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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벨리우스는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마 그것은 시벨리우스뿐만이 아니라 함께 여행을 다녔던 이들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군가 부탁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웃는 얼굴을 유지하고 있었다. 포커페이스 같은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즐겁다는 얼굴로 모든 일을 웃으며 지켜보던 그녀의 모습은 가끔 소름이 돋기도 할 정도였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난 방관자의 눈으로 모든 것을 지켜보던 그녀의 표정이 무너진 것은 제 혈육의 죽음을 목격했을 때였다. 마신의 장난에 빠져 지독한 환상에 빠졌을 때도 잠깐 흔들리는 모습만 보여주던 그녀의 표정은 차갑게 자리했던 제 동생의 육체 앞에서 완전히 일그러져 버리고 말았다. 딱 하루, 하루를 그렇게 울음으로 보낸 그녀는 다음 날부터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다녀 주변 사람들로부터 걱정 어린 시선을 받기도 했다. 본인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시벨리우스는 다른 이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혈육의 시신에 매달려 오열을 하던 그녀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화려한 방문을 열고 들어간 시벨리우스는 베개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두 가지 흑색의 머리칼을 내려다보았다. 넓은 침대의 옆, 탁상 위에는 익숙한 금색 머리 장식이 놓여 있었다. 잠시 머리 장식에 시선을 두었던 그는 익숙한 둥그런 머리를 툭툭 건드렸다.

 

“어이. 일어나. 데르온 녀석이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내가 보모도 아니고 일일이 널 깨우러 와야 하느냔 말이다. 시벨리우스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막상 입 밖으로는 꺼내지 않았다. 몇 번을 그렇게 두들기고 난 후에야, 아스모델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이미 한참 전에 깨어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시벨리우스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잠시간 이어지던 눈싸움은 누군가의 뒤척이는 소리에 멈추었다.

아스모델은 시벨리우스를 올려다보던 눈을 미련 없다는 듯 아래로 내려 제 품의 연인을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겼다. 그것을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이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스모델은 아랑곳하지 않고 퍽 사랑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뒤척이던 움직임이 멈추고 다시 고른 숨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아스모델은 느리게 제 몸을 일으켰다. 아직 잠들어 있는 이사벨라의 품에 베개를 하나 안겨주고 나서야 그는 침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때까지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시벨리우스를 보고 아스모델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쯧.”

“뭐?! 야! 너 방금 혀 찼냐?!”

“시끄럽거든. 누나 자는 거 안 보여? 준비해서 나갈 테니까 나가.”

 

뭐, 뭐? 저 마족 꼬맹이가 진짜!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저에게 대충 손을 휘젓는 모습은 시벨리우스를 열 받게 하는 데에 충분했다. 자연스레 언성을 높인 그의 모습에 아스모델은 인상을 팍 찌푸리며 그에게 축객령을 내렸다. 아차, 싶어 이사벨라에게 시선을 돌린 틈을 타 시벨리우스는 방 밖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문밖에서 눈을 느리게 깜박이던 그는 뒤늦게서야 자신이 밖으로 쫓겨났음을 깨닫고 방문을 두들기려 했다. 주먹이 문에 닿기 직전, 손을 멈춘 그는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이사벨라를 떠올리고는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곧 올 테니 그때 쳐야지.

 

아스모델은 준비가 끝난 후에도 방 밖으로 나가지 않고 있었다. 데르온이 집무실에서 발을 구르고 있을 것을 알면서도 그는 침대에 앉은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이불을 꼬옥 말아 쥐고 있는 이사벨라의 손을 가볍게 쓰다듬는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녀는 제 혈육이 죽은 그 날 이후로, 부쩍 잠이 늘어 생활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죽은 듯이 깊은 잠에 빠진 그녀를 처음에는 흔들어 깨우기도 했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는 않았다. 지금에서는 그저 그녀가 스스로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혈육의 죽음이 크게 다가온 거겠지.’

 

이사벨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을 알고 제일 먼저 찾은 인물은 트로웰이었다. 아름답기뿐만이 아니라 현명함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땅의 정령왕이기도 했지만, 혈육의 다음으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이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인 트로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니까. 난감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던 트로웰의 모습이 기억 속에 선명했다.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어. 벨라가 스스로 일어날 수 있어야 해.’

‘많은 시간이 걸릴 거야. 자신을 제일 중요시하는 드래곤들 사이에서도 벨라에게 라피의 의미는 남달랐으니까.’

‘역시 마신의 촉망을 받는 마왕은 다른 건가? 너도 상당히 힘들 텐데, 잘 버티고 있구나.’

 

당연한 소릴. 대견하다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던 황금빛 눈을 똑바로 마주했던 그는 속으로 그렇게 답했다. 입 밖으로 대답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트로웰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말을 직후로, 트로웰은 소리 내서 웃으며 정령계로 돌아가 버렸으니까.

침대 끝에 걸터앉은 채로 아스모델은 손을 뻗어 부스스하게 떠 있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주었다. 내내 잠만 자고 있다 보니 머리가 엉망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 좋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겨주던 그는 다시는 뜨지 않을 것만 같은 눈 위로 가볍게 입 맞추고 나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신을 기다리며 발을 구르고 있을 데르온과 투덜거리고 있을 시벨리우스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미간이 찌푸려졌다. 또, 또 다들 잔소리나 하겠지. 물론 그것을 얌전히 듣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방 안에는 이사벨라의 고른 숨소리와 방을 나서려는 아스모델의 발소리만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네가 태어나길 기다리고 있었단다, 아스.’

 

방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스모델은 문손잡이에 손을 올려놓은 채, 고개를 돌려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일어날지, 내일 일어날지, 아니면 또 며칠이 지난 뒤에나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그는 오늘도 간절히 바라며 방을 나섰다.

그녀가 오늘은 제발 일어나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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