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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맑은 저녁 무렵. 12월답게 날씨는 차고 매서웠지만 성채로 날아가고 있는 매그너스에게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바람은 얼음으로 된 칼날처럼 그의 얼굴에 부딪쳐 왔지만 지금의 그에게는 무시할 수 있는 고통이었다.

 

  그는 평소 귀가하던 것보다 다소 빠르게 속도를 내고 있었다. 뒤에서 느릿느릿 따라오는 스펙터 군단들이 뒤처지고 있었지만 어차피 알아서 따라올 테니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석양이 비쳐 금빛으로 번쩍이는 호박색 눈동자에는 생기가 가득했고, 가쁜 숨결 속에 웃음이 섞여 나왔다. 전신에서 환희를 뿜어내는 그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바로 조금 전의 전투에서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니까.

 

  그것은 정말이지 완벽한 승리였다. 지략으로도, 무력으로도 연합을 훌륭하게 찍어 눌렀다. 연합의 간부들만 오늘 몇 명을 도륙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스펙터들더러 가장 먼저 후방의 비숍 군단을 기습하도록 명령했었으니 그들이 다시 살아날 가능성은 희박했다. 지금까지 그에 대한 연합의 주목도는 그의 능력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았었다. 허나 이제는 그 누구도 그를 무시하지 못하리라. 어쩌면 애송이 데미안 따위보다 먼저 치러 와 줄지도 몰랐다. 이는 그가 가장 바라는 바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위치한 헬리시움 성. 그곳은 수십 년, 메이플 월드 시간으로는 수백 년간 매그너스가 점거하고 있는 노바의 왕성이었다. 까마득한 옛날부터 천혜의 요새로, 만약 그가 다르모어와 연합하지만 않았더라면 그 어떤 외침도 허용하지 않았을 철옹성이 이제는 폭군의 성채라고 불리는 그의 거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이를 불의로 생각하지 않음은 물론이었다. 대리석으로 지어지고도 고유의 방어 마법으로 몇 천 년 동안 순백색을 유지하고 있는 성채가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매그너스는 거대한 정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보통 때라면 그 앞에는 어두운 회랑만이 펼쳐져 있었을 터였다. 허나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넬리가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파란색 드레스에, 잘 어울리는 청금석 머리핀을 달고서.

 

  “매그너스―!”

 

  그를 부르는 넬리의 목소리에도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녀의 눈에는 그를 향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달려오는 속도 그대로 있는 힘껏 그에게 안겨 드는 넬리를 매그너스는 평소와 다르게 꽉 안아 주었다. 원래 그는 여간해서 넬리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적이 없었지만, 지금만큼은 너그러워질 작정이었다. 이는 전과 덕택에 기분이 좋아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승전보와 함께 귀가하는 그를 반겨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그녀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어서 와요, 어서 와요….”

 

  어찌나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지, 거의 울듯이 웃으며 저 말만을 반복하는 넬리였다.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을 맞추고, 몸 어딘가 부상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고, 그러면서 다시 끌어안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동시에 해내느라 몹시 부산스러웠다.

 

  “그래, 그래. 진정해. 내가 이렇게 여기 있잖아?”

 

  오랜만에 주인을 만나는 강아지처럼 안절부절 못하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는 그가 이렇게 자신을 어르는 것을 좋아했다. 들썩이던 어깨가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있어 웅얼거리는 소리로 그녀는 물어왔다.

 

  “식사 먼저 하실래요? 아니면 목욕부터 하실래요?”

 

  “음, 식으면 안 되니까 식사부터 하지.”

 

  소식을 듣자마자 날아와 곧장 부엌으로 달렸을 넬리가 눈에 선했다. 그의 끼니를 직접 챙겨 주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가 오늘 같은 날 만찬을 준비하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이것밖에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그녀였다. 매그너스는 그 말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그녀의 요리는 맛있었기 때문에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는 식당으로 향했다. 도무지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는 넬리를 어쩔 수 없이 안아든 채였다. 원래 적당히 달래 준 뒤 떼어 놓을 요량이었지만, 붙잡을 데도 없는 갑옷을 끈질기게 붙들고 버티는 그녀를 억지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의 승리를 그 자신보다 그녀가 더 즐기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이렇게 평소에는 상상조차 감히 못할 짓거리들을 거리낌 없이 시도하는 것을 보면.

 

  하지만 아까도 그랬듯 관대하게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조금 전 그가 그러기로 결심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닿는 벽이, 바닥이, 기둥이 모두 눈부시게 희었다.

 

  분명 오늘 새벽 출정을 나설 때만 해도 엄청나게 쌓인 먼지 때문에 거의 회색에 가깝던 이 석조 건물은, 아무리 생각해도 혼자 청소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구역이 아니었다. 헌데 지금 그가 보는 모든 구석구석이 전부 반짝반짝 윤이 나도록 깨끗하게 닦여 있는 것이다. 특별히 스펙터들에게 명령을 내린 적은 없으니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는 너무나 명백했다.

 

  “……너 말이야……,”

 

  “네?”

 

  “너무 무리한 거 아니냐?”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얼굴이 닿아 있는 그의 목 언저리에서 속눈썹이 팔락이는 감촉이 느껴졌다. 한 번, 그리고 다시 또 짧게 두 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여기, 네가 청소한 거잖아.”

 

  “……아.”

 

  그가 직접적으로 이야기를 꺼내고 나서야 겨우 생각이 났다는 듯 반응하는 넬리였다.

 

  “딱히 그렇게 무리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단순하게 쓸고 닦았을 뿐인걸. 가구 같은 장애물도 없고 말이에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말처럼 단순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넬리에게 승전 소식을 알린 것은 과히 오래 전이 아니었다. 아마 그의 발길이 닿을 곳들만 겨우 해 놓은 것이겠지. 하지만 저 허약한 몸으로 식사까지 늦지 않게 준비하면서 그만큼 일한 것도 놀랍고 딱할 따름이었다. 매그너스는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두 사람은 식당에 도착했다. 넬리는 몸을 뒤틀더니 폴짝 뛰어내렸다. 그 모습이 우스워 매그너스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한 표정이 온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여기 앉아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얼른 내올게요.”

 

  거의 거만하기까지 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어지간히도 열심히 준비한 모양이었다. 얼마나 회심의 역작이면 저럴까. 기대가 되는 한편,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알겠습니다, 넬리 님. 언제까지나 기다려 드리죠.”

 

  대놓고 자신을 놀리는 그에게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평상시보다 너그럽게 행동하는 것은 매그너스뿐만이 아니었다. 넬리 역시 여느 때 같았다면 그가 이렇게 웃음기를 약간 비치는 것만으로도 금세 토라져 버렸을 터였다. 허나 오늘은 그가 무슨 맘에 안 드는 짓을 하건 웬만한 일들은 모두 넘어갈 태세로,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도 충분히 즐기고 있었다. 그러한 태도가 매그너스에게도 뻔히 보이기에 저렇게 농담을 던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한번 예쁘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생각 외로 그녀가 다시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제법 걸렸다. 이미 식어서 데워야 했던 걸까. 아니면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던 걸까.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음식을 가지고 나오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자, 둘 중 어느 한 쪽도 정답이 아니고, 그저 접시에 담아서 가지고 나오는 데에만 이렇게 오랜 시간이 든 것뿐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거, 대단하기도 하네.”

 

  그녀가 가지고 나오는 엄청난 양의 접시를 보면.

 

  “헤헤, 많이 드세요.”

 

  샐러드는 두 가지였다. 삶은 문어와 새우가 들어간 호화로운 샐러드와, 바삭하게 튀긴 닭고기가 들어간 약간 매콤한 샐러드가 있었다. 어느 쪽이든 입맛을 돋우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거기까지만 해도 놀라운 정성과 맛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가리비 관자 구이와 오리 고기, 그리고 쇠고기 안심 스테이크는 영원히 접시가 비지 않았으면 할 정도였다. 쫄깃하고 달콤한 관자 살은 씹을 때마다 입안에서 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부드럽고 기름진 오리와 쇠고기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가 좋아하는 익힘 정도를 정확히 맞춰 나온 고기들은 불평할 만한 구석이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또한 가장 기가 막힌 점은, 그렇게 열심히 먹어댄 뒤 속이 느끼하다고 생각할 무렵 그의 앞에 놓인 디저트가 라임 셔벗이라는 사실이었다. 차갑고 산뜻한 셔벗은 지금 그가 바랄 수 있는 최상의 음식이었다. 날카로운 산미와 어우러지는 단맛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평소 그를 위해 만들던 디저트들과 마찬가지로.

 

  멈출 줄 모르는 그의 포크와 나이프를 넬리는 내내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매그너스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식사를 마쳤다. 말할 시간조차 아까울 정도로 입안이 즐거웠던 한 끼였다. 그리고 그동안 그녀에게 자기 몫의 접시가 없었다는 사실을, 매그너스는 식사가 끝나고 그녀가 그릇을 치우러 일어난 다음에야 눈치 챘다.

 

  “잠깐. 너 지금까지 아무 것도 안 먹었잖아. 어떻게 된 거야?”

 

  “전 아까 만들면서 대강 먹었어요.”

 

  그 말은 정신없이 일하는 와중에 식탁도 아닌 부엌 작업대 위에 놓고 서서 허겁지겁 먹었다는 뜻이었다. 보나마나 제대로 접시에 담지도 않았겠지. 매그너스는 눈썹을 찌푸렸다.

 

  “나 혼자 편하게 먹어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야. 고생은 네가 하고.”

 

  “그치만 제가 그 시간에 같이 식사를 해서는 제때 음식을 내올 수가 없는 걸요. 몇 입 먹고 부엌에 다녀오고 또 몇 입 먹다 도로 달려가느니 차라리 먼저 먹어치우는 게 나아요.”

 

  일리는 있는 말이었다. 그 점이 더더욱 매그너스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녀는 그를 완벽하게 대접하기 위해 편안함을 포기한 것이었다. 넬리는 항상 그런 식이었다. 그를 위해서라면 그녀 자신의 불편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겼다. 그녀의 그런 면모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지만, 마주할 때마다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저미이듯이 아파오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아프달까, 조금 화가 난달까…. 왜인지는 모르겠군.’

 

  저 아이가 자신을 학대하건 말건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데. 그는 생각했다. 스스로도 약간 놀라울 만큼 신경질적이었다.

 

  “그럼 이제 목욕물 받아 드릴게요. 갈아입으실 옷만 직접 가져오세요. 다른 건 제가 준비해 놓을 테니까요.”

 

  “그래.”

 

  매그너스는 옷장을 열었다. 그의 방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전부 넬리의 정리 담당이었지만, 속옷만큼은 그녀가 건드리지 못했다. 때문에 장롱 안에서 유일하게 말쑥하지 못한 곳은 속옷이 든 서랍이었다. 당연히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보기 흉한 것이 문제였다. 그 외의 구석들이 지나치게 깔끔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이럴 때 목욕 시중이 있으면 좋을 텐데….”

 

  그녀가 감히 만지지 못하는 것까지 정리해 줄 수 있고, 이미 식곤증이 돌기 시작한 몸을 직접 움직일 필요 없이 욕조에서 그저 편히 쉬이도록 해 줄 그런 노예가.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가 해 드려요?”

 

  그러나 이를 혼잣말로 받아들이지 않은 인간이 한 명 있는 모양이었다.

 

  “…….”

 

  그리고 물론 매그너스도 그녀의 농담을 농담으로 넘겨 버릴 수 없었다.

 

  “그게 아니면 꿈도 꾸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넬리는 그를 욕실로 안내했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이 꼭 가시처럼 뒤통수를 콕콕 찌르는 것만 같았다. 바로 조금 전의 대화가 그랬듯이. 매그너스는 괜히 큼큼 헛기침을 하며 욕실 문을 닫았다.

 

*     *     *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이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별들이 유독 다른 때보다 더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분명 넬리가 낮에 창문을 말끔히 닦아 뒀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다. 목욕으로 기분 좋게 데워진 몸이 식지 않도록 따끈한 차를 마시며 감상하는 풍경이 제법 고왔다.

 

  “스콘 맛있죠?”

 

  “응. 맛있네.”

 

  그가 씻는 사이에 넬리가 과자를 구워 차와 함께 준비해 둔 것이었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부엌 뒷정리를 끝내고 문득 창밖을 내다보니 뜻밖에 바깥 경치가 보기 좋아, 창가 테이블에 앉아 구경하며 다과를 즐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만들었다고. 매그너스는 아무리 해도 그녀 같은 감수성은 지닐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분위기가 그에게도 몹시 편안하고 즐겁다는 것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매일이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떨어지는 유성을 쳐다보는 그를 바라보던 넬리가 툭 던진 말이었다. 매그너스는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좋냐?”

 

  “네. 하루 종일 너무나 행복하네요.”

 

  그녀의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필시 다른 속생각 없이 보이는 그대로일 터였다.

 

  “네 일도 아닌데. 넌 참 이상하다니까.”

 

  이는 매그너스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기 자신도 아닌 남의 일에 어째서 이다지도 기뻐하는 것인지. 그녀가 그렇다는 것은 항상 봐 와서 잘 알고 있었고 이번 일에 대한 반응 역시 마찬가지로 예상 가능한 범위 안이었다. 그러나 피상적으로 아는 것과 실제로 가슴 깊이 깨달아 아는 것은 완전히 달랐다. 한 마디로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제 일은 아니지만 당신 일인걸요. 매그너스도 그렇지 않아요?”

 

  “뭐가?”

 

  “매일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는 거요.”

 

  일견 그럴 듯한 말이었다. 보기 드문 전과를 올린 날이었고, 깨끗한 집에서 훌륭한 식사를 들었고, 뜨거운 물로 개운하게 목욕도 했다. 거기다 이제는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밤하늘을 감상하고 있는 참이니 이보다 더 팔자 좋은 인간은 없을 터였다. 그는 다시 한 번 넬리를 훑어보았다. 역시 저 파란색 드레스가 최고였다. 그녀의 파란 눈과 잘 어울리니까.

 

  “……글쎄…….”

 

  허나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여기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딱히 그렇지는 않은데.”

 

  그것은 단순한 고집이었을까, 아니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었을까. 그는 짧게 끊어 말했다.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야. 내 목표는 더 위에 있거든. 알잖아?”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목소리가 상당히 딱딱하게 들렸다. 그 때문인지 넬리가 목을 움츠리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그의 감정 변화에 매우 민감했다.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행복하지 않아요?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렇다고 해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않을 넬리는 아니었다. 그녀는 변함없이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또박또박 반박했다. 요만큼도 동요하지 않은 투였다. 희미하게 젖어 있던 목소리 끝에서 아주 조금 슬픔이 묻어나는 것 같았던 것은 그의 착각이었을까. 고민해 볼 만한 문제였다. 그러나 매그너스는 그런 착각에까지 관심을 할애할 만큼 섬세한 남자가 아니었다. 때문에 지극히 잠깐 생각을 멈추었을 뿐, 다시 고개를 돌려 버리고 말았다.

 

  “행복 좋아하시네. 진정한 행복은 이런 게 아냐.”

 

  왜인지 갑자기 전조도 없이 짜증이 나서 말이 다소 거칠게 나와 버렸다. 행복. 평상시에는 그다지 고려해 보지 않는 단어였다. 그가 행복을 향해 전진하고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단지 눈앞의 일들을 그 나름의 방식대로 처리할 따름이었고, 그것은 유쾌할 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성가실 때가 훨씬 많았다. 다만 그 모든 일들에는 한 가지 방향성이 있었다. 매그너스 자신의 평생의 목표가 그것이었다. 그 목표 덕택에 그나마 이 귀찮은 업무들을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업무를 수행하는 삶이 절대로 행복하지 않은 것 역시 확실했다. 그렇다면 진짜 행복이란? 짐짓 자신만만하게 단언은 했지만 정작 그 역시도 답이 뭔지 알지 못했다. 이는 그에게 가벼운 불쾌감을 일으켰다.

 

  “내가 도와줄까?”

 

  헌데 어디선가, 생각지도 않은 낯선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깜짝 놀라 주위를 살폈다. 그러나 시야에 걸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테이블 아래쪽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야, 여기. 너무한 거 아냐? 세상에는 키가 작은 생물체도 있다고.”

 

  내려다 본 테이블 다리 근처에는, 아주 작은 남자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괴이한 인물이었다. 그렇게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아이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가 봐도 눈치 챌 만한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큰 문제가 아니었다. 기묘하게도 그 아이는 마치 노이즈가 낀 흐릿한 영상처럼 윤곽이 어렴풋했다. 게다가 몸 전체에 색이라고는 없었다. 살아있는 생물에게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었지만, 꼭 소설책 속 흑백 삽화 같이 보였다.

 

  그런 기괴한 이가 그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넬리는 자기도 모르게 몸서리쳤다. 본래의 그녀라면 대단히 미안해하며 사과를 했겠지만, 지금 그녀는 예의를 차릴 정신머리가 없었다. 오로지 아연하고 두려워할 뿐이었다. 매그너스 쪽은 최소한 무서움을 타지는 않는 만큼 좀 더 사정이 낫긴 했지만, 어쨌든 갑자기 나타난 아이에게 질색하는 것은 똑같았다.

 

  “넌 뭐야? 여기엔 어떻게 들어왔지?”

 

  매그너스는 적의를 가득 담아 물었다. 어린 모습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곳에 기척도 없이 침입한 이상 평범한 어린아이라고는 여길 수 없을 터. 여차하면 베어 버릴 생각으로 검 손잡이를 쥐었다. 하지만 아이는 간단히 말했다.

 

  “검에서 손 떼. 넌 나한테서 듣고 싶은 얘기가 있을 거야.”

 

  그리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왔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가장 절대적인 일은, 역시 그거 아닌가?”

 

  “……뭘 말하는 거지?”

 

  그렇게 어려 보이는 아이 치고는 말솜씨가 굉장히 능숙했다. 여태까지 줄곧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자신의 화술로 넘어뜨렸을 법한, 그런 본새였다.

  “너희, 행복을 찾고 있잖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어쩐지 아이의 이목구비를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끔찍하게도 기분 나쁜 일이었다. 매그너스뿐만이 아니라 넬리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까부터 숨을 죽인 채 그의 뒤에 숨어만 있는 그녀였다. 완전히 겁에 질려 얼어붙은 채 움직이지를 못하고 있었다.

 

  “딱히 찾고 있었던 건 아니다만, 그래서? 그걸 네가 찾아 주겠다, 그런 말인가?”

 

  이를 본 매그너스는 그래서 과장해서라도 평정을 유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선수를 치자 아이는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예의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눈치가 빠른걸. 바로 그거야. 그게 아니라면 내가 여기 올 이유가 없지.”

 

  “그래, 올 이유가 없지. 맞아. 그러니까 꺼져.”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 누구한테나 필요한 거잖아!”

 

  예상치 못한 흐름에 아이는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럴 만도 하다고 매그너스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라고 던진 발언이었으니까. 그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끌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단지 한 순간이라도 더 빠르게 이 불청객을 내쫓고 싶을 뿐이었다. 매그너스는 팔짱을 끼고 연달아 쏘아붙였다.

 

  “세상에 그런 듣도 보도 못한 친절을 베푼다는 편리한 얘긴 거의 다 사기더군. 그러니 어서 나가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 그런 문제였어? 그거라면…,”

 

  아이는 입이 찢어지도록 웃었다. 번진 듯이 흐린 윤곽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웃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사실만은 알 수 있었다. 불쾌한 광경이었다.

 

  허나 아이의 다음 말을 들은 매그너스는, 그러리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지만, 그 역겨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좋아, 본론을 말하지. 난 악마야. 네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지. 대신, 내가 제공한 기회로 실패하면 네 영혼은 내 것이야.”

 

  악마.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결코 인간에게 이롭지 못한 존재. 영혼을 가져간다는 소리도 아마 흔한 비유 따위가 아닌 있는 그대로의 진실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그너스는 아이의 제안이 마음에 끌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더 높은 지향점에 다가서기를 끝없이 바라고 있었으니까.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인지 모른다면 알아내면 되는 일. 그렇다면 더더욱 이 찬스를 놓쳐서는 안 되었다. 조금 전 느꼈던 미지의 불쾌감을 없앨 계제가 그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 자신의 진실한 속마음을 알아내고, 또한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는 호기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발로 바닥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완고하게 끼고 있던 팔짱 역시 이미 풀린 채였다. 대신 테이블 위에 턱을 괴고, 여전히 무뚝뚝하지만 아까보다는 훨씬 풀어진 얼굴로 아이 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되지?”

 

  넬리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그의 옷깃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매그너스는 무시했다. 아이는 만족스럽게 손을 비비기 시작했다.

 

  “내 힘으로 이공간에 문을 열 거야. 그러면 넌 그 안으로 들어가서 네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알아내고 그 증거를 가져오면 돼. 여러 가지 방법으로 힌트가 등장할 테니 눈에 불을 켜고 알아맞히도록 해. 성공한다면 그것을 정말로 너에게 주도록 하겠어. 물론 실패한다면…, 알지?”

 

  “증거라 함은?”

 

  매그너스는 눈썹을 까딱였다. 그가 들이민 계약에 귀가 솔깃하긴 했지만, 방금 전에도 말했듯 사기에 당해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끝까지 들어 봐서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등장하면 바로 물릴 생각이었다.

 

  “네가 정답을 찾으면 파랑새가 나타날 거야. 그 파랑새를 가져오면 돼.”

 

  “파랑새라. 꽤나 특이하군. 그럼…”

 

  그렇게 하겠다, 라고 말하려던 순간,

 

  “안 돼요.”

 

  재빠르게 대답한 것은 그가 아니라 넬리였다. 매그너스는 그녀에게로 홱 고개를 돌렸다.

 

  “뭐야. 너보고 가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절대 안 돼요, 매그너스! 잘못하면, 혹시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영혼을 빼앗긴다고요!”

 

그  녀는 사뭇 절박하게 외치고 있었다. 그가 아이와 거래를 하기로 거의 마음을 정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아서일까. 그러나 그는 그녀의 설득을 들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왜 실패를 하냐. 너 날 그렇게 못 믿어?”

 

  “하지만…!”

 

  아이는 이미 신바람이 나 깔깔 소리 내어 웃으면서 움츠린 몸 그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음산한 그 모습에 넬리는 더욱 강하게 매그너스를 붙들었다.

 

  “제발…, 제발 가지 말아요. 여기 나랑 같이 있어요.”

 

  그러나 그는 매정하게도 그녀의 팔을 뿌리쳐 버렸다.

 

  “방해하지 마. 이건 기회야. 난 내 행복을 찾을 거라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지간에, 한 방에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 그리고 넬리는 다시 한 번 그를 잡았다. 이번에는 어설프게 옷자락만 잡은 것이 아니라 허리를 끌어안는 것이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게 핏기가 가시도록 단단하게 깍지를 낀 채였다.

 

  “당신의 행복은 여기 있어요. 부디 알아 줘요.”

 

  흔들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완연히 물기가 어려 있었다. 그의 등에 댄 이마에서, 떨고 있는 어깨에서 간절함이 묻어 나왔다. 만약 지금 이 순간 그를 말릴 방법을 누군가가 알려 주기만 한다면 그녀는 글자 그대로 뭐든 할 것이었다. 허나 그러한 기적은 필요할 때에는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의 말을 무시했다. 사실 거의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다. 행복은 최소한 그가 아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는 것일 테지.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붙들고 있는 손만은 뿌리치기 힘들었다. 이토록 간절하게 그에게 매달리는 넬리를 본 것은 그녀를 알게 된 이후 처음이었다. 동정심이 일기보다는 역정이 났다. 이 여자는 자기가 뭐라고 생각하기에 내 결단을 방해하는 건지. 그는 스펙터를 소리쳐 불렀다.

 

  “매그너스…?”

 

  스펙터들이 자신의 양 팔을 매그너스로부터 떼어내 꽉 붙잡는 것을 보고 넬리는 불안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그는 그녀에게 대답하는 대신 스펙터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감옥으로 데려가.”

 

  넬리는 저항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레벨이 높아도 무기를 지니지 않은 마법사가 인간도 아닌 스펙터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는 절망 속에 감옥으로 옮겨지겠지만, 실상 그리 가엾은 일은 아니라고 매그너스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헬리시움 성의 감옥은 지상 2층에 위치하면서 제법 커다란 창문까지 달려 있어서 쾌적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격자 쇠창살 덕분에 그리로 탈옥할 수는 없었지만. 거기다 노바의 왕성이었던 시절부터 그놈의 인권인지 뭔지 때문에 아예 마법이 걸려 있어 언제나 깔끔하고 살기 좋게 유지되고 있었다. 나한테 반항하는 여자가 갇히는 곳 치고는 지나치게 황송하지.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게다가 돌아오면 바로 풀어 줄 거고 말이야.’

 

  만약 실패해서 영혼을 빼앗긴다면 영영 그녀를 풀어주지도 못하게 되겠지만, 그는 그러한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껏 웅크리고 있던 아이가 드디어 제대로 몸을 일으켰다. 공중에서 헤엄을 치는 것 같은 희한한 거동이었다. 그러고는 허공에서 문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한 사람이 겨우 몸을 통과할 만한 좁은 나무문이 생겨났다.

 

  “자, 이리로 들어가. 일방통행이고 출구는 정답을 찾으면 저절로 생길 거야. 제한 시간은 해가 뜨기 전까지. 아, 그리고…”

 

  아이는 의미심장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오답을 찾아 버리면 그 오답을 현실로 가지고 오게 될 수 있으니까 주의하고. 그럼, 행운을 빌게.”

 

  매그너스는 아무 말 없이 문고리를 잡았다. 망설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몸짓이었다. 뒤에서 이미 멀어진 넬리의 울부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어렵지 않게 묵살할 수 있었다. 이제부터 그는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 여정을 떠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불안감이라고는 이상하리만치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문 너머로 한 발짝 성큼 걸어 들어갔다.

 

  문 안쪽을 걷는 것은 몹시 기묘한 느낌이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일어나도 더 이상 신기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었고, 실제로 그다지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상상해 본 적 없었고 앞으로도 못할 기분인 것 또한 맞았다.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 전 아이의 얼굴을 보고도 도무지 어떤 생김새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것처럼, 확실히 존재하는 길을 나아가고 있었지만 그가 걷고 있는 길이 정말로 길인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꿋꿋이 걸었다. 어차피 길은 일방통행이라고 했으니, 틀린 방향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을 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주변의 윤곽이 점점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흐릿하게 서 있을 뿐이었던 기둥들이 나무로 변했고, 하늘을 어둡게 뒤덮고 있던 장막은 잎사귀가 되었다. 밟고 있는 바닥도 이제는 제대로 된 땅으로 보였다. 그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았다. 우거진 나무숲을 헤치며 걸어가던 매그너스는 그의 시야를 가리는 마지막 나무 한 그루의 잎을 헤집어 치우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렇지, 이쯤 되면 나와야지.”

 

  그곳은 그가 나고 자란 도시 헬리시움이었다.

 

  매그너스는 언덕을 내려갔다. 도시는 침공이라는 단어 따위는 모른다는 듯, 뛰놀고 있는 어린 노바들로 가득했다. 또한 아이들을 흐뭇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는 어른 노바들도 있었다. 매우 익숙한, 그러나 그가 아는 지금의 그들보다 훨씬 앳된 얼굴들이 보였다.

 

  문득 그는 허리춤이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이세리움이 없었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하지만 놀랄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매그너스는 자신의 손을 눈앞으로 가져와 살펴보았다. 당연하게도 그가 아는 그 손이 아니었다. 훨씬 어리고, 기가 막힐 정도로 강건치 못했다. 본래의 그의 손만큼 굳은살이 제대로 박여 있지 않은 것이 너무나 생소해, 꼭 자신의 손이 아닌 것만 같았다. 거울을 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그런 물건을 휴대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마 이곳은 그가 아직 어렸을 시절의 그란디스. 분명 자신의 신체 역시 그 시절로 돌아간 것이었다. 그렇다면 여기에는…

 

  “왔어, 매그너스? 오늘 나랑 대련해준다고 했잖아. 어서 가자.”

 

  아직 이 시점에서는 그의 친구였던 어린 선대 카이저도 있기 마련이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서먹하면서도 낯이 익었다. 이는 어린 카이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의심스러운 점이 있었다. 이곳이 정말로 그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재현한 곳이라면 절대 등장하지 않았을 한 마디.

 

  그는 절대로 카이저와 대련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선대 카이저의 이른 각성 이후 단 한 번 대련을 해보고, 그때부터 시작된 재능의 격차를 실감해 다시는 대련을 청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직접적인 대결을 피해야만 정신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제대로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선대 카이저는 재수 없게도 그런 그의 마음을 읽었는지 먼저 대련을 청하는 적은 절대로 없었다. 물론 남의 속도 모르고 대련하자고 졸라댔다면 더욱 열 받았겠지만.

 

  그렇다면 이 미심쩍은 상황은 무엇인가. 그와 카이저가 대련을 하기로 했다니. 심지어 문맥상 카이저가 그에게 먼저 청했던 모양이었다. 각성 후 유일했던 그 대련은 그가 먼저 카이저에게 신청했던 것이었다. 따라서 지금 연출되는 장면이 그때 그 일이 아님은 자명했다.

 

  “그래. 대련장으로 가지.”

 

  혼란스러운 한편 어쨌든 지금 이 국면을 타개해야 했기에 시키는 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떼어놓아야 ‘진정한 행복’의 실마리라도 찾아다닐 것이 아닌가.

 

  그리 멀지 않은 대련장을 향해 천천히 걸으며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이리저리 떠본 결과, 이 세계는 그가 실제로 자라고 겪어 온 헬리시움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가 아는 면면들, 빼곡한 숲과 건물들, 그리고 아름답게 빛나는 여러 개의 달. 평생 추억이나 그리움 같은 단어와는 연이 없었던 그였지만 지금만큼은 다소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슴이 저릿해오는 것이 되살아나는 어린 시절의 기억들 때문이 아니라면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또한 무척 짧았던 찰나의 대련을 끝내고 나오면서 단 한 가지, 현실과 이 세계의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나도 너처럼 재능이 뛰어났으면 좋겠다.”

 

  카이저가 그에게 털어놓는 푸념이었다.

 

  “카이저라는 이름이 아깝잖아. 아무리 네가 전무후무한 유망주라고 해도, 일족의 수호자라는 놈이 밀려서야.”

 

  그것은 머나먼 옛날 매그너스가 카이저에게 항상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물론 매그너스에게는 카이저처럼 반드시 으뜸이어야 할 당위성은 없었지만, 그 자리를 누구보다 원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자신이 온전히 유일한 존재이기를 바랐다. 카이저에 버금가는, 카이저와 쌍벽을 이루는, 카이저에 비견할 만한. 모두 그에게 붙여진 수식어들이었다. 그는 그 모든 비유들을 증오했다. 구태여 누군가의 이름을 옆에 붙여야만 칭송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자기 자신을 턱없이 미워하고 채찍질했다. 아마 이 카이저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와 카이저는 성격이 무척 달랐으니까. 허나 열등감―이 한 가지만은 꼭 같은 것이다.

 

  원래라면 그가 카이저와의 대련에서 이길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그것은 얼떨떨할 정도로 너무나 쉽게 이루어졌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추어올려 주었다. 카이저를 뛰어넘는 전사―간사하게도 이 수식어는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이며 역대 최고의 노바 전사라고.

 

  본심을 토로하자면, 솔직히 말해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어쩌면 고작 이런 일로 이다지도 좋아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카이저보다 뛰어난 전사가 되는 것은 그의 오래고 오랜 소망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원했던 것이 아닌지 착각이 들 만큼, 평생에 가깝게 원해온 그런 염원.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든 그 방식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그런 생각을 하던 도중, 그는 문득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이것이 내가 진정 원하던 것이지 않은가?’

 

  노바 최고의 전사. 그것이 그가 원했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전부 이룬 것이 아닌가.

 

  그렇게 결론짓자, 어디선가 파랑새가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그래, 이게 정답이었군, 역시.’

 

  마음이 가벼웠다. 역시 넬리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이렇게까지 쉽게 끝난 것이 오히려 아쉽기도 할 따름이었다. 이제는 출구만 찾으면 되었다.

 

  “이제 어디로 가는 거지, 매그너스?”

  아직도 옆에 따라붙어 있던 카이저가 물었다. 이제는 딱히 그에게 볼일도 없고 귀찮기만 할 뿐이었지만 어쨌든 매그너스는 대답했다.

 

  “‘문’을 찾아야 해.”

 

  “문?”

 

  영문을 알 리 없는 카이저였다. 허나 매그너스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든 알아들을 때까지 설명할 만큼 참을성 있지는 못했다. 더군다나 이 세계가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이곳의 주민에게 알려줘도 좋을지는 생각해 볼 만한 일이었다.

 

  “그런 게 있어.”

 

  “흐음.”

 

  카이저는 대답이라고 하기 모호한 감탄사를 흘렸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계속 매그너스의 곁을 따르는 것이었다. 그를 이겼다고는 하나 매그너스는 아직 그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메이플 월드 시간으로 수백 년을 묵혀 온 원한이 그리 쉽게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일부러 떼어내기에도 난감해,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어차피 문을 찾기 전까지는 상관없고, 문을 찾으면 바로 열고 나가 버리면 되니까.’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제법 가벼웠다. 그랬다. 찾기 전까지만 실컷 데리고 다니다가 문에 다다르면 버리고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어차피 카이저라고 해서 그에게 그렇게 좋은 감정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유별나게 친한 척을 해대고 있지만, 그를 라이벌로 여기고 있는 이상 미워하고 있을 터였다. 그럴 것이 뻔했다. 그 자신이 카이저에게 그랬듯이.

 

  그리하여 두 사람은 문을 찾아 헤매고 다니기 시작했다.

 

  ‘내가 나온 곳의 반대쪽 성 외곽 숲에서 찾으면 되겠지.’

 

  이는 그가 생각하기에 가장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를 안내한 악마가 일방통행이라고 했으니 한 방향으로 쭉 나가면 있는 그곳에 문이 있을 거라는, 지극히 직관적인 유추였다. 그는 당당하게 숲으로 향했다.

 

  그러나 얼마 후.

 

  “……어떻게 된 거지.”

 

  반대쪽 숲은 고사하고, 성 주변의 온 숲을 다 돌아도 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헬리시움 전체를 빙빙 돌아도 봤지만 여전히 문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이쯤 되니 뭔가 일이 잘못됐다는 것을 그 역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래? 못 찾겠어?”

 

  보면 모르나. 매그너스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여태 따라다녔으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혹시 일부러 그의 신경을 건드리려고 그런 것일까. 그는 순식간에 험상궂어진 표정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졸졸 따라다녀 놓고도 모르겠냐?”

 

  물론 저절로 나오는 퉁명스러운 말투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랜 시간동안 계속 걷기만 해서 짜증이 올라왔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어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인 것이 더 컸다. 시간이 정확히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문을 찾지 못한다면 파랑새를 얻어 놓고도 영혼을 빼앗기게 될지도 몰랐다.

 

  “괜찮아.”

 

  그런 그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이저는 태평스레 말했다.

 

  “너는 재능이 흘러넘치는 아이잖아. 분명 그 문인지 뭔지도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대체 여기서 재능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군.”

 

  확실히 이 카이저만 봐도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카이저는 이렇게 멍청한 소리만 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나 카이저는 그의 신랄한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쾌활하게 말을 이었다.

 

  “뭐든 잘 하잖아, 너는. 나처럼 노력 같은 거 안 해도 금세 다른 사람들을 추월해 버리니까.”

 

  그 말을 들은 매그너스는 우뚝 멈춰 섰다.

 

  재능. 노력.

 

  그것은 그가 온 삶을 다해 저울질해 온 무언가였다.

 

  현실의 그는 확연히 카이저에 비해 자질이 부족했다. 다른 모든 노바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카이저의 옆에 있으면 빛이 바래고 말았다. 그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허나 너무도 눈에 뻔히 보이는 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시인해야만 했다. 카이저의 재능은 매그너스의 그것보다 뛰어나다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이저와 거의 동등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전사가 되었다. 그것은 그 역시 타고난 전사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격이 다른 소질차를 메운 것은 결국 그의 뼈를 깎는 노력이었다.

 

  그는 노력으로 재능을 이길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나 수없이 검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훈련으로 밤을 지새우고 땀범벅이 된 채 지친 몸을 겨우 지탱하며 집으로 돌아온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어떨 때에는 무리한 연습 끝에 쓰러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어디에서든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가리지 않고 그의 안에 받아들였다. 이를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더라도. 그리고 마침내 지금 이 시점보다 조금 더 미래의 어느 날, 그는 카이저를 이기고야 말았다. 다르모어에게서 막대한 힘을 얻고 치밀한 전략을 짠 뒤 검 끝에 독까지 바른 뒤에야 얻은 승리였다.

 

  그러나 그 자신을 제외한 어느 누구도 그의 승리를 승리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순수한 전투 능력이 아닌 속임수로 본인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이끌어낸 것을 사람들은 보통 비겁하다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카이저의 자폭 공격에 휘말려 버린 것도 큰 흠이었다. 그 공격으로 인해 카이저가 죽기는 했어도 매그너스 역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수명까지 잃어버렸으니까. 그 일 때문에 그는 팔자에 없던 메이플 월드 탐험까지 해야 했던 것이었다.

 

  한편 그에게도 할 말은 있는 것이, 그리하여 결국 목숨을 잃은 건 카이저였고 살아남아 전리품까지 챙겨 간 건 매그너스였다. 그렇다면 판정은 뻔한 것 아닌가. 전투는 결국 내 생명을 부지하면서 남의 삶을 앗아가기 위한 도구적 행위였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그것은 그가 여러 전장을 뛰어다니면서 몸으로 얻은 결론이었다.

 

  말하자면 결국 양방 모두 찔리면 아픈 정곡을 지니고 있는 셈이었다. 때문에 그의 질문에 시원스레 대답해 줄 수 있었던 이는 여태껏 아무도 없었다. 변함없이 그는 줄곧 대답을 갈구하고 있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재능의 차이를 노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었느냐고. 그리고 이 질문은 그가 세상 그 누구보다 더 진실히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기에 던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카이저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재능, 오로지 그것만으로 올라온 자리.

 

  “이건,”

 

  그것은 결국 그가 쌓아 온 노력은 전부 거짓으로 치부된다는 뜻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야.”

 

  한 음절 한 음절 매그너스는 힘을 주어 내뱉었다. 이것이 그가 진정 원하는 행복이라고 그 작은 악마가 말하는 것이라면, 자신에 대한 모욕을 더 이상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어깨에 지금껏 얌전히 앉아 있던 파랑새가 날아올랐다. 연유를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니, 파랑새는 공중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러더니,

 

  “삐―익!”

 

  엄청난 소음을 내지르며 낮은 하늘에 떠 있던 그대로 녹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매그너스를 둘러싼 세계도 같이 지워지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물이 번지는 수채화 안에 갇힌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여태까지 오랜 시간 살아오면서 많은 신기한 일들을 보아왔지만 지금처럼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기묘한 움직임은 멈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 악마가 불러낸 것과 똑같이 생긴 좁은 문이었다.

 

*     *     *

 

  매그너스는 다시 한 번 문 안쪽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았다.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묘한 길을 통과해야 하지는 않았다. 대신 한 방에서 다른 방으로 옮겨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안과 밖이 이어졌다. 이번에 그의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무척 익숙한 장소였다. 바로 그의 거주지인 폭군의 성채.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이 장소가 왜 모습을 드러냈는지 알아보기 위해 그는 먼저 성 내부를 둘러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처음 발걸음을 뗀 군화 굽이 바닥에 닿는 순간, 그는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변화를 감지한 것이었다. 그것은 매우 근본적이면서도 확실하고, 또한 결정적인 변화였다.

 

  ‘…….’

 

  그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유심히 손을 관찰했다. 그러면서 발로 땅을 툭툭 쳐 보기도 하고, 검을 뽑아 휘둘러도 보는 것이었다.

 

  한동안 그렇게 몸을 검사한 결과, 이윽고 그는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착각이 아니야.’

 

  믿기 어려웠지만 이곳, 문 속 세상에서는 진실이 될 수 있는 것.

 

  ‘난…, 강해졌어.’

 

  그것도 아주 많이.

 

  전신에 강력한 힘이 물 흐르듯 막힘없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르모어에게서 받은 힘, 검은 마법사에게서 받은 힘, 그리고 구와르로부터 빼앗은 힘이 모두 충돌 없이 하나로 어우러져 그의 몸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부하로서 ‘충성’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로 받고도 스스로 충분히 제어하지 못했던 예전과 달리, 그 모든 힘들이 처음부터 제 것이었던 양 그는 손쉽게 다루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그러나 완전히 자기 것으로 할 수 없었던 그 힘들 외에도 새로운 힘이 몸 안에 넘쳐났다. 그것은 본디 다르모어와 검은 마법사가 가지고 있었어야 할 힘, 즉 초월자의 능력이었다. 빛의 초월자인 검은 마법사와 시간 및 생명의 초월자인 다르모어. 이 두 사람의 권능이 매그너스 한 사람의 몸 안에 모여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빛과 시간과 생명의 초월자였다. 메이플 월드에서도 그란디스에서도 그와 같은 존재가 나온 적은 선사와 역사시대를 통틀어 처음일 것이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원인을 묻는다고 해도, 본래라면 대답할 수 없어야 정상일 것이다. 그만큼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왜인지 매그너스는 이러한 사태가 벌어진 이유를 정확히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성장한 현 카이저와 다시 대결해 이번에는 완벽히 제압하고 살해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로 인해 그에게는 조금 더 많은 여유 시간이 주어졌고, 이에 그는 수련을 거듭했다. 그 외에는 할 만한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죽음과도 같은 훈련 끝에 그는 하사받은 힘을 전부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조금 전 느낀 것과 같은 감각이었다. 허나 원래 욕심이 많았던 그는 거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먼저 검은 마법사를 쳤다. 이는 강해진 그로서도 상당히 무모한 시도였지만, 결국 매그너스는 검은 마법사를 이기고야 말았다. 그의 힘을 흡수하고 빛의 초월자의 자리를 승계한 매그너스는 곧바로 그란디스로 돌아왔고, 이번에는 다르모어와 대결했다. 삼 일 밤낮을 싸운 끝에 이번에도 승리자는 매그너스가 되었다. 그는 다르모어의 시간과 생명의 힘 역시 빼앗아 버렸다. 그리하여 그는 전무후무한 메이플 월드와 그란디스 모두의 초월자가 된 것이었다.

 

  ―라고, 이번 세계는 설정 지어진 듯했다.

 

  즉, 이곳은 미래에 왕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른 그가 살고 있는 폭군의 성채였다. 어느 새 발밑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마치 그를 위한 길 같았다. 이는 실제로 그러했다. 왜냐하면 그 끝에는 몹시 눈에 익은,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더욱 장엄하게 보이는 폭군의 왕좌가 허공에 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붉은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갈 때마다 어디선가 장미꽃잎이 날아와 발밑에 깔렸다. 이윽고 그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계단을 올라, 공중의 왕좌를 차지하고 앉았다.

 

  매그너스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이기를 바랐고, 또한 한정 없이 도전하고 누릴 수 있도록 끝나지 않는 수명을 원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전부 스스로의 손으로 해내고자 했다. 그러한 소원들이 지금 이 순간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 외에 더 바랄 것은…

 

  ‘…….’

 

  그는 잠시 생각했다.

 

  ‘……없어. 그래. 없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최종 판단을 내렸다.

 

  이계의 판정은 정확하고도 신속했다. 요전번에 나타난 것과 똑같이 생긴 파랑새가 또다시 눈앞에 나타났다. 그는 새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여간해서 동물을 애완하지 않는 그였지만 이토록 기쁜 때에 나와 줬으니 귀여워해주지 못할 것도 없었다. 곧이어 왕좌 아래에 예의 문이 생겨났다. 예상대로라면 이번 문 너머는 다시 현재 시점의 그의 성채로 돌아오는 길일 터. 매그너스는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가 문을 열었다.

 

  “역시.”

 

  지금까지 있었던 곳과 꼭 닮은, 낯익은 장소가 나타났다.

 

  그가 문으로부터 빠져나와 도착한 곳은 왕좌가 있는 알현실 바로 옆의 집무실이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직 새까만 밤이었다. 악마 아이가 제시한 제한 시간은 지나지 않은 것이 확실했다. 매그너스는 다소 거칠게 문을 열고 성큼성큼 걸어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척 보기에도 조급함이 서린 그 동작에서 그가 현재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넬리―!”

 

  그도 그럴 것이, 한시바삐 넬리에게 이 자랑스러운 소식을 알리고 싶은 것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불안해했던가. 평소에도 걱정이 많은 성격인 넬리는 그가 영혼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바보 같은 생각에 거의 몸을 내던지며 그를 말렸다. 하지만 보라, 이렇게 자신은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대견한 나머지 거의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어디 있지, 넬리? 대답해!”

 

  그러나 몇 번을 목청껏 불러도 그녀는 달려 나오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는 그에게 그다지 친숙한 상황이 아니었다.

 

  ‘자고 있나?’

 

  혹시나 하는 생각에 2층에 있는 넬리 전용 객실에도 가 보았다. 허나 거기에도 그녀는 없었다. 1층, 지하, 부엌. 있을 만한 곳을 모두 돌아 보았지만 역시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하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토록 안절부절 못했으면서 하룻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떠났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녀를 잘 알았다. 그는 한참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억해냈다.

 

  ‘아, 감옥에 가둬 두었지, 참….’

 

  지금껏 난리를 피운 것이 삽시간에 민망해졌다. 물론 그녀가 감옥에 있었다면 그가 소리 지르고 다닌 것도 몰랐을 테지만 스스로 창피한 것이 문제였다. 매그너스는 넬리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빠른 걸음걸이로 감옥으로 향했다.

 

  해가 잘 드는 지상 2층에 있으면서 꽁꽁 숨겨진 작은 방. 그곳이 헬리시움의 감옥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지만 마법의 힘으로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 아무런 불편 없이 수용할 수 있었다. 매그너스가 점거한 지금 수용된 인간이라고는 넬리밖에 없으니 더더욱 편안할 것이었다. 그는 몇 겹으로 된 자물쇠를 칼로 끊어 버리고는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리고 힘차게 불렀다.

 

  “넬리, 여기 있…”

 

  그러나 그의 부름은 채 끝맺어지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넬리가 거기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였다. 시선은 텅 빈 창살 안쪽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직접 스펙터들에게 명령을 내려 그녀를 가두었다. 스펙터들은 단순하고 충직해서 그의 명령 외에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 넬리는 여기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없다. 그녀가.

 

  몇 분을 그렇게 아무 일 없이 흘려보낸 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넬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려면 우선 여기서 나가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갑작스러운 스트레스 때문인지 현기증이 왔다. 감옥을 나온 그는 먼저 부엌에 들러 따뜻한 물을 한 잔 마셨다. 머릿속이 어느 정도 맑아 오고 시야에 꼈던 검은 안개도 깨끗하게 가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허나 위태롭게 울리는 심장 박동만은 다스릴 수 없었다.

 

  그와 넬리가 정확히 어떤 사이인지 아는 자는 부하들 중에서도 한 명도 없었다. 동료 군단장들에 있어서는, 넬리의 이름을 아는 자조차도 없었다. 매그너스는 그 어떤 우군에게도 넬리의 존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안전과 관계된 문제였다. 만약 그녀와 자신의 사이에 평범 이상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누군가가 알게 된다면, 그 인간이 그 둘 중 하나에게 일러바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타인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은, 데몬슬레이어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금기였다.

 

  따라서 지금 그녀가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지 않은 것은 단순히 그 자리에 부재한 것 이상의 문제였다. 그녀가 없어진 이유가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이 감옥이 자물쇠와 마법으로 단단히 보호되고 있는 이상, 그 이유가 안심해도 될 만한 것은 아닐 거라는 불길한 추론이 그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혼란하고 불안한 가운데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까지 와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몹시 친숙하고, 또 이런 상황에 무척 반가운 사람이었다.

 

  “벨데로스. 너 잘 만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매그너스 님? 아, 일단 경하 드립니다. 최강의 자리에 오르셨다고요. 역시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악마 녀석이 제법 빠르게 일을 진행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엄청난 힘도 여전히 그의 안에 있었다. 문에서 나오는 즉시 소원이 이루어지는 형태였던 건가. 그는 잠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사실이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벨데로스는 알현실에서 나오던 참인 듯했다. 그는 짓눌렸던 희망을 다시 꺼내며 벨데로스에게 물었다.

 

  “혹시 넬리 못 봤나? 분명 내가 아까 감옥에 넣어 뒀는데 없더군.”

 

  벨데로스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그와 넬리의 관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최대한 예사롭게 말하려고 했으나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절망감이 뚝뚝 묻어나오는 자신의 말투를 제발 벨데로스가 눈치 채지 못하기를 바랐다.

 

  “그녀라면 아마 왕좌 앞에 있을 겁니다. 아까 제가 거기로 데려갔거든요.”

 

  다행히도 벨데로스는 별달리 미심쩍은 기색 없이 대답해 주었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것은 드디어 넬리를 찾았다는 사실이었다. 매그너스는 남몰래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군. 고맙다.”

 

  대체 왜 그녀는 뻔히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매그너스의 부름에 대답하지 않았고, 또 벨데로스는 왜 그의 명령도 없이 그녀를 그리로 데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가 어찌 되었든 일단 지금은 그녀를 만나고 싶었다. 얼른 만나서 아직도 불안해하고 있을 그녀를 안심시키고, 문 안에서 겪은 일들을 실컷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는 날아올라갔다. 마음가짐이 신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굳이 실험하지 않아도 그를 보면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불안한 예감에 쿵쿵대던 심장이 이제는 꿈과 기대로 두근거리고 있었다. 빛처럼 빠르게 알현실 앞에 도착한 그는 무겁고 거대한 문을 단번에 열어젖혔다.

 

  “넬리, 내가 왔…!”

 

  매그너스의 다리가 멈췄다. 문고리를 잡고 있던 두 팔은 힘없이 늘어져 내렸다. 그의 시선은 한 점―왕좌 옆에 고정되었다. 숨 쉬는 것조차 그는 잊어버렸다. 귓가에 웅웅 이명이 울렸다. 열망은 도로 사라졌다. 넬리는 거기 있었다. 다만, 그의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되어 왕좌에 기대듯이 쓰러져 있었다.

 

  매그너스가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던 것은 실상 그다지 오랜 시간이 아니었다. 그의 체감상으로는 몇 시간이라도 지난 것 같았지만, 실제로 그가 사고를 멈췄던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다. 그 이상 정신을 놓아 버리기에는 그의 신체와 마음이 지나치게 건강했다. 그것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꿈에서라도 감히 상상하지 못할 장면을 목도하고 만 충격은 조금도 걸러지지 않은 그대로 그의 심장에 와 박혔다.

 

  그는 달렸다. 있는 힘껏 달렸다. 그렇게 하면 이미 흘러나온 피가 다시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한다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확인하고야 말았다. ―이미 그녀는 사망한 뒤였다.

 

  망연자실해 앉아 있는 그의 뒤로 벨데로스가 다가왔다.

 

  “왜 그러시죠?”

 

  “…….”

 

  그는 대답하는 대신 이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죽은 게 슬픈가요? 왜죠?”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녀를 잃은 그에게 왜 슬프냐고 묻는 저 나이 어린 노바를 당장이라도 찢어발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지금에서야 입 밖으로 낼 수 있는 단어가 있었다.

 

  “사랑했으니까.”

 

  전할 시기를 놓쳐 버린 짤막한 한 마디였다.

 

  이제는 그가 넬리를 사랑했다며 아무에게나 고하고 다녀도 되었다. 그녀의 미소를 보며 하루의 피로를 풀었고, 그 미소를 자신만의 것으로 하고 싶었노라고. 그런 낯간지러운 언어들을 그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부 흘리고 다녀도 상관이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녀를 보호할 필요가 없으니까. 보호해야 할 그녀가 이미 곁에 있지 않으니까.

 

  벨데로스는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왜 이제 와서 슬퍼하시는 겁니까?”

 

  총기를 잃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벨데로스는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보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하셨으면서.”

 

  “……뭐?”

 

  겉보기로는 죽은 것과 다를 바 없었던 매그너스의 눈에 다시 빛이 돌아왔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면 절대로 그것을 생기라고 부르지는 않을 터였다. 호박색 두 눈동자가 경악과 증오로 불타고 있었다.

 

  “네가 죽였다고? 내 명령이었다고?”

 

  헛소리. 적어도 그녀를 죽이라고 했다는 말만은 거짓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믿었다. 그는 검을 뽑아들었다.

 

  “저를 공격하신다면 억울합니다. 분명 말씀하셨잖습니까. 세계 최강이 되는 데에 사랑은 필요 없다고요.”

 

  자못 큰 소리로 외치는 벨데로스의 억양 역시 격앙되어 있었다. 그는 소름끼치도록 밝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매그너스의 가슴이 차게 내려앉았다. 사랑은, 필요 없다. 그의 입버릇이었다. 넬리를 알게 된 이후로.

 

  “이게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던 것입니다. 행복은 이미 당신 곁에 와 있어요.”

 

  “……아니야.”

 

  매그너스는 부인했다. 그러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의 왕좌 앞에 쓰러져 있던 넬리. 그가 차지하고 앉아 기뻐한 그 왕좌 아래쪽에서는, 분명 그녀의 마지막 단말마가 울렸으리라.

 

  ‘그런 뜻이었던가. 그랬던 거구나.’

 

  “자, 이제 인정하세요. 당신의 진정한 소원의 결과를.”

 

  “아니야.”

 

  매그너스는 한 번 더 부정했다. 이번에는 일갈에 가까웠다.

 

  “내가 원하던 것은…!”

 

  그녀야.

 

  그가 끝맺으려던 말은 미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했다. 그 말을 들어야 할 상대방에게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벨데로스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챙그랑. 매그너스는 검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천천히, 쓰러지듯이 넬리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몸은 아까보다 더욱 차가웠다. 그는 조심스레 그녀의 상체를 들어 올려 그의 무릎에 뉘였다. 느릿한 손길로 창백한 뺨을 쓸어 보기도 했다. 뻣뻣했다. 한때는 이 뺨이 귀여운 분홍빛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다시는 이곳에 핏기가 돌아올 일은 없었다. 투둑. 눈물이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신을 더럽혀서는 안 되는데.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허나 흐르는 눈물을 닦기에는 두 팔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문득 파랑새가 지금까지 계속 그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랑새가 그를 떠나 넬리에게 내려앉기 전까지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이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 새가 이제부터 무엇을 하려는 걸까. 그는 그저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에 자리 잡고 앉은 새는 울기 시작했다. 첫 번째 문 안에서 들었던 소음과는 달리 제대로 된 노래였다. 어딘지 모르게 슬프면서도 왜인지 위안이 되는 그 노래가닥을 매그너스는 조용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도중,

 

  “……!”

 

  새가 노래를 멈췄다. 그리고…

 

  ‘이것은 마치 아까 전처럼…’

 

  천천히 녹아 없어지기 시작했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윽고 주변 풍경 자체가 물에 번지듯 지워지기 시작했다. 예상한 바였다. 다만 이번에는 이전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그러나 얼마간의 기다림 끝에, 여러 번 보아 왔던 좁은 문이 그의 바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멈춘 것만 같았던 심장이 다시 고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비탄으로 가득 찼던 그의 머릿속에 또다시 희망이 고개를 내밀었다. 매그너스는 문 밖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아무 것도 없는 길. 맨 처음 이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을 때 지나왔던 것과 똑같은 길이었다. 이 이상한 길 끝에는 진짜 현실이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세계가 펼쳐질까. 그로서는 모르는 일이었다. 어느 쪽을 바라야 하는지도 그는 알 수 없었다. 단지 기도할 뿐이었다. 지금에서야 제대로 깨닫게 된 하나의 진실이 헛된 후회로 남지 않도록.

 

  그리고 길이 끝나는 순간, 그는 찬란한 빛에 감싸였다.

 

*     *     *

 

  퍼뜩 정신을 차리자 그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혼란스러워 머리를 몇 번 흔들고 주위를 둘러보니, 그곳은 어제 차를 마시던 그 창가였다. 식어 버린 차와 스콘이 그대로 놓인 채 어둑한 새벽하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이 들었던 것 같지는 않았다. 단지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었던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을 세간에서는 잠이라고 부를지는 몰라도.

 

  여하튼 당장 시급한 것은 그런 사태 파악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허둥지둥 몸을 추스르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지금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 큰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면 더욱 빨랐겠지만 거기까지 고려하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목적지는 당연하게도 2층 감옥이었다.

 

  몇 겹으로 단단하게 얽혀 있는 자물쇠를 카이세리움으로 한 번에 끊어 버리고, 매그너스는 문을 걷어찼다. 손으로 천천히 밀어 열기에는 마음이 너무 급했다. 무거운 철문이 끼기긱 하는 불쾌한 소리를 내며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그가 황급히 시선을 옮긴 그 끝에는―

 

  ―넬리가 있었다. 아름다운 파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빗으며.

 

  엄청난 기세로 들이닥친 그를 넬리는 놀란 눈길로 쳐다보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한 나머지 쇠창살 문 앞에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곧 일어나 잠금 마법을 해제하고 넬리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의 품 안에 넣어 버렸다.

 

  “매, 매그너스?! 왜 그래요?”

 

  당황해 몸부림치는 넬리를 더욱 강하게 껴안았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는 사실은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를 상상하니 더욱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이, 이럴 게 아니라…, 파랑새는 찾아 오셨어요?”

 

  매그너스는 웃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얻은 파랑새가 녹아 없어진 지금 그에게는 파랑새는커녕 파랑새 꼬리 깃 한 장도 없었다. 그러나 경고하는 이성과 달리 마음은 그쪽에 사고를 할애하기를 거부했다. 그는 오직 넬리를 안고 있고 싶을 뿐이었다. 그녀의 어깨와 등을 다독이듯이 쓸어내리던 매그너스는 문득 그녀가 갇혀 있던 감옥이 새장과 무척 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넬리는 어제도 보았고 방금도 보았듯, 그녀의 눈과 잘 어울리는 파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

 

  그는 넬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고 들여다보았다. 영문을 몰라 깜박이는 한쪽은 검고 한쪽은 파란 기묘한 눈동자가 거기 있었다. 하. 그는 웃음기 섞인 짧은 숨을 내뱉었다. 이제야 알겠구나.

 

  “방해해서 미안한데 말이야.”

 

  그렇게 기쁘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와 그녀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매그너스의 표정이 한껏 구겨졌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소리가 난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왔군.”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했던 바로 그 아이였다.

 

  “파랑새는 찾아 왔어?”

 

  여전히 심기에 거슬리는 생김새였다. 미소 짓고 있기에 한결 더 그러했다.

 

  “물론이지.”

 

  매그너스는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만하고 기세등등한 그 형색에 아이는 의심쩍은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아, 그래? 아무리 봐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가져오지 못했다면 너에게 네가 원하는 걸 내줄 순 없어. 네 영혼이 내 것이 되는 건 물론이고.”

 

  아이는 말이 많았다. 뻔뻔한 그의 태도에 조바심이 난 듯했다. 웃기고 있네. 매그너스는 비웃었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 순간,

 

  “필요 없어.”

 

  그대로 검을 뽑아 어린 모습을 한 악마를 내리쳐 버렸다.

 

  “원래 내 거였으니까.”

 

  들어야 할 사람을 베어 버린 다음에야 던진 이 마지막 발언은 기실 구태여 그 아이가 듣지 못해도 무방했다. 매그너스는 넬리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녀는 부끄럽고 당혹해 어찌할 줄을 몰랐다. 한편 단칼에 동강이 나 버린 아이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그대로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둡고 흐릿한 눈에서 분통의 빛이 보인 것도 같았지만, 매그너스는 어깨를 으쓱할 따름이었다. 그가 이제부터 신경 쓰고자 하는 이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이봐, 넬리.”

 

  “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해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는 그녀를 불렀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딱히 없었다. 다만 이름을 불러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밝히기는 역시 쑥스러웠다.

 

  “배고프지 않아? 아침 먹어야지.”

 

  그래서 전혀 관계없는 다른 쪽 화제를 꺼냈다.

 

  “아, 그러네요. 배고프시겠어요. 그런데 어쩌죠? 아침거리가 없을 텐데….”

 

  평상시대로라면 그녀가 벌써 한참 전에 아침 식사를 대령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갇혀 있었기에 그럴 수가 없었다. 본인의 잘못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넬리는 그 점을 안타까워했다.

 

  “뭐, 만날 집에서 먹을 필요 있나. 오늘은 메이플 월드로 나가서 외식이라도 하지.”

 

  신분을 위장하는 것이 번거로워 보통 때의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허나 오늘 같은 날이라면 그렇게 기분을 낼 만도 하다고 매그너스는 생각했다. 소중한 누군가를 자각하고 지켜낸 날이니까. 정작 당사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끝까지 알지 못하겠지만. 아직 그의 감정은 말로써 고백하기에는 너무도 수줍었다. 사랑에 있어서 그는 여태 소년이었다.

 

  나란히 성채 복도를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에게도 그녀에게도 행복이 충만해 흘러넘쳤다. 어느 12월의 첫새벽, 밤사이 내린 눈과 함께 두 사람의 미소가 환히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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