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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안개거리뿐만 아니라 이슈가르드 하층은 휴일 낮이라고 하는 시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사람의 모습을 찾아보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어느샌가 잊힌 기사 주점이나 여인숙 '아홉구름'에서나 간간히 새어나오는 목소리들이 전부일 정도로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도시가 되어있었다. 들리는 목소리의 대부분은 취기 가득한 주정뱅이들의 지나간 옛 이야기일 정도로, 이슈가르드 상층과 같은 생활감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하긴 여기서 그런 웃음소리 같은 것이 들려도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어울리지 않겠지만.


 
  구름안개거리와 잊힌 기사 주점 사이에 위치한 좁은 길목에는 누가 쌓아놓은 것인지 모를 빈 나무상자들이 가득했다. 상자에 내려앉은 먼지가 옷에 묻어나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 카나는 상자를 벽 삼아 등을 기댄채, 제 앞머리를 거친 손바닥으로 흩트려놓았다.


  - 용시전쟁의 끝에 인간에게 구원이란 찾아올 것인가.

  몇백년간 계속해온 용시전쟁이 끝난다면 평민들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교황청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다녔다. 그나마 사람들의 왕래가 이루어지는 성 발루아양 광장에서 저렇게 말하며 다음번 전투에 참여할 인원을 모으고 있던 창천 기시단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평민들이 이렇게 자신의 몸을 숨기고, 정체 모를 불안감으로부터 숨어드는 것은 용시전쟁 때문이 아니라 같은 이슈가르드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을 교황창은 알고 있을 것인가.

 

 


 

  “으아아아악, 기사님.”
 

  흐려져가는 하늘을 올려보며 카나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잊힌 기사 주점과 연결된 나무 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힘없이 열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인영이 내팽겨치듯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꽤나 많은 상처가 난 얼굴하며 핏자국이 얼핏 보이는 모습은 사실 이슈가르드 하층에서 쉽게 보이는 모습 중 하나였다. 게다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을 지탱 삼아 몸을 일으키는 그가 내뱉은 단어는 아마도,


  "이단자를 신성재판소로 데려간다."

  나무문이 마치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 마냥, 발로 빌면서 나오는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기사단. 누가 보아도 창천기사단의 고위 사제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이래서 하층은." 이라고 중얼거리며 성큼성큼 발을 내딛었다. 교황청 말대로 용시전쟁이 끝나고 평민들에게도 구원이 찾아온다면, 그때는 상층과 하층이라고 하는 인간 계급에도 변혁이 찾아올 것인가. 어쩌면 하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구원은 그것일지 모르는데. 눈을 감으며 카나는 이슈가르드에, 자신에게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창천기사단의 명분은 '이교도 처단'이지만, 실상은 하층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하고 있는 '경고'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것을 알면서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고 마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때문에 이슈가르드 하층은 더더욱 활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ㅡ 구원을.”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는 창천기사단에게 끌려가는 사람의 비명소리와 뒤섞여 공기 중으로 녹아들었다. 이 곳을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카나가 어렸을 적부터 몇번이고 생각했던 꿈이었다. 이슈가르드 하층과 상층 일부분밖에 본 적 없는 그녀에게 있어서 이슈가르드 밖의 세상은 미지의 세계였다. 신자의 문 너머 세상은 교황청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몇 안되는 책을 통해 접해본 것이 전부일 정도로 그녀는 무지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어쩌면 더욱 행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민인 그녀가 신자의 문을 통과하는 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원하는 방식으로는.


  …… 집에 가자. 오늘은 오르슈팡이 놀러온다고 했으니까.

  카나는 고개를 떨구며 발을 힘없이 내딛었다. 나무판자 사이로 보이는 바닥은 이름 모를 사람들이 남긴 흔적으로 뒤덮여 원래의 색상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의 세상은, 또는 이슈가르드가 건국 되었을 무렵의 이 곳은 어떤 색을 하고 있었을까.

 

 

 


  "벌써 왔네."
  "오늘은 검술 훈련이 일찍 끝났다네! 자네는 이 추운 날씨에 어디를 갔다 온 것인가! 자네의 얼굴이 이렇게 차가운 것을 보면 오래 나가있던 모양이군!"

  간만에 만나는 친구는 여전했다. 기세좋게 카나에게 달려온 오르슈팡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크게 흔들더니, 이내 그녀의 얼굴을 만지며 연신 "감기라도 걸린건 아닌가!" 라며 큰 목소리를 냈다. 오르슈팡 그레이스톤. 서로에게 있어서 몇 안되는 친구관계의 그는, 만날때마다 카나에게 이유 모를 안도감을 전해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당사자조차 모르는 작은 감정이었기에, 그녀는 알아차리는 일도 없이 오르슈팡에게 진정하라는 듯이 멋쩍게 웃어보였다.

  "일단 진정하고, 오늘은 무슨 일로 온거야?"
  "아아. 자네에게 가장 먼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네! 자네도 들으면 놀랄 것이라 내 장담하네!"

  사실 오르슈팡이 이렇게 들떠있는 모습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친구를 자리에 앉히며 카나는 "알았어. 그러니까 천천히 말해줘." 라며 진정시키듯 말했다. 아마 그가 이렇게 들뜰 정도의 일이라면 백작 부인의 인정이라거나, 아유나르트 가문 자제랑 연관 되어있는 일일까.

  "이번에 커르다스 중앙고지에 파견되는 기사단에 내가 포함되었다네! 게다가 프란셀도 아유나르트 가문의 일원으로서 간다고 말이 나온 모양일세!"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렇게 말하며 오르슈팡은 생각만으로도 다시 들뜬 것인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문 사람들에게 순수하게 인정 받는 것이 오르슈팡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이유 모를 아쉬움이 뒤섞인 얼굴로 친구를 쳐다보았다. 아마 이번 일은 오르슈팡에게 있어서 아유나르트 자제와 알게 된 것만큼이나 중요한 순간이 될 것이다. 친구라면 기뻐해야할 일이지만, 그녀는 오르슈팡의 말을 들을때마다 가슴 한구석에 밀려오는 묘한 감정을 애써 죽이며 입술을 뗐다.

  "정말 축하해! 친구가 이렇게 성공하다니. 나도 기뻐! 그러면 아유나르트 가문의 자제랑 같이 나가는거야? 언제 나가는거야?"

  제자리에서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던 오르슈팡은 카나의 말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 라는 소리와 함께 제 손바닥을 부딪혔다. 그가 저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약간 핀트가 엇나간 상황에서 종종 보이던 것이었기에, 카나는 약간 불안한 얼굴로 친구를 응시했다.

  "그리고 이번에 카나, 자네도 같이 포함되었다네! 나와 함께 이슈가르드를 나가는 것일세!"
  "…… 뭐라고? 난 오르슈팡이나 그 자제처럼 명문가의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고 기사나 마법사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야.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한 내가 무슨 수로 포함 될 수 있겠어."
  "그건 아무런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이미 그대의 이름도 명단에 적어두었다네."
  "그거 본 사람들이 하던 말 없어?"
  "아마 자네도 나처럼 다른 가문의 사생아라고 생각했던 듯 싶네. 그러니까 가문명은 일부러 묻지 않은 것이겠지. 신원확인으로는 나와 프란셀이 있으니까 말일세."
 
  오르슈팡의 그 말에 카나는 순간 뒷통수를 크게 얻어 맞은 것처럼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자신을 배려해서 한 행동에 놀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놀란 것은 오르슈팡이 자신 스스로를 '인정'했다는 일이었다. 포르탕 가문의 사생아였기 때문인지, 어린 무렵의 오르슈팡은 자신을 인정받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었다. 동시에 그것은 사생아로서의 자신을 부정하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스스로를 인정했다는 것은 그녀에게 놀라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출발은 이번달 말이라네. 아마 별 다른 일이 없는 이상, 이슈가르드에 다시 돌아오는 일은 없을지 모르네. 이런 중요한 일을 자네에게 말 없이 멋대로 진행시켜서 미안하네."

  기세좋게 첫 말을 꺼낸 것과 달리 마지막 문장으로 향할수록 오르슈팡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런 대답을 돌려주지 않는 카나의 반응을 오해한 것인지. 그는 "아무 말 없이 진행해서 미안해." 라며 카나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간만에 만난 친구는 여전히 다른 사람의 반응을 살피는 버릇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손을 통해서 전달되기 바라는 습관도. 그리고 체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여린 마음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카나는 "화난거 아니니까 괜찮아." 라며 자신 역시 오르슈팡의 손을 붙잡았다.
 

 

 

 

  "저기 보이는게 하얀테 설원이네!"
 
  오르슈팡은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친구를 쳐다보았다. 이슈가르드에 펼쳐져 잇는 마법 결계가 중점적으로 지나가는 곳이 이슈가르드 상층의 교황청과, 하층의 신자의 문이라는 것은 이슈가르드 사람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중 하나였다. 저 자체만으로도 막대한 에너지를 뿜어내는 결계는 잠시 풀었다고는 하나, 막대한 에너지를 억누를 수 없었기에 카나는 이슈가르드를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지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사실이 걱정되었기에, 오르슈팡은 그녀 옆으로 다가와 자신이 보고 있는 풍경을 알려주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카나, 그렇게 안 좋으면 다시 이슈가르드로 돌아가는게."
  "아냐, 난 괜찮아. 난 괜찮으니까 아유나르트 자제한테 가서 회의라도 하고 오는게 어때?"
  "자네도 어지간히 프란셀을 아유나르트 자제라고 부르는군. 그냥 편하게 프란셀이라고 하면 좋을텐데."
  "나는 친구가 아니니까. 자, 어서 가서 이야기 하고 돌아와. 아유나트르 사람들은 자제가 이끌어도, 포르탕 사람들은 오르슈팡이 이끌어야지. 안그래, 오르슈팡님?"


  그 말을 하며 카나는 쉽게 움직이지 않는 친구를 보내듯이 손인사를 취해보였다. 힘없이 흔들흔들 거리는 손을 보며 오르슈팡은 "아아. 자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다녀오겠네." 라며 몇번의 시선을 보낸뒤 몸을 돌렸다. 이슈가르드 너머의 세상과 친구의 뒷모습을 함께 바라보며 그녀는 연신 입술을 달싹이다 굳게 다물었다.


  자신이 지친 이유는 그가 생각하는 것처럼 이슈가르드 마법 장벽을 뚫고 나오는데 지쳐서가 아니라, 이슈가르드 자체를 벗어났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그토록 나오고 싶었던 세상이건만, 새하얀 눈이 내리는 지역은 전혀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나를 지배하는 감정은 영문 모를 무기력함과 피곤함이었다. 차라리 이슈가르드 안에 남아있는게 더 행복했을까. 이야기를 나누던 오르슈팡이 "이도넬 점성대로 향할 인원을 뽑기 위해서 이곳에서 잠시 쉬었다 가겠다! 전원 휴식할 준비를!" 라며 말하는 소리를 들으며 카나는 타고 있던 말에서 몸을 내렸다.

  "오르슈팡, 나 잠시만 산책 좀 하고 올게!"


  자신이 한 말을 오르슈팡이 들었는지, 혹은 듣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카나는 대답을 기다리는 일도 없이 몸을 돌렸다. 하얀테 설원 너머로 얼핏 보이는 요새가 하얀테 전초지라고 누군가가 말했던 것을 떠올리며 터덜터덜. 발을 옮겼다. 이슈가르드에 내리는 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하게 내리는 눈에, 처음엔 옷 위로 쌓이던 눈을 털어냈던 카나도 이내 포기한 듯 고개만 간혹 옆으로 내저었다. 이 곳은 한번이라도 해가 났던 적이 있을까. 물론 해가 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라던가, 봄이라던가. 그런 것과는 거리가 전혀 멀어보이는 풍경.


  마을이 아닌 지역은 원래 이런 것인가. 걸어온 발자국 위로 다시 쌓여가는 흰눈의 잔상을 보며 카나는 흰숨을 길게 내뱉었다. 공중으로 사라져가는 입김을 바라보며 다시 발걸음을 옆으로 옮길때쯤, 두껍게 눈이 쌓여가는 이질적인 부분을 눈에 담았다. 마치 무언가가 지면위에 놓여진 상태에서 눈이 쌓이고 있는 기분.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낀 카나는 성큼성큼 발을 옮기면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조심스레 근접한 그녀는 손으로 조심스레 눈을 쓸어내렸다. 손 끝에 묻어나는 눈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연신 눈을 털어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 짐가방?"

  이런 설원에 위치하는 것 자체가 어색한 텅 빈 짐 가방 하나.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들이 전부 밖으로 굴러떨어진 것인지 가방이 위치한 곳 부근에는 이것처럼 무언가 위에 눈이 쌓이는 흔적이 쉽게 보였다. 도대체, 이건. 소지품이 이렇게 있다는 것은 이것의 주인이 부근에 있을 것이란 소리였기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며 사람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신발 한짝이었다. 눈이 많이 쌓였기 때문인지, 신발에 붙은 털엔 눈이 내려앉았지만 그것만으로도 값 비싸다는 것이 느껴지는 재질이었다.

  이슈가르드가 아닌 커르다스에 있는 사람, 그것도 이정도의 소지품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예사 사람이 아닐 것이다. 아유나르트 자제는 아유나르트 가문의 구역으로 가겠지만, 오르슈팡은 포르탕의 이름을 발휘하기엔 부족한 상황. 그렇기에 지금 이 사람이 오르슈팡을 도와줄 수 있다면.

  이슈가르드를 빠져나오면서 들던 무기력함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지, 카나는 손끝이 눈에 무뎌지는 것도 신경쓰지 않은채 사람이 눈에 묻힌 것이라 추측되는 곳을 파기 시작했다. 오르슈팡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짐가방이 떨어진 곳에서 불과 몇미터 떨어진 나무 밑에 쓰러지듯 파묻혀있던 사내를 찾아낸 카나는 가장 먼저 자신의 외투를 벗어들었다. 외투 내부에는 오르슈팡과 검술 훈련을 할 무렵에 입고 있던 가죽 방어구 덕분인지 생각보다 춥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외투를 사내의 몸에 두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까 들은 이야기에 의하면 평원을 넘어 있는 하얀테 전초지와 산맥과 비슷한 언덕을 넘어야 아도넬 점성대라고 하는 부락이 있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이 체력을 단련했다고는 하나 이 상황에서 누군가를 들쳐매고 갈 수가 없기에, 잠시 고민하던 카나는 외투를 비롯하여 온기가 전해질 만한 것들을 모두 덮어주고는 발을 내달렸다.

  이슈가르드에서 하층 상점가의 경비를 보는 일을 했던 그녀였다. 그랬기에 달리는 속도만큼은 -물론 이번은 눈까지 내리는 지역이라 그만큼의 속도는 나지 않을테지만- 손에 꼽을 만큼 뛰어났고, 이번 역시 그것을 택한 일은 결코 잘못되지 않았다. 운 좋게도 사내가 도착하기로 한 목적지가 하얀테 전초지였던 것인지, 전초지 외곽에 서있는 병사들에게 "갈색머리를 하고 얼굴에 상처난 귀족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까?" 라고 묻자 돌아온 대답은 "차르칸님을 아는 것인가!" 라며 목소리를 높혔다.

  "제 상관의 명을 받아 차르칸님을 찾기 시작했고, 발견했으나 도저히 모셔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치유술이 가능한 분과 따뜻한 옷가지, 그리고 마차를 준비해주십시오!"
 
  아주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거짓말. 다만 그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것인지 이내 하얀테 전초지에서 나오는 말 몇필과 마차. 그리고 치유사로 보이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며 카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제대로 된 끈을 잡은 듯 했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돌아온 카나는 차르칸이라는 이름의 사내를 마치, 처음부터 찾고 있었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당당한 움직임과 함께 응시했다.

  데려온 사람들이 피우는 불꽃을 비롯하여 야영지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환경이 되자 사내는 겨우 정신을 차린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

  "도와줘서 고맙네, 이름이,"
  "카나입니다, 차르칸님. 저희 오르슈팡님이 차르칸님을 찾아뵙고 싶다고 말씀하셔서 찾은 보람이 있었습니다."
  "오르슈팡?"
  "네, 저의 상관인 오르슈팡 그레이스톤이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프란셀 아유나르트님과 함께 이슈가르드에서 나와 커르다스 중앙고지의 사대명가 구역을 지키는 일을 맡으셨습니다. 이슈가르드 사람인 이상, 커르다스 중앙고지에 살아오신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셔서 실례인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차르칸님을 찾아온 점. 죄송합니다."
  "하하, 아닐세. 자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찌 살았겠는가. 오늘은 내가 가는 것이 무리이니 나 대신 집사를 데리고 가게. 그리고 팀. 자네는 가면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하얀테 전초지로 초대하겠다는 말씀도 전해드리도록."
  "네, 알겠습니다. 차르칸님."
 
  옆에서 말하는 이야기를 들으며 카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꼬리를 휘었다. 아마, 자신이 출발하기 전에 오르슈팡이 했던 이야기로 미루어보아 인원을 나누는데 있어서 분명히 잡음이 날 것이다. 아도넬 점성대로 가겠다는 인원은 많고, 오르슈팡이 가야할 곳에 가겠다는 사람은 몇 안 되는 상황이라면. 게다가 이슈가르드도 아닌 이 대륙에서 사생아인 오르슈팡의 말을 들어주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이번 일은 아유나르트의 자제도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모르는 지역이라면 가장 큰 힘은 이 곳에 살고 있던 귀족과의 인맥. 그것도 위험한 상황을 도와준 사람과의 연이라는 것을 카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아무렇지도 않은척, 이슈가르드 상층 사람들의 하인들이 하던 모션을 떠올리며 카나는 "그러면 팀님, 돌아가실까요?" 라며 공손한 태도를 취해보였다.

  "다녀오겠습니다."
  "아아, 최대한 정중하게 대하도록. 그리고 카나양, 자네는 내가 하얀테 전초지로 돌아가고 나면 꼭 사례하지."
  "아닙니다, 차르칸님.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오르슈팡님이 말해주신 덕분이지요."

  끝까지 오르슈팡의 이름을 챙기며 카나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그리고 팀이라고 하는 차르칸의 집사와 함께 걸으며 그녀는 커르다스의 이야기를 꽤나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분명 이것은 오르슈팡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정보들. 그녀는 머리속으로 정리하며 자신이 출발해온 무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휴식할 준비라고 말했건만 자신이 생각한 것처럼 무리들은 나눠져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유나르트 가문 사람들과 오르슈팡을 포함한 포르탕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이슈가르드에서 보내긴 했으나 정식으로 따지자면 이곳, 커르다스의 사람이라고 하는 신분을 가진 이들. 눈에 보일 정도로 나눠져있는 것을 알면서도 카나는 애써 모른척, "팀님. 저 곳에 오르슈팡님이 계십니다." 라며 오르슈팡과 프란셀이 있는 곳으로 팀을 안내했다.

  "카나! 자네는,"
  "오르슈팡님. 말씀하신 차르칸님의 집사님이십니다. 오르슈팡님께서 보이신 호의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으시다고,"
  "카나양이 말씀하시던 오르슈팡님이라고 하는 상관이 그대셨군요. 저는 차르칸 레이모어님의 집사라고 합니다. 차르칸님을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이슈가르드에서 커르다스로 오신 분들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이 곳의 정리가 끝나면 부디 하얀테 전초지의 차르칸님을 뵈러 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상했던 대로, 커르다스의 사람들은 그 이름에 멈칫 거리는 것이 느껴질 정도로 움츠려드는 모습을 곁눈질하며 카나는 작게 웃음지었다. 비록 이 상황을 오르슈팡은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아아. 차르칸님께서 초대해주신다면 꼭 가겠습니다.” 라며 정중하게 포즈를 취해보였다. 이것으로 오르슈팡의 발언권에 힘이 조금이라도 실렸으면 좋겠지만. 오르슈팡과 이야기를 나누던 팀은 이내 “그러면 저는 하얀테 전초지로 돌아가보겠습니다.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라는 소리와 함께 몸을 돌렸다. 팀이 사라지고 나서 잠시 멈칫하던 오르슈팡이 “자, 그러면 휴식은 취할대로 취했으니 다시 인원을 나누겠다!” 라며 당당하게 말을 꺼내는 모습을 카나는 내심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역시나 예상대로 이곳까지 오는 동안 작게 불평, 불만을 내뱉던 사람들이 오르슈팡의 지시를 따르는 모습은 그녀가 했던 고생을 잊어버리게끔 만들 정도로 흡족했다. 처음은 오르슈팡이라고 하는 사람보다 레이모어 가와 친분이 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는 것에 불과하더라도 그들도 오르슈팡과 지내다보면 그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때는 이번 같은 연극이 없더라도 그들 스스로가 오르슈팡의 말을 들어줄 것이다. 어쩌면 이번 일을 하기 위해서 자기가 이슈가르드를 나온 것이 아닐까. 물론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다만 그래도 오르슈팡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슈가르드를 빠져나오면서 느꼈던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사라진 것인지, 전보다 반짝거리는 지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깨 위로 무거운 감각이 느껴졌다.

 

 

 


  "잠깐 산책하고 온다던 사람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고 온 것인가. 그리고 외투는 어디 가고 그렇게 얇은 옷만 입고 있는건가.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아. 오르슈팡. 인원 정리는 다 된거야?"
  "말 돌리지 말게. 그보다 좀 크긴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걸세. 내 외투라도 제대로 입고 있도록. 안그래도 감기에 잘 걸리는 사람이."

  가져온 외투를 카나의 어깨에 걸쳐주고는 서툰 손질로 단추를 채우는 친구를 보며 카나는 “오르슈팡, 걱정한 거야?”라며 장난스레 웃어보였다.


  "말이라고 하는건가! 카나, 넌 매번 무모한 행동을 하고 있는게 가장 큰 문제라는걸."
  "그래도 행복하게 끝났으니까 좋은 일이잖아."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나, 난 자네가 고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네. 이거 보게, 자네의 손이 이렇게 차갑지 않은가."

  요령없이 외투를 가다듬은 오르슈팡은 카나의 손을 조심스레 붙잡았다. 붙잡은 자신의 손마저 차갑다고 느낄 정도이건만, 손의 주인은 상관없는지 "오르슈팡 손, 되게 따뜻하네." 라며 헤실헤실 웃어보였다.

 

 

  "나는 자네가 내 옆에 있어준다면 먼 길을 돌아가더라도,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상관없네."
  "……."
  "그러니까 앞으로 이렇게 무모한 행동은 하지 말고, 그저 내 옆에 있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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