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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GGER WARNING!}

 

* 케이크버스 AU(인데 요소는 그다지 나오지 않는군요), 식인, 감금 등의 범죄를 소재의 근간으로 합니다. 민감하신 분은 피해 주세요.

* 본 작품 내 캐릭터의 상호간에 존재하는 교류 및 관계는 현실에서는 결코 긍정적이지 못한 (권력이 기울어진 채 유지되는) 관계입니다... 인간과 인간은 동등하며 어느 한 쪽이 우위를 차지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관계는 결코 올치 안습니다...... 혹시 현실에서 하고 계신다면 도망쳐

* 범죄를 하지 맙시다 범죄는 어떤 이유에서든지 용납되지 않씁니다 죄를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합니다 죄를 지어서 죄책감을 느끼면 합리화 말고 감옥에 갑시다

 

 

 

 

매그너스는 잘게 다진 당근을 도마에서 냄비로 밀어 넣으며 몇 번 건성건성 스프를 휘저었다. 막 감기를 앓고 난 꼬맹이에게는 아무래도 고기보다는 스프가 낫겠지. 이번만큼은 항의하더라도 봐 줄 생각이 없었다, 아픈 사람에게 식단 결정권 따위는 주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몸도 약한 게 무슨 스키장을 가겠다고 난리야. 눈이 보고 싶어서라는 핑계를 대며(그가 생각하기에는 아마 반 정도만 사실이고 반은 그를 놀리기 위해서임이 분명했다) 부득불 그를 스키장으로 끌고 간 꼬마는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던 차 안에서 나동그라져 끙끙 앓아눕고야 말았다. 아니 대체 왜? 몇 번 타지도 않아 놓고? 그러게 가기 싫다니까. 손해 보는 건 저 쪽인데 왜 자신이 전전긍긍해야 하는지 영 모를 일이었다.

커다란 냄비에서 고소한 김이 올라온다. 그는 스프를 몇 번 더 휘젓다 냄비의 뚜껑을 덮었다.

 

잠시 찬장에서 커피를 찾다 며칠 전 꼬마의 커피우유 제조로(이것저것 죄다 털어 넣어 놓고 맛있을 거라고 하더니만 절반이 넘게 그에게로 남겨져 넘어왔던 것으로 미뤄 보아 별로 뛰어난 작품은 아니었다) 전부 다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을 상기하고 코코아로 바꿔 들었다. 어차피 그거나 그거나 그에게 딱히 큰 차이는 없었다. 쓴 걸 싫어하는 꼬맹이에게는 굉장한 차이가 있겠지만.

유리로 막힌 창 너머로 투명하게 비춰 보이는 세계는 꽤나 차가워 보였다. 눈이 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제법 평화로운 일상이었다.

 

 

추리에 미친 광탐정이라든지 살육이 없으면 잠을 못 자는 전쟁광 같은 비이상적인 부류를 제외하면, 보통 평화를 싫어하는 인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극히도 보통에 속하는... 사실은 그 정도로 보통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상당히 보통에 가까운 인간이었다.

치기어린 호기심으로 평화를 으깨고 투닥거릴 나이는 지났다, 꽤 지치는 인생이 아니었던가. 안온한 일상 속에서 흘러가는 평화도 나쁘지는 않았다, 자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던 요리나 독서 따위에 취미를 두게 된 이후로 그닥 지루할 일도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는, 제 일상 속에 툭 들어가 앉아 있는 꼬맹이의 육아를 담당하게 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야, 자냐. 돌멩이야."

"......"

 

가장 안쪽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침대 위, 동그마하게 놓인 이불 뭉치가 움찔거린다.

 

“좀 살 맛 나냐.”

 

어제까지는 누워서 말도 못 하더니 이불을 덮어쓰고 자는 척 하는 것을 보아하니 꽤 호전된 모양이었다. 매그너스는 침대 끝에 걸터앉아 이불 뭉치 한가운데를 톡톡 두드렸다.

 

“밥.”

“......”

 

이불 뭉치가 더 둥그레진다.

 

“...나 말고, 너 밥.”

“......”

 

꼬물대는 이불 뭉치를 몇 번 쓰다듬자 이내 자그마한 머리통이 이불 끄트머리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열이 덜 내린 듯 발그레한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다, 이건 무슨 삶은 문어도 아니고. 매그너스는 머리카락을 가만히 손으로 거둬 주며 조금 부드럽게 물었다.

 

“아직 아프냐.”

“......”

“......”

“......응.”

 

아마도 볼이 있을 자리를 톡톡 건드리자 기운 빠진 목소리가 천 너머로 웅얼웅얼 뭉개져 새어나왔다. 역시 하루 만에 다 나을 리는 없나, 매그너스는 제가 아팠던 적을 떠올리려 한참이나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는 평균보다 한참이나 건장하고 강하고 건강한 사내였고, 꼬마는 평균만치 못한 엷은 체력을 가진 소녀였으니까. 그러니까 꼬맹이가 열 번이 넘게 감기가 걸릴 동안, 그는 오히려 기력이 넘쳐서 펄펄 뛸 수도 있을 정도로 차이나는 신체조건을 비교해 봤자 애 감기가 나을 방법이 생각나지는 않는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마지막으로 아팠던 적이 언제였던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아프네, 요 꼬맹이가 건방지게 반말도 하고.”

“......응.”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응......”

“...얼굴 좀 보자, 얼마나 아픈가. 응?”

 

 

매그너스가 그런 상냥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정말로 드문 일이었다. 그를 아는 누군가가 봤다면 얼굴만 닮은 다른 사람이리라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매그너스는 그 사나운 눈매만큼이나 모난 성격에 이리저리 뻗친 머리카락만큼 제멋대로인 구석이 있는 인간이었다. 평균 정도의 윤리는 존재했으나 자신의 안위가 좀 더 중요한 자기중심적인 남자.

다만 놀랍게도 그에게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서, 그러니까 적어도 아픈 꼬맹이를 매도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지. 그는 달래듯이 속삭이면서도 내심 제 한계에 감탄하며 꼬마의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끝부분만 빼꼼 내밀어진 머리통이 따끈따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꼬마는 이불 안에서 웅얼대는 소리를 몇 번 내는 듯 하더니 이불 밖으로 얼굴을 반쯤 내밀었다. 기운 없이 반쯤 감은 눈이 몇 번 느릿느릿 깜빡인다, 축 쳐진 속눈썹 아래로 까만 눈동자가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땀에 젖은 얼굴에 홍조가 가득했다, 손으로 이마를 덮자 그득한 열기가 얼굴에서 올라온다.

그래도 어제보단 낫다, 어제는 제 말을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열이 들끓고 있었으니. 아무튼 이렇게 쉽게 앓아눕는 주제에 무슨 스키장을 가자고. 왜 쓸데없이 그런 영화가 나와 가지고. 인상을 비죽비죽 구기며 제 머리를 꾹꾹 누르던 매그너스는 문득 저를 물끄람 바라보는 눈동자를 발견하고는 애써 표정을 풀었다.

 

 

“부엌까지는 갈 수 있냐.”

“...귀찮은데...”

“네가 문어숙회냐? 인간이면 아파도 좀 움직이고 그래야지.”

 

 

그는 꼬마의 앞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겨주고는 이불을 걷어냈다. 따뜻한 이불 밑에 숨어 있던 하들하들한 육체가 차가운 바람을 맞고 동그마하게 오므라든다. 평소에는 별 변화도 없는 표정에서 이번만큼은 진득한 원망이 느껴졌다.

 

 

“열 좀 내려라. 별로 춥지도 않은데...”

“추워요...”

“......보일러도 빵빵하구만.”

 

 

잠옷도 좋은 거 사 줬잖아. 그가 지금 입은 옷보다 입을 비죽 내밀고 느적느적 걸어오는 꼬마의 몸 위에 걸쳐진 폭신한 재질의 잠옷이 세 배는 두꺼웠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실은, 그는 잠옷을 사 본 적마저 없는 사람이었다. 늘어진 옷은 밖에서 안 입고, 편하게 입는 옷은 집에서도 입고. 더우면 대충 벗었고 추우면 대충 더 입었다. 물론 지금이야... 집에 여자가 한 마리 있으니 내키는 대로 벗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지만.

그가 대충 험하게 살아온 만큼 꼬마는 곱고 소담히 살았다. 몇 년을 텅 비어있던 옷장이 석 달 만에 꽉 찼다, 당연하지만 잠옷만으로.

잠옷 사 주세요, 편한 잠옷 사 주세요. 재질 좋은 잠옷으로 부탁드려요. 여름에는 더우니까 얇은 걸로 따로 부탁해요. 그리고 귀찮으니까 웬만하면 원피스가 좋아요. 슬리퍼도 부드러운 걸 좋아해요. 잘 안 신긴 하지만 수면양말도 하나쯤 있으면 좋겠네요. 그는 요구를 맞추느라 영혼을 탈곡당한 채 안팎을 돌아다녔다.

 

아무튼 처음 만날 때부터 지금까지 영 특이한 꼬맹이였다, 그와 키를 맞대면 자 하나는 족히 남을 정도로 작고ㅡ정확히는, 매그너스가 지나치게 큰 것이었지만, 엷다랗고, 약하고, 그보다 퍽 어리고.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당연하게도... 매그너스는 잠시 제 관자놀이를 문지르다 종종 뒤따라 걸어오는 꼬맹이를 흘끗 바라보았다.

 

 

“...너는 나 안 무섭냐.”

“......?”

 

 

미간이 살짝 좁아진다.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 상태로 눈동자만 올려 그를 쳐다본다. 새삼스럽게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완전히 사람 말 못 하는 놈 취급당하고 있다. 저거 진짜.

한 번 더 입을 열었다가는 밥이나 달라는 말이 나올 것 같으니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의자를 턱짓했다. 열이 가시지 않은 발간 얼굴로 주저앉듯 의자에 등을 기대는 아픈 얼굴에 매그너스는 영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국자를 들었다.

 

정장을 입으면 특히나, 조직폭력배로 왕왕 오해 당하곤 했던ㅡ그러니까 프리랜서라고 몇 번이나 설명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밖에 나갈 때 격식 차린 복장을 절대 하지 않았다ㅡ사나운 인상, 왼쪽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에 웬만한 성인 남성도 움츠러들게 만드는 거구. 그는 자신이 잘생겼다고 확신하는(꼬맹이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않았지만) 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굉장히 험악한 인상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뭐 물론 그만큼 성격이 더럽기도 했고. 활개치고 다녔던 왕년의 기억을 떠올린 그는 잠시 민망하게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무튼 그는 그래서 눈을 마주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사람은 대부분 매우 유감스러운 반응을 보이고는 했으니까.

 

 

“넌 참 특이한 꼬맹이야...”

“네.”

“진짜 할 말 없게 만드네.”

“아파요.”

“......예.”

 

 

정말 한 마디도 안 진다. 매그너스는 한숨을 내쉬며 스프가 든 그릇을 식탁 위로 올렸다. 딱히 환자는 아니었지만 안 먹으면 죽으니까 본인의 것도 함께 떠서 올렸다.

 

 

“싱거우면 소금 뿌리고 짜면 물 넣어라.”

“......”

 

 

꼬마는 묵묵히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썩 몽롱한 표정이었으나 눈빛만큼은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늘 그랬다, 처음부터 언제나, 꼬마는 늘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곤 했다. 아주 차분하게, 괴이할 만큼 평온하게.

매그너스는 묘하게 머쓱해진 기분으로 어깨를 늘어트렸다. 그리고 그제야 평화로워졌다.

 

...이상하게 평화로웠다. 늘 이런 식으로. 혼자 살기에는 좀 넓던 집안은, 겨우 한 사람이 더해진 것만으로 안온한 포근함이 들어찬 공간이 되었다.

그는 턱을 괴고 느릿하게 스프를 떠먹는 꼬마를 바라보았다. 꼬맹이와 그는 놀랄 정도로 다른 부분이 많았다, 마른 땅처럼 갈라지고 거친 그의 짙은 손과 펜도 제대로 쥐지 못했을 것 같을 정도로 가느다랗고 창백한 손. 똑같이 핏줄이 도드라져도 그의 손에는 핏대가 서 있었고 꼬마의 손은 피부 밑으로 비춰 보였다. 살아온 삶만큼, 세월만큼, 운명만큼.

그는 꽤 사나운 눈매였는데 꼬마는 동그마하게 아래로 쳐진 눈매를 하고 있었다. 뻣뻣하고 짧은 그의 머리카락과는 다르게 같은 샴푸를 쓰는데도 이상하게 보드랍게 구부러지는 긴 머리카락. 둘 다 비슷한 검은빛이었지만 그는 조금 회푸른빛이 돌았고 그녀는 완전히 새까맸다.

어른스러운 얼굴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문득 바라보면 앳되기 짝이 없는 꼬마였고. 조금 더 밝은 표정을 하고 있으면 분명히 그 누구의 시선도 끌 수 있을 정도로 반짝이겠지. 매그너스는 잠시 생각하다 조금 진지하게 속삭였다.

 

 

“넌 웃지 마라.”

“......?”

“넌 지금 이대로 음침한 게 딱 좋아. 딱.”

“......”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네가 시선 끌면 내가 곤란하니까 그렇지. 매그너스는 머쓱하게 스프를 휘휘 저었다. 안 먹으면 죽으니까 예의상 몇 숟가락 퍼먹으며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있자 꼬마가 그의 그릇을 숟가락으로 몇 번 두드렸다.

 

 

“식기 가지고 장난치지 마.”

“......”

“......입 없냐?”

“......더 주세요.”

 

 

쟤는 대체 왜 입 두고 자꾸 나랑 텔레파시를 하려고 하지? 매그너스는 가볍게 혀를 차곤 제 그릇을 밀어주었다. 조금 시무룩해진 표정으로 그릇을 받으려던 꼬마가 멈칫하곤 그에게 그릇을 도로 밀었다, 어째 영 질색하는 표정이다.

 

 

“드세요.”

“...뭐, 더 달라며. 몇 숟가락 안 먹었어.”

“굶지 마세요.”

“안 굶는... 아.”

 

 

...그렇지, 참. 그는 미묘하게 미간을 꿈틀거리다 그릇을 도로 받았다. 다시 퍼 담기 귀찮아서 대충 때우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애 하나 잡는 일이었더랬다. 꼬마의 것을 다시 채워 담는 김에 제 것도 조금 더 덜어온 매그너스는 가늘게 한숨을 쉬었다.

그나저나 식욕이 꽤 돌아왔나. 병증에는 뭘 제대로 삼키지도 못하더니 지금은 잘 먹는 것을 보니 역시 많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하루 더 푹 자면 괜찮아지리라. 오히려 식욕이 없는 것은 매그너스 쪽이었다. 사약이라도 마시는 듯이 조금 식은 스프를 원샷한 그는 퉁명스러운 얼굴로 그릇을 내려놓았다.

 

 

“이제 됐지.”

“......”

“아, 뭐.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라. 너 지금 속으로 내 욕하지.”

“아저씨는 눈이 예뻐요.”

“...허? 뭐?”

 

 

꼬마는 가만히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별... 낯간지러운, 생소하다 못해 이해조차 안 되는 소리다, 매그너스는 어색하게 눈을 몇 번 굴리다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

 

 

아, 이번에는 정말 속으로 욕 하고 있다. 그는 힐난하는 듯한 시선을 의식적으로 피하며 스프를 한 그릇 더 떴다. 아니 그러니까 왜 소름 돋는 소리를 하고 있어. 그는 딱히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나에게 예쁘다는 말을 해 준 건 네가 처음이야... 따위의 감성이 있을 리가 없었다. 소름 돋은 팔을 몇 번 쓸며 자리에 앉자 꼬마가 퉁명스럽게 몇 마디 덧붙였다.

 

 

“색이 예뻐요. 라임 사탕 같아서.”

“...너 라임 사탕 먹고 싶냐?”

“이러니까 말을 안 하죠.”

 

 

이번에는 매그너스가 힐난하는 시선으로 바라볼 차례였다. 예쁘고 자시고 뜬금없이 무슨 눈 색 타령이란 말인가. 자신이 무섭지 않느냐는 말의 대답인가? 그러나 겨우 눈동자가 예쁘다고 사나운 눈매가 가려질 일은 없다. 큰 키도, 짙은 색의 피부도, 커다란 덩치도 거친 손과 흉터도. 그리고 자신이... 굳이 따지자면 꼬마에게는 눈동자가 예뻐서 그가 무섭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에 별로 무섭지 않은데 문득 눈동자가 예뻤던 것뿐이리라. 그러니까 역시 저 꼬마는 심장이나 간 같은 것이 두 개 정도 달린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꼬마는 말없이 스프를 오물거렸다. 식기 달각이는 소리, 이번에 턱을 괸 쪽은 매그너스였고 바라봐지는 쪽은 꼬맹이였다. 잠시 흐르는 조용한 침묵 속에서, 매그너스는 조금 초조한 기분이 되었다.

 

문득 꼬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영화 보고 싶어요.”

 

 

매그너스는 잠시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가... 이내 인상을 팍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잠이나 자.”

“저번에 보던 거 이어 볼래요.”

“퍼질러 자.”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단 말이에요.”

“아, 잊어!”

“시간 좀 남아 있던데...”

“아아아, 몰라, 몰라, 몰라.”

 

 

그는 그릇을 대충 싱크대에 밀어 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또, 하필, 매그너스에게는 아주 불행하게도 꼬마는 마지막 스프를 막 떠먹은 참이었고 결국 그는 졸졸 따라다니는 꼬마에게 두 손을 들었다.

 

 

“...젠장, 왜 하필 이런 영화야.”

 

 

퍽 마음에 들지 않는 주제였다. 정말 불행하게도 그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만큼 꼬맹이는 그 주제를 마음에 들어 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두 손으로 제 눈을 가리며 소파 위에 주저앉았다. 팝콘 먹고 싶어요. 네가 튀겨. 스키장 또 갈래요? ......

 

 

“제엔장, 알겠다, 알겠어!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것도 혼자서 못 해?”

“다녀오세요.”

“뭘 다녀와, 전자레인지 코앞이거든?”

 

 

꼬맹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냉동식품인지 건조식품인지, 아무튼 몇 분만 데우면 팝콘이 되는 문명의 옥수수 낱알을 꼬마에게 그대로 던져 준 매그너스는 딱 죽고 싶은 표정으로 소파에 늘어졌다.

 

 

“......다른 거 보면 안 되냐?”

“네.”

 

 

......단칼이다. 꼬마는 은근히 고집이 강했고, 그는 고 맹랑한 꼬맹이를 포기한 눈으로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감쌌다.

끔찍하게 싫었고, 싫은 만큼 끔찍했으나, 매그너스는 결코 그 조그마한 꼬마가 원하는 것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건방져도 그에게는 다소 무리가 없을 것들이었으나.

그러나 시시각각 다가오는 이 기묘한 불안감은, 그 무엇을 하더라도, 평온한 일상과 짧은 농담 사이에서 문득문득 칼날처럼 번뜩이는 이 불안은.

 

 

그가 그녀를 납치했기 때문에.

 

 

매그너스는 삼 초마다 앓는 소리를 내며 튀겨 온 팝콘을 기계적으로 집어먹었다. 뭐라더라, 몇 년을 납치당한 여자의 실화를 그대로 영화로 만든 이야기라던가. 사실 그가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그것이 실화라는 부분이었다. 납치범의 입장에서 인질이 탈출하는 영화를 보고 있는 것은 꽤나 괴로운 일이었고, 더 괴로운 일은 그것을 자신의 인질이 아주 흥미진진하게 관람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누가 보면 합의된 납치인 줄 알겠다. 납치범과 인질이 나란히 앉아 납치범과 인질 영화를 보고 있는 장면이라니 참으로 반인륜적인 농담거리가 아닌가. 쟤는 모럴이 없나? 매그너스는 속이 터질 것 같은 심정으로 팝콘과 함께 제 주먹을 씹었다. 그러나 그는 납치범이었다. 납치범! 합의라고는 영 퍼센트, 굳이 따지자면 맨틀까지 마이너스 퍼센트. 억울하다고 말해보고 싶어도 차까지 렌트하고 꼬박 반나절을 대기했던 주제에 우발적이고 충동적이었다는 소리를 하기에는 지랄도 그런 지랄이 없었다. 젠장, 이렇게 생겨도 범죄 기록은 없는 사람이었는데.

원래 성격이 그닥 좋은 인간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는 소시민... 이었던 사람이었다. 매그너스 자신조차도 제가 훼까닥하면(다시 말하지만 그는 계획범이었다) 이런 미친 짓을 시행할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을 정도로.

......그러나 굳이 말하자면, 그는 운이 굉장히 좋은 인간이었다. 사건의 발단부터 현재까지 줄곧.

 

 

“...쟤 왜 죽냐?”

“죽네요. 납치범이... 죽네.”

“나 보지 마라.”

“......”

“안 죽을 거다. 안 죽을 거라고.”

“......”

 

 

애초에 아저씨가 죽을 일도 없을 건데. 꼬마는 무심하게 대답하며 스탭롤이 내려가고 있는 TV를 바라보았다. 매그너스는 물을 한 컵 가득 삼키며 아주 복잡한 심정으로 그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는 운이 좋다. 우연히 늦은 발현으로 미맹 살인자라는 낙인을 피했고 겨우 며칠 만에 그의 유일한 식량을 발견했으며ㅡ그것은, 그의 인질은, 꼬맹이는 도망치지도 반항하지도 공포에 떨지도 않았으니까.

 

 

“......르네.”

“네.”

“...미안,”

“......”

 

 

매그너스는 천천히, 열로 달아오른 뺨을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는 운이 좋았고, 어쩌면 그녀도 그랬다. 그야, 납치범에게 잡힌 것 자체는 턱없이 불행한 일이었지만. 그는 울렁이는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며, 하얀 볼 위에 조심스레 입을 가져다 대었다.

가볍게, 입술이 닿는다. 크림처럼 달콤한 촉감, 혀를 대고 있으면 녹아버릴 것 같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혓바닥 끝에 보드라운 바닐라 맛이 스몄다.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입을 조금 더 벌리고 뺨을 가볍게 입에 머금었다. 깨물고 싶다, 씹고 싶다, 혀 밑에 끈끈한 침이 고였다. 오래 전에 먹었던 것 같은 슈크림이 문득 떠올랐다. 가볍게 이빨로 짓누르면 달콤한 크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러나 물론 그것보다 더 달콤할 것이다, 잇새로 스미는 바닐라 시럽, 버터 향이 나는 스펀지 케이크,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커스터드 크림. 매그너스는 필사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살에 파고드는 손톱 끝에 통각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그녀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도망치고 싶지 않아하듯이.

 

 

매그너스는 입 안에 잔뜩 고인 군침을 삼키고, 하얀 크림 같은 뺨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말 씹어 먹을 것 같았다, 물론 조금 정도는 봐 줄지도 모르겠지만ㅡ웬만하면 그는 이 조그만 꼬마를 그다지 해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작고 달콤한 먹잇감을 놓아 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아마 그 본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르네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가 뭔가 말하려던 순간 아주 느긋하고 평화롭게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주 이상하리만치 순순하고 얌전하게.

 

언젠가 물었던 적이 있다, 도망치고 싶지 않느냐고. 르네는 언제나처럼 가만히 그를 바라보며 도망쳐야 하느냐고 물었다.

이 꼬마는 어딘가 이상하다, 뭔가 망가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만큼, 그녀도 매그너스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일상은 이상하게도 평화롭고 마는 것이었다.

 

 

문득 르네가 속삭였다. 눈 와요, 아저씨. 아, 그럼 스키장은 갈 필요 없겠네. 그거 도망치기 실패했잖아요. 그러냐? 그럼 가도 돼. 안 갈 건데요. 아픈데 왜 추운 곳에서 사서 고생해요. 뭐 인마, 그럼 어제는 왜 가고 싶다고 했어. 눈 보고 싶었다니까... ...

그는 영영 도망치지 않을 자신의 인질과 함께 창밖을 바라보았다, 느긋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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