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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 기슭을 가득 메운 은빛 억새가 바람에 서걱서걱 흔들리며 물결쳤습니다. 기차는 바람에 한들거리는 하늘의 억새밭 사이를, 하늘의 강과 삼각표가 내뿜는 파르스름한 빛 속을 끝없이 달려갔습니다.

 

/  미야자와 겐지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

 

 

 

"창 밖을 봐. 별들이 노래하고 있어."

수많은 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라지며 유리창 너머를 수놓았습니다. 쉴 새 없이 변하는 풍경에 채 입을 다물지 못하던 소년이 꿈꾸듯 말했습니다.

넓디넓은 기차 안에 승객은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새 옷을 입고 어여쁜 장신구들로 단장한 어린 소녀, 그리고 그 옆 좌석에 앉은 또래의 소년.

"이 열차는 어디로 가는 거야?" 제 손에 들린 티켓을 만지작거리며 소녀가 물었지만, 소년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저 너머의 하늘을 가리켰습니다.

"저것 좀 봐. 루비보다도 빨갛고, 리튬보다도 아름답다는 전갈의 불이야."

소녀는, 모든 이가 행복하기를 바랐던 전갈이 제 몸을 불태워 밤의 어둠을 비추게 되었다는 옛이야기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모든 이들을 위해서, 고통을 감내하고 영원히 타오르게 된 전갈은 과연 행복했을까요.

 

"다음 역이 마지막 정거장이야."

한참을 묵묵히 창 밖만 바라보던 소년이 중얼거렸습니다.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구나."

"너는 또 다시 떠날 테고." 소녀가 풀이 죽은 듯 조용히 말했습니다.

소년은 나직하게,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소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오래된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처럼 소녀는 흠칫 몸을 움츠렸습니다.

"세상에 영원이란 것은 없어. 모두들 언젠가는 떠나겠지만, 언젠가는 사라지겠지만..."

"그게 두려워. 누구든 언젠가는 떠난다는 그 사실이 두려워. 누군가의 시간이 갑작스레 멈추어버린다는 사실이 싫어." 소녀는 애써 소년의 쪽을 돌아보지 않기 위해 애쓰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안았습니다.

 

소년은 다시 유리창 너머로 눈을 돌렸습니다. 은하 기슭에 난 억새풀들과, 투명한 강을 가득 메우고 있는 별빛 물결. 선로 사이사이를 빛내는 가지각색의 조약돌들. 도저히 이 세상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그와 소녀가 탄 객차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흘러가듯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그 누구보다 용맹했던 전사가 있었어. 그의 검들은 타오르는 불꽃처럼 날카로웠고 그의 몸짓은 먹이를 향해 달려드는 맹수처럼 날렵했지. 비록 어느 싸움에서 한쪽 눈을 잃었다곤 했지만 그의 의지는 여전히 굳건했어."

 

"전사의 왕국은 아주 커다란 전투를 앞두고 있었어. 누구보다 용맹했던 그는 가장 먼저 그 곳에 자원했지. 그에게는 매우 사랑하는 이가 있었어. 전사가 그 이를 두고 떠나올 때, 그는 연인에게 이렇게 말했대. 사랑하는 이여, 내가 혹 저 하늘의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꿈 속의 길을 헤매지 않고 잠시나마 그대에게 찾아올 수 있도록 내 이름을 불러 주시오. 삶을 살아가는 그 누구보다 생생하게 나의 모든 것을 기억해주시오. 그러자 연인은 이렇게 말했대."

"매일 저녁, 태양이 저물고 황혼이 내려올 때, 그대와 함께 별을 바라보곤 했던 곳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꿈 속에서라도, 은하를 보고 싶소. "소녀가 대신 답했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면, 무엇을 할 거니?" 소년은 어딘지 애잔한 얼굴로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나는 깨어나고 싶지 않아." 소녀는 몸을 웅크렸습니다. "매일 꿈을 꿀 거야. 그리고 매일 기다릴 거야. 은하 저 편에서 너를 다시 만날 때까지."

괜한 투정을 부리는 어린아이처럼, 세차게 고개를 흔들며 울상을 짓는 소녀였습니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함께 있자. 널 위해서라면, 내 몸이 백 번은 불타도 상관 없어."

"네가 나 때문에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다시 혼자가 되면 나는 분명 슬퍼질 거야. 네가 다시 찾아올 때까지, 매일 네 빈자리를 그리워하며 끝이 없는 내리막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몰라."

소녀의 말에 소년은 다시 고개를 저었습니다. "행복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수많은 슬픔도 겪어야 해. 오르막도 내리막도, 진정한 행복으로 가는 한 걸음인걸."

 

바퀴가 선로에 마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기차는 완전히 멈추었습니다.

"나는 이제 내려야 해." 소년이 말했습니다.

"네가 그리워. 너를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해."

"우리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네 이야기는 계속되어 갈 거야. 그 이야기 속에 네가 없다면, 나는 조금 슬퍼질지도 몰라."

 

소녀는 그제서야 유리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았습니다. 희미하고 뿌옇게 가물거리는 들판 너머로, 소녀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야경보다도 아름다운 밤하늘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파란색, 자주색, 초록색... 색색의 별들이 한데 모여 곱디고운 비단 띠가 되어 하늘을 장식하였고, 그 중앙에는 솜씨 좋은 화가가 붓질해놓은 듯 수려하게 펼쳐진 은하수가 있었습니다.

객실 문이 열리고, 독안(獨眼)의 소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어린 소년의 모습에 소녀가 사랑했던 이의 모습이 겹쳐 보였습니다. 그는 하늘 저 편으로 이어진 길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고는, 마지막으로 소녀를 돌아보고 말했습니다.

 

"태양이 저무는 모습을 바라볼 때마다, 그 황혼 속에 내가 있다 생각해 줘. 하늘을 누비는 구름 속에, 숲과 나무들을 적시는 빗방울 속에 내가 있다 생각해 줘. 행성의 밤을 수놓는 유성 속에 내가 있다 생각해 줘.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소년의 한 쪽만 남은 푸른빛 눈동자에 언뜻, 깊디 깊은 은하수가 비추어지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누구든 진짜로 좋은 일을 하면 가장 행복한 거잖아. 그러니 엄마도 날 용서해 주실 거라고 생각해."

/ '은하철도의 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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