, 못 봤네.”

  “DVD를 주문해뒀어. 오면 같이 보자.”

  “응, 그렇게 하자. 오늘 스케줄은 잘 끝났어? 오늘은 오후까지 스케줄이 있지 않았어?”

  “다 끝내고 왔어. 예상 시간보다 30분 일찍 끝났어.”

  “바로 온 거야?”

  “당연하지. 비파를 혼자 둘 순 없으니까.”

  아이의 잔뜩 굳은 얼굴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비파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아이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기에 흔들리는 눈동자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아이가 비파를 발견한 건 마지막 10번째 전화를 걸었을 때였다. 오후 한 시, 약속시간으로부터 1시간이 지났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었지만 비파와 만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는 곧장 집으로 향했고 거실과 방에서 보이지 않자 전화를 걸었다. 벨소리가 욕실에서 들려와서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었다. 강제로 문을 열어 들어갔을 때 욕조는 이미 피바다였고 비파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3년 전 처음으로 발병했을 때, 비파는 말을 잃었고 아이는 비파 몸 상태의 심각성을 알았다. 원인조차 불분명한 자가면역질환인 에반스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비파에겐 드라마에서나 보던 병이었고 아이에겐 데이터베이스 속 수많은 데이터의 일부분이었다. 공상 이야기 같던 것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은 무척이나 잔혹했다. 비파는 자주 현기증을 느꼈고 쉽게 피로를 호소했으며 피부가 누렇게 뜨며 황달이 생겼다. 점상출혈이 일어나고 피부 점막에 출혈이 생겼으며, 온몸이 멍으로 뒤덮이는 날이 많았다. 생체기가 나는 날은 응급실에 실려 갔다. 희귀병과의 싸움은 말 그대로 전쟁이었다. 두 사람 집의 모든 모서리엔 방지용 고무가 붙었고 커터칼을 비롯한 모든 날붙이가 비파의 손에서 멀어졌다. 서랍 속 약봉지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고 비파는 일어서서 움직이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되었다. 수시로 느껴지는 빈혈로 인해 수혈을 받고자 주치의에게 문의했지만 수혈을 해도 적혈구가 빨리 파괴되고 부작용 및 항체 형성 등의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꼭 필요한 때에 하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행히 1차 치료가 조금씩 효과를 보기 시작했다. 주치의로부터 병세가 거의 완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세상을 얻은 것만큼 행복했다. 아이와 눈을 마주했을 때 맑은 웃음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비파는 얼른 병이 낫기를 바랐다.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도, 움직이기조차 힘든 것도 답답하고 마음마저 지칠 정도로 힘들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아이가 웃지 않는 것이 제일 마음에 걸렸다. 치료할 방법만을 찾아서 헤매는 그가 비파 자신보다도 더욱 힘들어 보였다. 비파는 시선을 천장으로 돌렸다. 무늬 없는 천장에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모기가 보였다.

  “모기.”

  “어디에?”

  “천장에.”

  아이가 고개를 들어서 천장을 봤지만 모기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천장을 계속 어른거리는 모기를 보았다가 아이를 다시 보았다. 물빛 눈동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다. 비파는 모기가 날아다니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거부감과 불쾌함을 느꼈다. 팔을 들어서 모기를 물리치려고 했지만 모기는 잡히지 않았다. 아이가 이불을 잘 덮어주었다.

  “비파, 조금 더 자는 게 좋겠어. 아직 현기증이 낫지 않았잖아?”

  “응, 그렇게 할게.”

  “2시간 후에 점심이니까 그 때 깨울게.”

  눈은 천천히 감겼다. 조금씩 까맣게 물들어가는 시야 사이로 아이의 물빛 눈동자가 보였다. 3년 전 병 치료에만 매달리던 때의 초조함이 가득했다. 비파는 손을 뻗어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피부를 통해 전해져오는 온기는 평소보다 더 뜨거웠다.

 

*

 

  미즈키가 병실로 찾아온 건 입원하고 이틀 후였다. 비파가 약속에 나가지 못하자 린이 먼저 아이를 찾아왔다고 한다. 아이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미즈키와 레이아에게 말했다. 자고 일어나니 세 사람 모두에게서 연락이 와있었다. 시계는 오후 1시 21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아이는 스케줄로 자리를 비웠고 모기는 여전히 천장을 맴돌았다. 비파는 세 사람에게 답메일을 보내면서 두 번 현기증을 느꼈다. 미즈키는 손수 만든 꽃다발을 들고 왔다. 장미와 제비꽃으로 만든 것이었다. 제비꽃은 시장에 유통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어? 운 좋게 들어온 거야. 꽃다발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한 번 맡았다. 미즈키는 꽃다발을 풀어서 챙겨온 꽃병에 꽂고 정돈해주었다. 미즈키가 침대 옆에 세워둔 의자에 앉았다.

  “몸은 어때? 괜찮아?”

  “현기증이 생기긴 하지만 아직은 괜찮아.”

  “피를 많이 흘렸다고 들었어. 수혈 부작용은 없고?”

  “응. 너희한테 걱정을 끼쳤네.”

  “우린 친구잖아.”

 미즈키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 비파는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미즈키가 돌아간 건 오후 5시였다. 저녁에 사촌과 약속이 있다고 했다. 미즈키가 병실을 나갔다. 혼자 있는 병실은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시계는 오후 5시 4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아이는 스케줄로 자리를 비웠고 모기는 천장을 맴돌았다. 비파는 모기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임을 알았지만 손을 들어 모기를 쳐내려고 했다. 모기는 손끝에서 맴돌았고 그 날개 소리는 시끄럽고 집요하게 들려왔다. 몇 번을 더 팔을 흔들고 피로를 느꼈다.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다시 시야가 흔들렸다. 비파는 손을 내렸다.

  아이는 시계가 딱 6시 30분을 가리켰을 때 병실에 들어섰다. 세미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있기에 물어보니 화보 촬영용으로 입었던 옷이라고 했다. 검은 정장은 아이의 몸에 딱 맞게 제작되어서 그의 키와 체격이 더 돋보였다. 비파는 옆에 앉은 아이를 보면서 말했다. 목이 말랐는지 목소리가 갈라져서 나왔다.

  “린한테선 별 다른 말 없었어?”

  “너에 대한 걱정뿐이었어.”

  “그럴 것 같았어.”

  “사흘 후에 오프라고 찾아오겠다고 했어.”

  “레이아도 같이 오겠대?”

  “레이아는 이틀 후야.”

  비파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침대 옆 서랍 밑에 있는 냉장고에서 물을 꺼냈다. 컵에 조금 물을 따라서 주었다. 물을 마시고나자 목소리가 조금 돌아왔다.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비파는 다시 이불을 덮어썼다. 아이가 의자에 앉아서 비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는 초조함과 동시에 단호함을 담고 있었다. 거기에 비파가 할 수 있는 것은 웃어 보이는 것뿐이었다. 아이가 말했다.

  “비파, 난 치료 방법을 찾을 거야. 외국에서 이루어지는 연구나 의료계 논문을 모두 뒤져서라도 반드시 찾아낼 거야. 비파와 계속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응. 나도 더 힘낼게. 아이의 옆에 계속 있고 싶으니까.”

  아이가 비파의 손을 잡았다. 비파는 아이가 현재 의학계에 알려진 에반스 증후군에 대한 데이터 외에는 마땅한 치료방법을 데이터베이스 속에서 찾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사실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비파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병을 낫게 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이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면.

  아이가 피곤할 테니 얼른 자라고 말했다. 증상 중 하나인 용혈성 빈혈로 인해 쌓인 피로로 비파의 안색은 하얗게 질려있었다. 비파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이의 엄격한 눈초리에 눈을 감을 수밖에 없었다. 손에서 아이의 체온이 느껴짐과 동시에 오른팔에 모기가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 피를 빨고 있겠지. 점점 더 떨어지는 체력과 무거워지는 몸을 느끼며 비파는 모기를 탓하고 병을 탓했다. 시야에선 점점 빛의 흔적이 사라져가고 다시 칠흑 같은 꿈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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