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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가 몰아치고 있다.

조금 덜컹이는 유리창 부근에서 채 다 막히지 못한 냉기가 전해졌다. 바깥의 그것에 비한다면 정말 별 것 아닌 추위임에도, 따뜻한 집 안의 온도와 대비되는 공기에 유독 몸이 시렸다.

 

유리창 위에 숨을 불어넣자 하얀 김이 서린다, 남자는 그것을 가만히 손끝으로 그었다. 커다란 손이 뿌연 물기 위를, 밤임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바깥의 정경 위를 스치며 지나간다,

창에 언뜻 비쳐 보이는 스스로의 얼굴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왼 얼굴을 크게 가로지르는 상처가 눈에 띄었다. 창 너머의 어둠에 색이 빠져 검게만 보이는 머리카락, 두 눈. 사나운 인상임에도 한뜻 풀린 표정이 비치는 유리는 더없이 차갑다. 얼음을 만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뭐 하고 계세요?”

 

 

목소리가 닿았다, 아주 아득한 듯 하다가 문득 정신이 든다. 조금 늦게 고개를 돌린 남자의 라임색 눈에 더없이 어색하고 익숙한 이가 담겼다.

 

 

“여보,”

 

 

나즉히 부른 호칭에 하얀 뺨이 발긋하게 물들었다. 까만 속눈썹을 팔랑이며 눈을 내리깔았다가 “네, 여보.” 하며 수줍게 미소 짓는 얼굴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아내. 바라볼 때마다 그를 부드럽게 만드는 기이한 능력이 있는 그 다정한 화상에, 어느 샌가 창 근처의 냉기마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풀려왔다.

 

 

“그 쪽에 계시면 추워요.”

 

 

그녀는 여즉 유리창에 닿아 있는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잡으며 제 쪽으로 이끌었다. 조금 차가워진 커다란 손에 따뜻한 손바닥으로 온기를 전하려 이리저리 조물대는 것이, 그 섬세하고 사려 깊은 행위에게 미안하게도 그녀의 자그만 손으로는 참으로 귀여울 뿐인 움직임이 아닐 수 없었다.

 

 

“......매그너스.”

 

 

조금 뾰로통히 이름을 부른다. 언뜻 귀여이하던 표정이 얼굴에 드러난 모양이었다, 삐죽히 앙다문 입을 보지 못한 척 딴청을 피우며 몇 번 헛기침한 그는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입매를 쓰다듬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왜 그래, 여보.”

“......”

“...알았... 알았어, 알았으니 표정 풀어.”

“무얼 아셨다고 그러셔요?”

“...큼.”

 

 

그의 아내는 어린아이 취급ㅡ그러니까 귀엽다고 여기거나 과민하게 보호하거나 좀 더 아는 체를 한다거나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매그너스는, 처음 만났던 때부터 그녀를 아이처럼 대하고는 했던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처음이라면 정말로 아이 취급이었다, 그렇잖아도 몸을 쓰는 일을 하기 때문에 체구가 큼지막한 동료들 사이에서도ㅡ 유독 눈에 띌 정도로 키가 크고 건장한 매그너스에게 아내는 솔직히 말하면 조금 자주, 그저 아주 작고 어리게만 느껴지고는 했으니.

그의 아내는 현명했고 아주 생각이 깊은 여자였다, 그가 그녀를 조금씩 알아갈수록 마냥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로 대했던 과거가 부끄러워질 정도로 속이 넓은 이.

그럼에도, 지금까지 그 아이 취급의 명목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녀는 어디에 세워두어도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아주 섬세하고 가냘파서 잘못 쥐면 부서질 것 같았고 오래 걸으면 다리가 망가질 것만 같았다. 손가락도 팔도 다리도 너무나도 가늘고 연약하여 어르고 달래어야 할 것만 같았다. 언젠가 그 작은 몸으로 출산이라도 했다가는 세상이 떠나가라 울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내는 그가 저를 어르고 달래 못 사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제가 건강함을 몇 번이나 그에게 알렸고, 어쨌든 과보호가 불편함을 명확히 표명해왔기에 매그너스 역시 격정적인 과민을 접어두려 노력했으나, 그래봤자 어딜 가나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공처가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아내가 그의 동료들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또 처음 봤을 때부터 한동안 아이처럼 취급했다는 것이 무색하게도, 두 사람이 부부가 된 것 또한 처음 만났던 날이었다. 설원의 밤처럼 새까만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리고 흰 천의 장막을 둘러쓴 나긋한 손끝으로 가만히 그를 붙잡던 여자.

눈처럼 희고 둥근 어깨는 그의 손에 잡히면 녹아내릴 것만 같고 말간 눈동자는 세상을 다 담을 듯이 아름다워서, 달콤한 장밋빛이 감도는 얼굴로. 하얀 눈송이 같은 목소리로 연모하고 있다 말하던 여자. 환하게 미소 지으며 남편이 되어 달라 청했던 여자.

 

 

“사랑한다고 했잖아.”

 

 

아내의 작은 손을 감싸 잡으며 매그너스는 짤막하게 웃었다. 언제부터인가 입에 담는 것이 익숙해진 낯간지러운 말에, 그의 아내는 조금 붉어진 볼로 붙잡힌 손을 바동거렸다.

 

 

“르네.”

 

 

사랑해.

낮게 속삭이니 아주 새빨갛게 된 얼굴로 고개를 폭 숙인다.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매그너스는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내에게, 르네에게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그 단어 자체가 그녀였다. 사랑이 화하여 내려온 것이 르네였고 그것은 눈물이 날 정도로 다정하고 달콤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언젠가 그것을 우습게 여기고 기피하고, 재고 혐오하며 질색했던 과거의 자신에게 조금 더 일찍 이 행복을 알려 주고 싶을 정도로.

 

 

매그너스는 본디 성정이 나긋하지 못하고 제 공간에 누군가 침입하는 것을 지독하게 꺼려하는 남자였다. 그런데도 그 까맣고 말간 눈빛에, 저를 애타게 앓았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그 기이한 달콤함에 홀린 듯이 손을 잡고 말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한 방에서 눈을 뜨고서는 혼란스러워졌을 정도로, 제가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이었다.

 

아내가 된 여자는 절실하리만치 그를 사랑했다. 연모한다 말하던 그 순간부터, 제 이름을 불러 달라 수줍게 부탁하고 달콤하게 사랑을 속삭였고, 아주 최선을 다해서, 무엇을 하든 세심하게 보필했다. 그리 정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아내인데도 그는 입 안에 돋은 혓바늘처럼 끕끕한 껄끄러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르네는 시시각각 아름다웠고 가끔은 한여름에 내리는 눈을 보는 것만 같이 현실감이 돋지 않을 정도였지만, 아주 기묘하게도 그것에 이끌리거나 소유욕을 느낀 적은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재해를 집 안에 들여놓은 것 같은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고 그녀의 그 비인간적인 아름다움은 매그너스에게 더한 불쾌감을 안겨줄 뿐이었다.

어째서 제가 그 손을 잡았고 부부의 연을 맹세했는지, 언짢은 의뭉스러움은 꿈인 양 아득하고 현실감 없이만 느껴지는 과거를 더듬을수록 더해져 갈 뿐이었다.

 

르네 본인의 그 거슬리는 기이함과 별개로, 매그너스는 그녀가 늘 그에게 속삭이는 사랑 또한 불쾌했다. 한 번도 그런 사랑을 받아 본 적 없었다, 르네는 그가 바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가끔은 두려울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매그너스가 어떤 잘못을 하고 어떤 폭력을 휘두르든 르네는 언제나 그를 용서했다. 앙금조차 남기지 않는 듯 다정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그럴 이유가 없음에도, 지독할 정도로 헌신적인 여자였다.

그는 그것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했다. 당혹스러웠고 껄끄러웠고 이내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 분노를 삭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매그너스는 끊임없이 그녀를 시험하고 학대에 가까울 정도로 냉담히 굴었다. 그 얼굴이 대체 어디까지 상냥한 채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그러나 르네는 언제나 미소 지을 뿐이었다. 분하고 답답하고 그러나 동시에 그는, 분명히 어딘가 천천히 망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겨울이었다. 여즉 하늘에 밤이 푸르스름하게 남아 있는 이른 시각 눈을 뜬 매그너스는 스미는 한기에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불은 잘 덮여 있었지만,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아내가 없었다. 그는 무언가 텅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 도망쳤을 것이다. 서글플 것도 없이 끝이 났다. 애초에 이래야만 했던 것이라고 납득했다. 빈 방에는 혼자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자 세상이 하얬다. 희부연 입김이 후우 피어오른다. 더러운 땅 위를 온통 하얗게 덮으며 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새하얀 옷가지. 마른 어깨와 창백한 손을 하고 그러나 여전히 발간 뺨으로, 사랑을 하는 듯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르네가 있었다.

코끝이 빨갛게 얼어 있다. 귓바퀴도 작은 손도, 눈을 디디고 선 맨발도 새빨간 채였다. 언제부터 그리 막연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을까. 그녀는 그를 볼 때에도 그런 얼굴을 했다.

그는 꼭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제정신으로 홀려 있었다. 르네의 까만 머리카락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내고 차갑고 작은 몸을 꽉 끌어안았다.

 

'...여보.'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상냥하고 달콤했다.

 

'눈이 와요.'

 

르네는 어디에도 가지 않았다. 매그너스가 아무리 무서워하고 지레 거리를 두어도 영원히 그 자리에 있었다.

 

'...르네.'

'......'

'......여보.'

'......네, 여보.'

 

 

그는 언제나 그 상냥함의 끝을 궁금해 했다. 선량함을 띤 얼굴을 뒤집어엎어 바닥을 긁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그게 위선일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에게는 과분한 여자였다, 그래서 이상했다. 갑작스레 귀중품을 손에 쥔 것만 같았다. 그게 제 것일 이유가 없는데도.

그가 그녀를 사랑하게 되지 않았다면 그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영영 가지지 않고 언젠가 떠나더라도 떠나지 않더라도 상관없이 무심한 얼굴로 바라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있던가?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사랑을 받으며 버틸 수 있는 사람이 있던가? 온 가슴이 망가져 내렸다, 전부 이상해졌다. 어딘가 걸어 두었던 자물쇠가 전부 녹아 풀리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상냥함을 끌어안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잃을 것이 영영 공포로 남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정말로 얻고 싶었던 답은 그 상냥함의 바닥이 아니라 그것이 영원하리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 날로부터 사랑을 했다, 자라지 못한 싹을 꺼내어 햇빛을 받게 했다.

 

 

그 이후에도 조금씩 실수를 했다. 지레짐작하여 화를 낸 적도 있었고 쑥스러움을 퉁명스러움으로 가린 적도 있었다. 으레 그랬듯이 깔아뭉개었다가 화들짝 놀라 거둬들인 적도 있었다. 제 부끄러움을 화기로 감추는 버릇을 고치는 데에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르네는 언제나 그를 용서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줄곧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기까지 클 수 있었다.

 

 

"창가에 계시면 추워요, 이 쪽으로 오셔요."

"흐음."

 

 

손을 잡아끄는 걸음에 끌려가다 능청스럽게 휘청임을 가장하여 확 끌어안았다. 깜짝 놀라 제 품에서 눈을 크게 뜨고는, 이내 풀어진 뾰로통함을 표명하는 사랑스러운 얼굴에 매그너스는 작게 웃으며 키스했다.

하얀 볼 위에 가볍게 입술을 맞대면 이내 제 볼에 화답해 오는 감촉을 느낀다. 아, 지나치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눈이 오길래."

“눈이야 겨울에는 늘 오는 것 아니겠어요?”

“그리고 겨울에만 오는 것이기도 하고 말이야.”

 

 

예쁜 미소를 띤 르네의 입가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린 매그너스는 이내 무언가 생각하는 듯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다, 눈이 오고 있었다.

르네가 손을 뻗어 그의 볼을 감싼다, 조금 기묘한 듯 쓸쓸한 표정으로 왼눈을 크게 가로지른 상처를 더듬다 이내 살며시 입을 맞추었다. 아, 상처. 따뜻한 방 안에서 과거의 찬바람을 기억해낸 그는 조금 몽롱한 표정으로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눈을 싫어했는데 말이야.”

“...그러셨나요?”

“음, 눈이 오면 땅이 어니까. 일하기 힘들기도 하고.”

 

 

......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창밖의, 저와 하등 관계없는 듯 보이는 희끗한 눈발 사이로, 아주 익숙한 것이 아른거렸다. 그는 오늘처럼 눈보라가 치는 날에는, 늘 그 일을 떠올렸다. 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떨어트려 놓아야 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동시에 놓을 수가 없는. 그것은 자신이 그 기억에 어떠한 동정을 품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 날까지는 말이야, 눈을 정말 싫어했지.”

“......여보?”

“......나는 그걸 만났어, 여보, 봐 버렸던 거야.”

“여보.”

 

 

이상하게도 목소리는 책망하는 듯이 들렸다. 그는 사랑스러운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약간 눈썹을 늘어트리고, 새까만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지 않을까? 이 정도로 걸어왔으면 이것은 이미 없었던 일이 아닐까? 그는 그 일이 사실은 진실이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게 되었다. 스스로가 미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양심이라는 기이한 회로가 감추어야만 하는 비밀이라면 오히려 드러내고 싶어지게 만들고야 마는 것이다. 그것이 심장 속을 깊숙이 긁었다. 나를 뱉으라고, 그렇게.

그리하여 그는 몇 번 입을 달싹이다가, 한참을 목소리를 막다가, 결국에는 작게, 속삭이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여도 용서할 아내에게.

 

 

“나를... 미쳤다고 생각하지 마, 나를 용서해 줘... ...내 얘기를 들어 줘, 여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왜 그러세요, 갑자기.”

 

 

......그는 조금 숨을 내뱉고...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끌어올렸다.

그가 ‘그것’을 만나게 된 것은 지금에서 몇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과거의 일이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쭉, 눈이 많이 내리는 산지에는 전설이 하나 떠돌았다.

눈이 많이 오는 날에는 깊은 산에 들어가면 안 된다. 사내는 설녀의 남편이 되어 얼어붙은 채 영영 돌아오지 못하고 여인은 질투를 사 꽁꽁 언 시신으로밖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걸 누가 믿어.”

“매그너스.”

 

 

쯧, 그는 혀를 차며 겁 많은 친우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예로부터 참 뻣뻣한 녀석이었다. 남의 의견을 무시하면 안 된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의견이어도 함부로 비웃지 말자. 어쩌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진중하게 쭉 바라보던 파란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지만 그야, 당연한 일 아닌가. 눈이 많이 올 때 깊은 산에 들어가면 위험하기 마련이다. 눈앞은 하얗고 체온은 계속 떨어지고, 그러다 보면 헛것도 좀 본다. 바람에 뭉친 눈이나 가지 사이사이 그득히 눈송이를 채워 넣은 침엽수 같은 것들은 하얀 옷의 여자로도 보일 수가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가 사는 곳은 산골이었다, 그렇잖아도 지형이 복잡한 산 속은 굳이 눈이 오지 않더라도 영영 돌아오지 않는 이가 좀 되는 법이었다.

 

그래서 그는 설녀 전설을 들을 때마다 코웃음을 쳤다. 당연한 이야기에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끼워 맞춘 것이 무서워서 벌벌 떨 일인가? 매그너스는 전설 같은 것은 믿지 않는 겁 없는 사나이였다. 그 나이대의 사내들 중 가장 용기 있는 남자라 스스로 자부했고. 눈 내리는 숲 속의 죽음이라니 나름대로 명예롭지 않은가! 그는 팔짱을 끼고 도저히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송이를 향해 들리지 않을 허세를 조금 외쳐 보았다.

 

 

“...하필 그래도 또 지금 눈이 오냐.”

 

 

...뭐, 사실 그다지 명예롭지는 않다. 진탕에서 굴러도 이승인 법이다, 죽으면 다 끝인데 무슨. 딱 하산하던 시점에서 눈보라를 맞이한 그의 마음은 그다지 반갑지 않았다. 사실 누구라도 산 속에서 눈보라를 맞이하면 반갑지 않을 것이다만.

 

길이 아직 험했다, 좀 사람 드나드는 곳에서 내리든지. 어둑하게 날이 저물어 곧 주위 분간하기도 어렵게 될 판이었으니 꼴이 참 난감하다. 매그너스는 설녀 전설을 호들갑스레 떠들어대는 이들의 기분을 조금 이해할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그런 거다, 덜 언 강가에서 썰매 타지 마라, 불 가까이 가지 마라, 저 같은 치기어린 젊은이들을 겁주기 위한 지침서라든지...

 

그러나 불행하게도 매그너스는 지지리 말 안 듣는 소년이었다. 늘 세간의 개념과는 좀 어긋나는 것이 좋았다, 어릴 적부터 쭉, 청년이 된 지금까지도.

 

 

“흐으음, 귀신처럼 피부가 하얗고 얼음처럼 싸늘하고, 눈으로 된 심장에 얼음송곳이 박혀 욕심과 패악밖에는 부리지 못하는 여인이라네.”

 

 

덧붙여 그런 맥락으로, 매그너스는 꽤 장난기가 심했다, 그러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누굴 골려주는 것을 좋아하는 못된 심보가 있었다. 마침 눈이 오고, 날은 춥고, 지형은 험하고 어둑해서 그의 기분이 푹 가라앉았고 가라앉은 만큼 지루했으며, 옆에는 아주 좋은 희생양이 하나 있다.

전적으로 그의 관점상, 지극히 뻣뻣하고 겁 많은 그의 친우는 설녀를 아주 무서워했다. 그렇다, 그가 운을 떼자마자 딱 굳어진 안색으로 눈썹을 치켜 올릴 정도로. 그런 주제에 또 남의 말은 끊지 못할 정도로 물러터진 성격이라, 매그너스가 아무리 쥐어박아도 화내지를 못하는 녀석이었다. 그러고 보니 딱 이런 밤이던가, 눈 내리던 야산에 그를 억지로 끌고 가 골려준 날도.

 

 

“인간의 온정 같은 것은 모르는 냉담한 것이야, 욕심이 많아서 몇 명을 잡아가든 만족하지를 못하고 아무리 울며 빌어도 돌려주지 않...”

“매그너스!”

 

 

윽, 그는 혀를 깨물었다. 아무튼 순해빠진 녀석이었는데. 드물게도 정말 겁이 났는지 희게 질린 안색이다, 하기는 날도 장소도 딱 맞아떨어져서 굳이 설녀가 있다면 정말 지금 나타날 것만 같을 정도의 완벽한 배경이었다. 그래도 이 녀석이 말을 끊는 건 정말 드문 일인데.

 

 

“사내놈이 겁도 많아. 그래봤자 전부 거짓말이라고, 그런 거.”

 

 

너무 겁에 질린 기색에 헛웃음을 터트리고 만 매그너스는 비식비식 입가를 꼬다가 과장스레 어깨를 으쓱하고는 입을 열었다. 설녀는 전부 입방아의 산물이고 결국 그 근원은 눈보라나 나무 따위였을 것이라고, 그러나 그것을 막 입 밖에 담으려는 순간에, 그의 친우는 덜덜 떨리는 입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아니야.”

“...그러니까 설녀 같은 건...”

“환상이 아니야.”

“......?”

 

 

묘하게 단정 짓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는 꽤 신념이 굳은 부분이 있었으나, 동시에 이런 괴담 따위에 그런 신념을 쓸 만큼 진중하지 못한 남자는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를 더듬는 것 같은 파란 눈으로, 목적지를 찾지 못한 허망한 표정으로 더없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매그너스, 그 날, 네가 야산에 나를 처박아두고 혼자 몰래 내려간 날. 눈이 오던 날.”

“...아니, 그건 사과했잖...”

“......너는 내 아버지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나?”

 

 

매그너스는 조금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는 태생부터가 고아였다, 아버지 같은 것이 있을 리도 없었고 그의 이름을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를 맡아 키우던 것이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 누군가가 그와 함께 살았던 것 같았다, 그러나 아마 동네 어른 중의 한 명이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도.

 

 

“......나는 고아가 아니었어, 매그너스.”

“......뭔.”

“그러니까 눈보라가 뭉친 것도... 나무가 우연히 잘못 비친 것도 아니었다, 그건...”

 

 

...거기까지 말하고, 그가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은 매그너스는 약간 조급하게 친우의 어깨를 조금 흔들었다.

 

 

"...그건, 그건 뭐, 계속 말 해."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을 꽉 다문 친우를 책망하던 매그너스는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말을 멈춘 그의 눈이 못 박은 듯이 한 곳을 향해 있었다.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야, 왜 또 왔니.”

 

 

참으로 여상스러운 목소리였다.

 

그것은 더없이 아름다웠다. 티끌만치도 흠 없는 얼음조각상, 아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투명한 것이 아니다. 좀 더 섬세하고 덧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눈이 쌓여 만들어진 정교한 예술품에 가까웠다. 손을 대면 더럽혀질 것 같은, 뭉쳐지지 않은 입자인 채로 형태를 이루어 조금 톡 치는 것만으로도 아스라히 바스라지고 말 것 같은. 가까이 다가가면 흔적도 없이 녹아내리게 될 것 같았다.

소녀의 모습을 한 그것의 가느다란 목은 도무지 악의라고는 모를 정도로 순결하기만 해 보였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입술. 흰 눈보라 사이에서는 너무나도 가냘파 보이는 부드럽고 둥근 어깨. 눈송이 덮인 까만 속눈썹이 휘감기듯 내리깔려 감추어진 얼음과도 같은 눈동자, 하얀 눈보라를 머금은 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물결쳐 내렸다.

 

저것은 인간이 아니구나. 너무 아름다워서 깨달았다. 인간인 것이 인간인 척을 하면 거북하기만 한 법이었으나, 그것이 본연의 자신을 그리도 화려하게 뽐내고 있으면 그렇게 기이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이하고 기이하기에 아름다웠다.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고 그 무엇도 따라할 수 없는, 압도적으로 망상적인 비현실의 것.

 

 

“그러면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는 설녀의 목소리는 녹아내릴 듯이 투명하고 덧없었다.

 

그녀는 아주 무의미한 표정으로, 하얀 손을 뻗었다. 천천히 펴지는 하얀 손가락은 상아로 조각한 것처럼 아주 귀하고 가냘파 보였다, 그 손의 움직임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직후에 혹은 자신이기 때문에 유독 그런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 하고 짧은 단말마가 들린 다음 순간 곁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는 아주 본능적으로, 친우가 눈보라 속에서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뭐였더라?

 

그는 문득 깨달음을 얻고 숨을 멈추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너는 울지 않는구나."

 

 

설녀는 눈송이가 내려앉은 까만 속눈썹을 살짝 내리깔았다. 쓸쓸한 듯 무감각하게 눈 덮인 땅을 내려다보던 두 눈이 유리구슬처럼 도르르 굴러가 그를 바라보았다.

매그너스는 정말로 무서워졌다, 그것이 방금 친우의 모든 흔적을 얼려버렸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전혀 무섭지가 않았다. 눈으로 된 심장에 얼음송곳이 박혀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지도 못하고 패악만을 부리는 악독하고 욕심 많은 여인. 그런데 너무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움에 온 시선이 다 빼앗겼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깨닫는다, 설녀의 정말 무서운 점은 그것을 미워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었음을.

 

 

"다들 그렇게 나를 녹였는데."

 

 

그는 그 말에 문득 설녀의 두 팔을 보았다. 흰 팔은 꼭 눈처럼 보였다, 숨결이라도 닿았다가는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는 우습게도 한 줌 인간인 주제에, 어쩐지 설녀의 곁에 감도는 냉기를 이해하고 말았다. 조금 손을 뻗자 사뿐히 몇 걸음이 멀어진다. 그것이 더없이 허망하였다.

 

 

“네 손은 너무 뜨거워, 나를 만지지 말아.”

 

 

나긋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감흥 없이 무심한 외마디 감탄 같은 목소리. 그 무엇도 느껴지지 않으나 아름답다는 사실만은 선명했다.

그는 멍하니 설녀를 바라보다가 장갑을 벗었다. 그리고 근처의 땅 위에 가득 쌓인 눈 사이로 아무렇게나 손을 쑤셔 넣었다. 마구잡이로 눈을 움켜쥐고 헤집었다, 손이 시렸다, 손끝이 떨어져 내릴 듯이 아프다 못해 제 손이 아닌 양 감각 없이 굳을 즈음에 그는 눈송이 사이에서 손을 빼내었다. 녹았다 얼어붙은 눈 조각이 달라붙어 있는 손의 마디가 푸를 정도로 얼어 있었다.

 

 

“...이러면?”

 

 

설녀는... 살얼음이 낀 것처럼 흐릿하게 파르란 눈동자로 매그너스를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 가득이 스스로가 담기는 것을 보았다, 불투명한 얼음 눈동자 위로 짐승의 눈을 한 남자의 신형이 아로새여지고, 그 두 눈 안에 제 노란 눈이 갇히는 광경이 어쩐지 그의 어깨 위로 뻣뻣한 긴장을 내려놓았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차갑게 얼어붙은 손을 내민 그에게, 설녀는 부드럽게 말했다.

 

 

“너는 참 예쁘구나.”

“......”

 

 

변성기 지난 이후로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 그는 조금 허탈해지고 말았다.

 

설녀는 작은 발걸음으로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예쁘다, 예쁘다 하고 마치 아이를 어르듯이 소곤거리는 것은 작은 소동물 따위를 겁주지 않으려는 몸짓과 아주 흡사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은 덩치 큰 맹수였는데도.

단연컨대 그녀가 아는 칭찬은 예쁘다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자신을 보고서는 예쁘다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는 뻗은 손을 거두려다 잠시 멈칫했다.

 

매그너스는 야수나 짐승 같은 면이 있는 사내였다. 녹빛으로 번쩍거리는 노란 눈, 검은 윤기가 도는 회청색 머리카락, 짙은 색의 피부나 딱 벌어진 어깨. 몇 번이고 야성적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사실은 더 야생에 가까운 것은 겉보다는 속이었다.

 

 

“너도 같이 가자.”

“잠깐.”

 

 

그래서 그는 설녀가 손을 뻗기 전에 먼저 그것을 잡아챌 수 있었다.

눈보라가 방향을 잃고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칼날 같은 바람이 왼 얼굴을 크게 강타했다 싶더니 이내 눈밭에 새빨간 자국이 툭툭 떨어져 내렸다. 큰 충격은 그것을 인식한 순간에야 고통이 되어 돌아왔다. 머리가 띵하고 지끈지끈하여 그는 조금 비틀거렸다.

...일단 죽는 것보다야 낫군. 기분이 나쁠 틈도 없이 눈가가 욱신거린다, 한 쪽 눈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피가 고여서 그는 자신이 어느 정도로 다쳤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턱을 타고 더운 피가 흘러내린다.

 

 

“하.”

“......왜?”

 

 

 

물음에는 정말 순수한 질문만이 담겨 있어서, 그는 조금 헛웃음을 흘렸다. 인간의 피를 보고도 아무런 감각이 없다, 아니다, 그냥 모르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도, 상처도, 피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순수한 무지는 소름끼칠 정도로 위험한 것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내가 미쳤지, 위험해도 단단히 위험한 것에 홀렸구나. 그러나 동시에 그는 확신했다. 위험한 것이라서 끌렸을 것이다. 이렇게 아름답고 위험한 것이라서 조금 더 보고 싶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러니까 그는, 본디부터 말을 듣지 않는 아이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청년이 된 지금까지. 금지할수록 불타오르는.

 

 

“맙소사... 넌 지금까지 대답도 안 듣고 이렇게 다 죽였나?”

“네 숨은 뜨겁구나. 네 가슴도 뜨거워.”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아니나 다를까 그러자마자 그가 있던 자리에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는 조금 숨을 들이키며 한 번 휘감기고 사라진 눈보라의 흔적을 바라보았다. 바닥이 조금 얼어 있었다.

세상에 맙소사다. 줄곧 이랬을 것이다. 아무도 이 여자와 대화하려 하지 않았다, 이 여자는 대답 없는 침묵에 익숙하다. 물음에 돌아올 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녀는 표정 없는 얼굴로 매그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릴 것이다. 내가 도망치리라 생각하는구나.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도망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릴 수 없게. 그 시선이 어딘가로 도망치지 않도록.

 

 

“넌... 너, 나를, 나를 데려가고 싶은 건가?”

“......”

“나를... 나를 남편 삼고 싶은 거라면, 나랑 대화를 해.”

 

 

설녀는 여전히 감각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표정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는 생물처럼 보였다, 아주 긴 세월이 눈으로 만들어 낸 조각상, 표정이 바뀔 리 없는 영원한 작품.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움직이고 있었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매그너스는 문득 설녀가 알고 있는 대화라는 것이 그가 아는 것과 꽤 다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나를... 날 얼리지 마. 네가 날 얼리면 난 죽는다고.”

“......”

“...이야기를 하자고, 아니야. 그냥 내 얘기를 들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이야기를...”

 

 

 

듣는... 건가. 설녀는 망설이듯이 말을 끝마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일련의, 조금 머뭇이는 행위에서, 그는 가냘픈 혼란스러움을 읽었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래간 말을 걸어 주는 사람이 없었을 테니까.

설녀의 남편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대답을 들을 수가 없다, 매그너스는 그녀의 삶이 대체 어떻게 되어있는 것인지 도무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세월이, 그 무감각한 삶이, 멀쩡한 심장조차 눈으로 덮고 얼음을 박아 넣을 수 있으리라는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너는 나를 얼려서 데려가고 싶은 건가?”

“......”

“그게 네가 남편 삼는 방법이라는 건 알겠어, 하지만 나는 그런... 그런 결혼 생활을 하고 싶지는 않거든? 나는 말이지... 일단 죽고 싶지는 않은데. 따뜻한 집에서 살고 싶다고. 어딜 나갔다 오면 다녀왔냐고 웃으면서 맞아 주는 아내와... 아이도 낳고 싶고,”

“......”

“너는 웃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지, 나를 얼려 죽이고 네 집에 내팽개쳐 둘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그럴 생각이라면 나는 네 남편이 되지 않을 거다.”

 

 

 

그가 설녀를 바라본 만큼, 딱 그만큼 설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하게 물었다.

 

 

“갈 거니?”

 

 

매그너스는... 조금 기분이 이상해졌다. 화가 나는 듯 하다가 이내 서글퍼졌다, 그는 그렇게 감상적인 남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아주 서글픈 기분이 되었다. 그는 거절하려는 의도로 그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그가 정말 말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너와 있어 줄 수도 있어.”

 

 

아니야. 너와 있고 싶어.

감정이라는 것을 다른 형태로 만들 수 있다면 설녀의 감정은 그가 서 있는 그 장소에 눈으로 화하여 쏟아져 내리고 있는 그것이었으리라. 아아, 그렇다, 이것은 설녀의 감정이다. 온전히 그 스스로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상관없었다, 그는 제가 단단히 홀렸음을 직감했다. 그는 설녀를... 아내로 삼고 싶었다.

 

 

“......왜?”

“네가......”

 

 

네가 너무 외로워 보였다. 매그너스는 그냥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설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아마 계속, 어느 누구에게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마주봐준 것은 그뿐이었다. 그는 그녀의 얼어붙은 눈이 아주 예전에는 머리카락과 같은 까만색이었음을 깨달았다. 아주 특별한 기분이었다.

 

설녀는 조금 생각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눈을 내리깔고 입 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따뜻해, 웃는다, 아이... 단편적인 단어가 흘러나오더니 이내 문장이 되었다.

 

 

“나는 남편이 많아. 하지만 아이는 없다. 나는 아이를 낳을 수 없어?”

“그건 잘 모르겠는데, 남편이 있다고 다 아이가 생기는 게 아니거든, 너는 당연히... 없겠지.”

“그렇구나.”

 

“...날 남편 삼으면 아이 정도는 갖게 해 줄 수 있는데.”

 

 

 

제 입으로 뱉고서도 낯이 뜨거워졌다. 그는 바로 뒤에 농담이라고 덧붙일까 했다가, 설녀의 무지함을 방패로 삼아 그냥 모르는 체 그만두었다. 그녀는 여즉 말간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고요하게 들여다보이는 기분이 들었다.

 

 

“네 이름이 뭐니?”

“......매그너스.”

“그래... 예쁜 이름이구나.”

“...네 이름은?”

 

 

설녀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기이하게 인상을 조금 움직였다, 어색하게 입 꼬리가 조금 올라간 얼굴은 어쩌면 웃는 것과도 비슷해 보였다, 그녀는 그런 비슷한 표정으로, 끊임없이 얼굴을 미묘하게 움직이다가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나는 네가 참 마음에 들어, 하지만 너를 남편 삼으면 너는 차갑게 얼어 죽어버리고 마는 거구나. 너는 그러고 싶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하는 방법을 몰라, 그러니까 너를 보내주마.”

 

 

 

 

 

"대신 나와,“

 

“약속을 하자."

 

 

매그너스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레, 현실로 돌아온다. 눈앞에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아내의 화난 표정이 있었다. 그녀는 제 손을 꽉 잡고, 숨을 씨근덕거리다, 마지막 말을, 강하게 내뱉었다.

 

 

"나를 본 것을 어디에도 말하지 말아."

 

 

......아.

 

 

“......르네?”

 

 

그는 망연하게 아내의 이름을 불렀다. 타오르고 있었을 터였던 모닥불이 순간 훅, 하고 숨을 거둠과 동시에, 그는 강한 한기를 느꼈다. 르네는 매그너스의 손을 내팽개치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나는... 나는 당신을 용서해 주었는데.”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깨질 것만 같은 분노와 배신감으로, 혹은 옅은 서글픔으로. 매그너스의 볼 위에 차가운 것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는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당신이 나를 아내처럼 대하지 않아도, 당신이 나를 아프게 해도 몇 번이나 기회를 주었는데!”

 

 

르네는 울부짖듯이 소리치며 얼굴을 감쌌다.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아니다, 무너져 내리는 것은 바닥이다. 그렇지 않으면 떨어지고 있을 리가 없다.

눈앞의 정경이 순식간에 희게 물든다, 바깥에 있었을 눈보라가 집 안을 광폭하게 휘젓고 있었다.

 

 

 

“나는... 나는 당신이 한 말을 줄곧 이뤄주고 싶어서, 당신이 내 남편이 되어주었으면 해서, 당신이 말한 대로 노력해왔는데.

당신은, 당신은... 내 마지막 약속을 깨 버렸구나.”

 

 

떨어져 내리는 것은 눈송이인가? 얼굴에서 손을 뗀 그녀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었다. 기이하게도 아주 슬픈 표정이었다.

그는 겨우, 그것이 그 날 만났던 설녀가 마지막으로 지었던 것과 닮았다는 것을 알았다.

 

 

“겨우 배웠는데, 겨우 당신이랑 같이 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새하얀 파도가 매그너스의 시야를 헤집는다, 바람은 몸을 에일 듯이 시렸고 싸라기눈이 피부를 때렸지만 그는 추위를 느낄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눈을 크게 뜨고 흰 눈보라 사이로 아주 희미하게 보이는 아내의 잔영을 더듬는 것밖에는 없었다.

 

 

"...나..."

 

 

입이 달싹였다. 작게 중얼거린 말은 그러나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는 소리를 헤집고 선명하게 매그너스의 귀에 박힌다, 작게 벌린 그의 입 사이로 탄식이 되지 못한 멎은 숨소리가 새었다.

새하얗게 조각난 경관의 사이로 하얀 잔영이 아스라이 어른거렸다. 흐릿한 시야 속으로 그녀가 눈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눈보라 사이로 그의 아내가 울고 있었다.

 

 

“......르네.”

 

 

약속을,

지켰어야 했는데.

 

후회는 지나친 선택을 밟고 올라 매그너스의 목을 틀어막았다. 그는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이렇게는 안 된다,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다, 무너져 내리는 발밑을 인정하고 떨어질 수 없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그 이상은 바라지 않았다, 그 어떤 것이라도 더는 욕심 갖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딱 한 번만, 그는 도저히 그녀가 없는 삶을 살아나갈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숨 막히게 고요한 집에 홀로 들어와 살아갈 수 없었다. 아주 차가운 바닥을 홀로 디디고 불씨를 뒤적여 장작을 넣고 나서도, 한참을 이불을 안은 채 떨어야 하는 추위. 어두운 방 안에서 다시 혼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차갑지 않은 바닥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웃는 양지를 알았다. 작은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도, 저를 꼭 끌어안는 몸, 핀잔주듯이 미간을 약간 모으는 사랑스러운 표정이나, 지쳤다며 능청을 떨어도 마주 과장 섞인 호들갑을 부리다 이내 흐지부지 웃음을 터트리고 마는 서툰 연극, 큰 이불을 하나로 덮고 자기 전까지 이마를 맞대며 소곤대는 미래의 이야기, 그런 아주 사소한 것들이 없어지면, 그는 살아갈 수가 없었다. 다시는 평범함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르네가 빠진 행복은 그의 인생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는 도저히 그것을, 그것을 잃어버릴 수 없었다. 다른 그 어떠한 벌이라도 대신 받을 수 있었다, 이후의 삶이 진창이 된대도,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지옥인 것을 걸어 나가게 된대도, 사실은 그보다 더 지옥인 것은 없었다.

단 한 번만 기회를 준다면 제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시야가 새하얬다, 그는 손을, 손을 뻗었다. 흐려지는 인영을 향해서, 칼처럼 그를 내리치는 단죄의 비명 사이를 헤집으며, 필사적으로, 필사적으로, 절박하게.

 

 

“......르네!”

 

 

손에

 

잡혔을 것이다.

그러나 순간에, 눈보라가 걷혔다.

 

......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 어떤 흔적도 없었다, 그냥 그에게는 아무런 것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었다고 생각하고 싶을 정도로, 잠시간 서서 꾼 꿈이라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그러나 무엇도 없었다. 아내의 흔적이 집 안 어디에도 없었다, 매그너스는 몸을 가늘게 떨다 바닥에 웅크리고 소리죽여 흐느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애초에 르네라는 존재가 없었던 것처럼. 그의 인생에 있었던 그 모든 볕이 원래부터 주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작은 손도, 웃는 얼굴도, 함께 이마를 맞대던 온기도 원래부터.

 

용서는 영원하지 않아. 그는 하나뿐인 것조차 지키지 못했다. 아, 아아...

 

 

아내의 마지막 말만이 유일하게, 그의 머릿속에 맴돌 뿐이었다.

 

 

 

 

"당신의 아이를 낳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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